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30화 (30/82)

30.

“4분기만 계획대로 나와 준다면, 내년에는 투자금을 더 풀어도 괜찮을 것 같아.”

“…….”

“일본에서 수출을 막은 덕에 네가 그때 말했던 디스플레이 소재 회사도 호재로 전환됐고.”

“…….”

도훈은 말을 하다 말고 정혁을 물끄러미 봤다.

이렇게 보고를 하다 말고 멈출 때면 보통 힐끗 저를 본 뒤 계속하라고 신호를 주는 정혁이다.

그런데 의자에 몸을 파묻은 정혁은 한 손에 턱을 괴고 고개를 기울인 채, 손에 쥔 펜촉을 보고서 위에 일정한 속도로 찍기만 하고 있었다.

“……저기요?”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정혁에 도훈이 손을 펼쳐 정혁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대표님? 듣고 계신가요?”

“…….”

그제야 정혁이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내리고 고개를 바로 했다.

“네가 딴생각을 다 할 때도 있다?”

“…….”

정혁이 피곤한 듯 미간을 문질렀다.

“……신경 쓰여.”

“응? 뭐가?”

“미안. 계속해.”

정혁이 끊긴 보고를 계속하라 지시했다.

은서의 목소리를 들은 이후, 일에 집중하기가 영 어려웠다.

바스러질 것처럼 연약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뭔가 놓치고 있는 듯한, 찝찝한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약속 날이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빨리 얼굴을 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럼 들어가십시오, 의원님.”

“그래요, 민준군. 만나서 반가웠네.”

“네.”

빙긋 웃는 남자의 시선이 중훈 옆에 인형처럼 서 있는 은서에게로 향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은서 씨.”

“…….”

대답 대신 은서는 단정하게 고개만 숙였다.

깨작대느라 제대로 먹지도 않았더니 뒤늦은 허기가 올라왔다.

빨리 이 자리가 정리됐으면 싶었다.

“또 봐요.”

침묵에도 개의치 않는지 그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다음을 기약했다.

은서는 정작 그 모습을 보며 다른 사람을 떠올렸다.

잘 웃지도 않고, 웃는다고 해봐야 입꼬리 한쪽만 끌어올리는 게 다일 뿐인 남자였다.

그런데 그 미소가 왜 갑자기 보고 싶은 건지.

“이만 가지.”

중훈을 따라 차에 오른 은서는 끝끝내 민준에게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았다.

예의상의 미소조차 짓지 않은 것도 당연했다.

“크흠.”

중훈이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쳤으나, 은서는 못 들은 체했다.

보는 눈이 있는 곳에서는 어쩌지 못할 중훈이란 걸 알았다.

당장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을 하게 생긴 마당에, 중훈에게 무조건 맞춰줄 순 없었다.

두 사람이 차에 오르고, 중훈이 창문 너머로 민준과 한 번 더 인사를 나누고서야 차가 출발했다.

“…….”

차 안에는 정적만 흘렀다.

옆을 보지 않아도 중훈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게 느껴졌다.

‘알 게 뭐야.’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은서는 눈을 감아 버렸다.

어차피 집에 도착하는 순간 날벼락이 떨어질 것이다.

그때까지만이라도 아무것도 모르는 체 버티고 싶었다.

“내년 봄에 날 잡을 생각이다.”

아니나 다를까.

집 대문을 넘어서는데, 중훈이 난데없이 통보했다.

마치 일상적인 소식을 전하듯 무감한 말투였다.

“……아빠.”

“하나님을 섬기는 건실한 청년이야. 가정에 충실하고 성실할 거다. 긴말할 거 없다. 네겐 가장 좋은 선택지야.”

“아빠.”

은서가 목소리를 높였다.

중훈이 신앙심이 깊어 교회에 나가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듯, 저를 설득시키려는 중훈의 태도에 또 한 번 빈정이 상했다.

“전 결혼 안 해요.”

“…….”

중훈이 걸음을 멈췄다.

고집스러운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자니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는 것만 같았다.

반항의 결과가 어떤지는 잘 알고 있지만, 이번만큼은 참아줄 수 없었다.

“하고 싶지 않아요, 결혼.”

은서가 한 번 더 말에 힘을 실었다.

중훈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일그러진 얼굴이 드러나는 걸 보는 건 심히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아빠가 제일 잘 알잖아, 응? 내가 왜 결혼하기 싫은지!”

기억 속 다정함을 일깨워보려, 은서는 호소하듯 예전 말투를 끄집어냈다.

중훈에게 까불면서 안기던 예전과는 달리, 언제부턴가 거리를 둔 채 꼬박꼬박 존댓말을 써 왔었다.

“난 무서워. 무섭다고요, 응?”

은서가 울 것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중훈을 설득하려 했다.

점점 중훈의 감정이 고조되는 걸 보며 은서는 지금껏 꺼내지 못했던 말을 뱉었다.

“사랑해서 결혼한 아빠랑 엄마도 결국 그렇게 끝났잖……!”

철썩.

불이 번쩍 일면서 은서의 말이 툭 끊겼다.

입 안에서 뜨거운 액체가 흐르는가 싶더니 비린 맛이 훅 풍겼다.

“…….”

혼이 나간 얼굴로 은서는 중훈을 마주 봤다.

있는 힘껏 뺨을 후려친 중훈은 고요히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

“어디서 큰 소리야.”

몸이 크게 휘청였지만 넘어지지 않고 버틴 덕에 은서의 가녀린 몸은 중훈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내야만 했다.

“누가 그 애미에 그 딸년 아니랄까 봐. 못 된 것만 골고루 빼다 박았구나.”

