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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안고, 울리고-31화 (31/82)

31.

조금 화가 난 듯, 입술 끝이 일자로 굳게 다물린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

긴 다리를 구부려 앉은 정혁이 제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워주고 있었다.

저를 적시던 굵은 빗방울은 이제 사정없이 그의 머리와 어깨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항상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던 머리가 물을 먹고 그의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

그런데도 몸이 젖는 걸 개의치 않는지 그는 말없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사람이 여길 왜…….

아, 하정혁 씨 집 앞이었지.

너무 오랫동안 추위에 노출된 탓이었는지 의식이 흐릿했다.

“왜 이러고 있어.”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빗소리와 섞여 감미롭게 들렸다.

뭐라 대답을 하고 싶지만, 입술이 얼어붙어 움직이질 않았다.

눈꺼풀이 하염없이 무거웠다.

은서가 천천히 눈을 깜빡이는데 뜨거운 열기가 은서의 차가운 손등을 덮었다.

“일어나.”

그의 온기가 닿는 순간, 어쩐지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요지부동인 은서를 보던 정혁이 곧 우산을 내려놓고 그대로 은서를 안아 들었다.

‘옷이 더 젖을 텐데.’

제 몸에 닿은 그의 셔츠가 젖어 드는 게 보였다.

그에게 폐를 끼치게 될 것이 신경이 쓰였지만, 목소리가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어렵지 않게 은서를 든 채로 조수석 문을 연 정혁이 그녀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말없이 안전벨트를 매주고 문을 닫은 그가 보닛 앞으로 돌아 운전석에 올랐다.

히터의 온도를 최대치로 올린 정혁은 곧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차은서. 아직 자지 마.”

주차장까지 짧은 거리였는데도 그녀는 피곤했는지 축 늘어졌다.

졸음이 가득한 은서의 얼굴을 본 정혁이 그녀의 볼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그녀를 보며 한숨을 쉰 정혁이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은서를 안아 들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욕실로 향한 정혁은 욕조 안에 은서를 내려놓고 샤워기를 틀었다.

너무 뜨겁지 않게 온도를 맞춘 온수가 얼어붙은 몸을 녹이기 시작했다.

“하아.”

그제야 딱딱하게 굳어 있던 은서의 어깨가 조금 풀어졌다.

“차은서.”

욕조에 걸터앉은 정혁이 은서의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샤워기의 물방울이 튀어 한쪽 눈을 찡그린 은서의 얼굴이 조명에 드러났다.

“씻겨 줘야 해?”

“……”

은서가 희미하지만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녹이고 나와.”

겨우 고개만 끄덕이는 그녀를 두고 정혁은 욕실을 나왔다.

혹 성치 않은 그녀가 움직이다 사고라도 생길까 봐 문을 전부 닫지는 않았다.

은서에게서 멀어지고 나서야 정혁은 제 젖은 머리를 짜증스럽게 쓸어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업무를 보는 내내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이곳으로 온 참이었다.

‘와 보길 잘했군.’

시야조차 확보하기 어려울 정도로 쏟아지던 비였다.

길바닥에 주저앉아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그래, 말 그대로 돌아버릴 것 같았다.

만약 제가 이곳으로 와보지 않았더라면.

그 길을 지나치지 않았더라면.

저 미련한 차은서가 언제까지 그러고 있었을지 알 수 없었다.

아찔해져 오는 감정이 참 쓰디썼다.

진작 비밀번호와 카드키를 건넬 걸 그랬다. 이제 와 후회해야 무슨 소용인가 싶긴 했지만.

감정을 겨우 추스르는 정혁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

노곤해진 몸으로 욕실을 나온 은서는 드레스룸에서 제가 정리해두었던 옷가지 중 하나를 꺼내 입었다.

그가 준 옷을 입는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힘없는 다리를 휘적거리며 거실로 향하자 언제 샤워를 마쳤는지 옷을 갈아입은 그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머리를 내린 탓에 정혁의 날카로운 턱선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양 팔꿈치를 각 무릎 위에 얹고 깍지 낀 손에 턱을 괴고 있던 그가 눈동자만 굴려 은서를 보았다.