“!”

은서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물들었다.

“결혼을 안 하면? 응? 네 어미처럼 예술한답시고 설치고 다니면서 헤프게 굴 거냐?”

“……지금 무슨 말을…….”

은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도덕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이, 뻔뻔하기 그지없이 말이야.”

“…….”

“넌 내 하나뿐인 딸이야.”

중훈의 온몸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네가 그 더러운 년처럼 되게 두지 않을 거다.”

“왜 지금까지 저녁을 안 먹었어요?”

“당신이 해주는 밥이 제일 맛있어. 다른 데 가서는 못 먹겠더라고.”

“……금방 해줄게요.”

“고마워.”

수영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나긋나긋했고, 숨기지 못하는 사랑이 묻어나던 중훈이 떠올랐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보듯 늘 따뜻한 시선이었다.

“은서한테는 미안하지만, 아빠한테는 네 엄마가 항상 1등이란다.”

“그럼 나는?”

“은서는 2등.”

“뭐야.”

내심 자랑스러웠던 것도 같다.

서로 아끼며 사랑하고 사는 부모님이 있다는 게.

은서는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쩌면 제 기억이 잘못된 건 아닐까.

그 모든 시절이 전부 꿈이었던 건 아닐까.

지금 제가 중훈에게 들은 폭언이 뼈에 사무칠 정도로 아팠다.

“결혼해도 이 집에서 같이 살 거다.”

“…….”

“달라지는 건 없어.”

은서의 시선이 중훈의 뒤에 보이는 집으로 향했다.

안에 있을 경미가 생각났다.

“그 전에 내보낼 거야.”

은서가 생각하는 걸 알아챘는지, 중훈이 차갑게 말했다.

“……내보내 다뇨?”

은서는 또 한 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중훈은 처음부터 경미를 가족으로 여기지 않았던 거다.

“그럴 거면 왜 집으로 데려오신 건데요?”

수영이 떠난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중훈이 데려온 낯선 여자.

그녀를 받아들이는 데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었다.

이제야 겨우 가족으로 마음을 열게 됐는데.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거예요?”

은서는 눈앞의 낯선 남자를 보며 치를 떨었다.

진절머리가 났다.

소름이 돋았고, 무서웠다.

“엄마랑 나는 달라요. 나는 엄마가 아니잖아요.”

“더이상 그 여자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여자의 피를 다 뽑아내고 싶으니까.”

“…….”

잊으셨어요? 반은 당신 피를 물려받았을 수도 있잖아요.

은서는 혀끝에 맴도는 말을 씹어대다가 그대로 몸을 돌려 뛰쳐나왔다.

“뭐 하는 짓이야!”

등 뒤로 분노에 찬 고성이 들렸지만, 무시하고 내달렸다.

도저히 제정신으로 그곳에서 버틸 자신이 없었다.

*

“…….”

은서는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어느새 땅거미가 진 거리를 절뚝거리다시피 하며 끝없이 걸었다.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올 줄 알았는데, 오히려 바짝 마른 우물처럼 공허하기만 했다.

차라리 울면 개운해질까.

은서는 이런 진흙탕 같은 감정을 다루는 법을 알지 못했다.

목적지도 없이 방황하던 은서의 눈에 문득 낯익은 거리가 나타났다.

‘……아.’

은서는 제가 본능적으로 학교를 향해 걷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사거리 신호등 위에 걸린 표지판을 보며 은서는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학교로 간다 한들, 그녀가 마음 편히 있을 곳은 없었다.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이 서글픈 것 같기도 했다.

건널목의 초록 불이 몇 번이나 켜졌다 사라질 동안 은서는 그냥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둑해지던 거리는 이제 완전히 깜깜해져 건물과 자동차들이 내는 빛들만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그때, 어디에선가 귀에 익은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언젠가 정혁의 차 안에서 들었던 멜로디였다.

“원하잖아, 도망칠 곳.”

“…….”

“내가 도피처가 되어주겠다고. 차은서 양의.”

뇌리에 떠오르는 낮은 목소리에 은서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그의 차를 타고 지났던 길이었다.

또 한 번 초록 불이 들어왔을 때, 은서는 굳어 있던 걸음을 옮겼다.

“아.”

어느새 익숙해진 고급 빌라 단지가 눈에 들어오자 뒤늦게 다리의 통증이 느껴졌다.

한번 살아난 감각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끼게 했다.

그제야 은서는 제가 미련하게 여기까지 걸어왔다는 걸 인지했다.

하긴,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온 거였다.

“하아.”

어쩌자고 여길 왔는지.

이성을 되찾고 나니 정혁의 공간으로 온 게 잘못된 판단처럼 여겨졌다.

다시 되돌아가려는데, 차가운 물방울이 콧등에 떨어졌다.

“?”

후두둑.

얼마 지나지 않아 굵은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

은서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설상가상으로, 다리는 더이상 움직이지 못할 것처럼 무거운 상태였다.

고급 빌라촌이라 버스나 지하철은커녕, 지나가는 택시조차 없는 곳이었다.

“아, 모르겠다.”

그대로 담벼락에 기대앉은 은서는 지친 다리를 감싸 안았다.

거친 빗방울이 몸을 빠르게 적셨지만, 차라리 더 나은 것 같았다.

서늘한 공기에 정신이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몰랐다. 눈을 감고 차가운 빗방울을 고스란히 맞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몸을 두들기던 감각이 사라졌다. 사방은 여전히 땅을 두들기는 빗방울 소리로 요란했다.

의아함에 은서가 천천히 눈을 떴다.

“……뭐 하는 거야, 여기서.”

낮은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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