“…….”

말없이 서로를 오가는 시선이 무거웠다.

“왜 연락 안 했어.”

“…….”

추궁하듯 묻는 말에 대답하기가 곤란했다.

그냥 혼이 나간 상태에서도 당신만 떠올랐다고, 솔직하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내가 지나가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어.”

낮은 목소리에 한숨이 섞여 있었다.

“이리 와.”

허리를 세운 정혁이 손짓했다.

은서는 머뭇거리면서도 순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향기가 가득한 그의 공간에 제가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안도감을 주었다.

손이 닿는 거리까지 들어오자 정혁은 그대로 은서의 양손을 붙잡으며 그녀의 몸으로 고개를 툭 떨어트렸다.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어.”

“……미안해요.”

은서는 이유 모를 사과를 건넸다.

“나한테 미안해할 일이 아니지.”

“…….”

“네 자신에게 미안해해야지.”

타박하며 고개를 들어 올린 정혁이 픽 웃다 말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차은서.”

은서의 한쪽 뺨이 부풀어 있었다.

아래에서 그녀를 올려다보게 된 탓에, 내내 젖은 머리가 가리고 있어 보지 못했던 흔적이 선명히 보였다.

“얼굴이 왜 이 모양이야.”

“아…….”

은서가 뒤늦게 뺨을 가리려 했지만, 정혁이 붙든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의 날카로운 눈이 빠르게 움직이며 제 몸을 샅샅이 훑는 게 느껴졌다.

“다른 데는.”

“없어요.”

다급히 고개를 내젓는 은서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누구야.”

정혁이 낮게 물었다.

잘 벼린 칼날처럼 음산하기까지 한 목소리였다.

“그냥, 아무것도 안 물어보면 안 돼요?”

은서가 곤란한 기색을 내비쳤다.

차마 중훈의 이야기를 그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가족이기에, 그의 치부를 드러내는 건 제 치부를 드러내는 것과도 같았다.

겨우 진정됐는데, 말하는 순간 그 고통이 저를 잠식할 것 같기도 했다.

“말…… 안 하고 싶어요. 이렇게 찾아와 놓고 뻔뻔한 건 알지만…….”

은서가 정혁의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

이 여자는 지금 제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알까.

서러워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하고서 또 버틴다.

대체 그 선은 언제 넘어오게 해 줄 건데.

“차은서.”

정혁이 은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냥 울어, 버티지 말고.”

“…….”

이상한 일이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텅 비어있는 것 같았던 속이 순식간에 차올랐다.

부풀어 오른 물방울이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한번 터진 눈물은 기다렸다는 듯 마구 차올랐다.

연신 쏟아지는 눈물을 막을 길이 없었다.

“흑.”

흐느끼는 은서의 몸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정혁은 그대로 그녀를 제품으로 끌어당겼다.

힘없이 딸려온 은서를 제 무릎 위에 올려 둔 정혁이 가만히 은서를 안아주었다.

아이를 안듯, 품에 안고 은서의 등을 가만히 쓸어주었다.

얼굴을 가린 그녀는 크게 소리 내지도 못하고 정혁의 옷자락만 꼭 쥔 채 숨을 참아가며 울었다.

지나치게 가벼워 안은 느낌조차 없는 그녀의 눈물은 참 무거웠다.

*

“우리 은서는 어쩜 이렇게 나를 쏙 빼닮았을까.”

수영이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얼굴만 엄마 닮은 줄 알았는데 그림도 잘 그리네.”

“난 엄마처럼 훌륭한 화가가 될래.”

“그래? 그럼 우리 은서가 크면 꼭 같이 전시회를 열자.”

“정말? 약속.”

“약속. 그럼 우리 은서도 엄마랑 약속 하나 할래?”

“응?”

“우리 은서는, 나중에 커서 꼭 사랑하는 사람하고 행복해지기.”

알쏭달쏭한 표정인 은서를 보며 수영이 제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자, 손가락 걸자.”

“응.”

어린 은서는 그저 엄마의 손가락에 제 앙증맞은 손가락을 걸며 해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은서는 행복해 보이는 두 사람을 그리운 듯 바라봤다.

그러다 갑자기 화면이 바뀌었다.

“죽어, 차라리 죽으라고!”

“안 그래도 죽을 거야!”

“뭐? 지금 뭘 잘했다고 큰 소리야!”

“지긋지긋해! 당신이 끔찍하다고!”

“뭐야?”

“은서 데리고 나갈 거야.”

“웃기지 마. 은서는 물론이고 너도 못 나가니까.”

“하…….”

수영의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비틀렸다.

“정말, 은서가 당신 딸이라고 생각해?”

·

“헉.”

거친 숨을 토해낸 은서가 꿈에서 깨어났다.

악몽이었다.

“왜 그래.”

숨을 고르던 은서는 어둠 속에서 저를 지켜보고 있는 정혁을 발견했다.

“꿈을…….”

정혁이 취침 등을 켠 탓에 주변이 밝아졌다. 은서가 눈을 찡그렸다 뜨며 빛에 적응했다.

그는 누워 있는 은서 옆에 몸을 세운 채 앉아 있었다.

내내 자는 곁에 있었던 건가 싶어 놀랐다가 은서는 뒤늦게 제 손이 정혁의 옷자락을 쥐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은서는 은근슬쩍 손에 힘을 뺐다.

아이처럼 투정을 부린 것 같아 조금 부끄러웠다.

“그래 봐야 늦었어.”

은서의 속내를 눈치챈 정혁이 픽 웃으며 은서에게 시선을 내렸다.

“흠뻑 젖었네.”

침대 헤드에 걸쳤던 팔을 내려 은서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볼의 붓기는 조금 가라앉은 듯했다.

손바닥만 한 얼굴을 건드렸을 그 누군가를 생각하며 정혁은 분노를 삼켰다.

은서의 이마에서 코로, 입술로 찬찬히 시선을 옮기던 정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숙제 내주자마자 까먹은 모양이야.”

“아.”

뒤늦게 깨달은 은서가 작게 침음했다.

정혁의 손가락이 은서의 입술을 스치듯 가볍게 쓸었다.

“입술, 깨물지 말라 했을 텐데.”

그의 말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은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정혁을 마주 보고 앉았다.

양손으로 침대를 짚은 탓에 그녀의 몸이 정혁에게로 조금 기울었다.

“…….”

한쪽 손을 든 은서가 망설이듯 머뭇거리다 정혁의 가슴께에 얹었다.

이해할 수 없지만, 지금 제게 가장 절실한 건 그였다.

그에게로 더 가까이 몸을 기울이는 순간, 균형이 깨지며 몸이 휘청였다.

정혁이 빠르게 그녀의 허리를 감아 고정했다.

“아직 흘릴 눈물이 남았어?”

붉어지는 눈동자를 본 정혁이 그녀의 긴 머리를 손끝으로 걷어내며 물었다.

은서가 말없이 고개를 기울여 그의 손바닥에 제 얼굴을 붙였다.

자연스레 그녀의 가녀린 목과 얼굴을 손으로 감싸 쥐게 된 정혁이 엄지로 토독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닦아냈다.

흠뻑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다 드러난 투명한 눈동자는 정혁에게 올곧이 향해 있었다.

은서가 조심스레 몸을 움직여 침대 위에 길게 뻗어 있는 그의 다리 위로 올라갔다.

그의 한쪽 다리를 제 다리 사이에 두자 그와의 사이에는 약간의 간격만이 남았다.

조금 더 고개를 숙이자 그와 입술이 닿을 듯 가까워졌다.

달콤한 숨결이 붉게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게 느껴졌다.

떨리는 호흡을 숨기지 못하고 정혁을 보던 은서가 잡고 있던 그의 옷깃을 제게로 끌어당기며 눈을 감았다.

“…….”

정혁의 침잠된 눈동자가 은서를 담았다.

그녀가 제게 바라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명확한 태도였다.

더는 망설이기만 할 수 없었다.

은서의 허리를 강하게 안은 정혁이 이윽고 붉은 입술을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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