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29화 (29/82)

29.

[아직 출발 안 했죠? 일이 생겨 오늘 못 만나게 됐어요. 죄송해요.]

“…….”

막 사무실을 나서려던 정혁은 은서의 연락을 받고 문 앞에 멈춰 섰다.

제 업무를 방해할까 걱정하는 건지 은서는 늘 전화를 해오는 대신 문자를 남겼다.

그리고 늘 그랬듯, 정혁은 곧장 전화를 걸었다.

은서의 상황을 고려해 정해진 암묵적 약속과도 같았다.

-네…….

기다리고 있었는지, 신호음이 한 번 울렸을 뿐인데도 은서가 전화를 받았다.

-혹시 출발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다 죽어가는 사람처럼 힘이 없었다.

“아니. 나가려던 참이야.”

-다행이다.

“괜찮나.”

자세히 묻는 대신 정혁은 그녀의 안위만 확인했다.

-……미안해요, 갑자기 이렇게 돼서.

“미안해할 필요 없어.”

정혁은 한숨을 삼켰다.

은서는 괜찮냐는 제 질문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상태가 안 좋다는 건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다만, 그녀가 제게 솔직하게 답하지 않았다는 게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그럼…….

“차은서.”

-네.

“숙제 하나 내줄까?”

-……네?

“입술 깨물지 마, 지금부터.”

-그게 무슨…….

“기한은 다시 만나는 날까지야.”

몸을 돌려 자리로 돌아간 정혁이 달력으로 시선을 던졌다.

“숙제 안 한 학생이 어떻게 되는지는 알지?”

답이 없는 걸 보니 뭐라 받아칠까 고민하고 있을 모습이 눈에 훤했다.

“내 말, 명심하는 게 좋을 거야.”

-…….

“다시 연락하지.”

“…….”

통화를 마치고도 은서는 다시 강의실로 돌아가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정혁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나니 갑자기 몸에 한기가 들었다.

무심코 입술을 깨물려다 멈춘 탓에 입이 어정쩡하게 벌어졌다.

제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린 그였다. 직전에 약속을 취소했는데도,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엉뚱한 말만 해댔을 뿐이었다.

하긴……. 정혁은 오히려 제 업무를 볼 수 있게 돼 다행이라 여길 수도 있었다.

이 시간을 기다리는 건 어쩌면 저 하나였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문득 서운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니야.’

은서가 눈을 홉떴다.

서운한 게 아니라 그냥 중훈을 만나러 가기 싫어서 이런 감정이 드는 걸 거다.

은서는 휴대폰에 남아 있는 그의 흔적을 지우며 정혁에 대한 생각을 떨치려 애썼다.

어쨌든 그가 왜 저런 숙제를 냈는지, 만약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긴 했다.

제 입술을 매만지던 은서가 허탈하게 웃었다.

하긴, 지켰는지 아닌지 그가 알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

수업이 끝나고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움직여 도착한 곳은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이는 한정식집이었다.

입구부터가 거부감이 들 정도로 비밀스러워 보여 은서는 괜히 불안해졌다.

중훈이 모임을 가질 법한 공간에 저를 부를 이유가 대체 뭐인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잘 찾아오셨군요.”

미리 일러준 대로 연락을 하자 곧 보좌관이 입구로 나타나며 은서를 마중했다.

“…….”

“이쪽입니다, 은서 양.”

꾸벅 고개를 숙이자 그가 따라오라는 듯 손을 뻗었다.

불길함을 억누르며 은서는 그의 뒤를 따랐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장 깊숙한 곳까지 가서야 멈춰 선 남자가 미닫이문을 톡톡 두들겨 신호한 뒤 문을 열어 주었다.

열린 문 뒤로 중훈의 얼굴이 보였다.

예상과는 달리, 중훈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가 은서를 데리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들어오지 않고 뭐 해.”

젊은 남자의 뒷모습을 본 은서가 망설이자 중훈이 재촉했다.

다정함을 가장한 명령이었다.

겨우 한 발을 내디뎌 안으로 들어서자 은서의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그와 동시에 중훈을 마주 보고 앉아 있던 남자가 재킷을 잠그며 일어나 은서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오셨군요.”

깔끔한 정장을 갖춰 입은 남자는 모범생 같은 느낌이었다.

정혁보다 한 뼘쯤 작을까, 날카롭고 퇴폐적으로 보이는 정혁과는 달리 단정하고 순수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민준 군. 이쪽은 차은서, 내 딸아이라네. 인사하거라. 이쪽은 최민준 군이다.”

중훈이 앉은 채로 남자를 소개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은서 씨. 최민준입니다.”

남자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차은서입니다.”

중훈의 눈치를 힐긋 본 은서가 남자의 손끝만 잡았다가 금방 떼어냈다.

흉내만 낸 악수였음에도 남자는 불쾌한 기색 없이 제 손을 내렸다.

“일찍 일찍 다니지 않고.”

“……죄송해요.”

중훈의 핀잔에 익숙하게 반응한 은서가 중훈의 옆으로 가 앉았다.

민준까지 자리하자 중훈이 부드럽게 웃으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젊은 사람들끼리 알아서 하도록 둬야 하는 게 맞는데, 내가 눈치 없이 끼어들었어.”

“아닙니다, 의원님.”

“딸 아이가 원체 숫기가 없어서 말일세.”

“그렇습니까.”

“이 나이 먹도록 제 아비 품에서 떨어지려 안 해서 고민이라네, 자네가 이해해주게.”

“괜찮습니다.”

“…….”

대체 누가.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코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지만 은서는 아무 반응도 내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중훈의 앞에선 인형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이었다.

“아무래도 얼굴은 익혀둬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식사라도 하자고 불렀네.”

“네.”

남자는 서글서글한 태도로 중훈을 대하고 있었다.

은서는 어렵지 않게 이 자리의 목적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눈앞의 저 남자가 중훈이 고르고 고른 제 결혼 상대라는 뜻이었다.

‘하.’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찾아온 최악의 상황이었다.

적어도 대학 졸업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을 줄 알았는데…….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손톱이 허벅지 살을 파고드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온몸을 강타한 좌절감이 주는 고통에 비할 수 없었다.

제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중훈의 뜻대로 결정되는 미래.

중훈이 받았을 상처는 백번 천번 이해한다 해도, 은서는 수영의 배신이 왜 저를 향한 이런 비정상적인 집착으로 돌아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중훈에게 따지려 들면 되레 더한 고통으로 돌아올 뿐, 수긍할 만한 답은 없었다.

호흡이 자꾸만 뒤엉켰다.

무너지려는 표정을 가까스로 붙잡으며 은서는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부족한 게 많겠지만, 자네가 잘 이끌어주게.”

이 와중에도 은서를 배제한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은서는 이 자리에 앉은 제가 마치 무생물인 장식품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내 딸이라서가 아니라 똑똑하긴 해.”

“심지어 미인인걸요. 의원님과 많이 닮았습니다.”

“……그런가?”

순간 중훈의 턱이 꿈틀하는 것이 보였다.

‘……하하.’

은서는 차라리 정신을 놓아버리고 싶었다.

저도 모르게 입술 안쪽을 씹으려던 은서가 멈칫하고는 가까스로 턱의 힘을 풀었다.

입술을 씹지 말라던 정혁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기한은 다시 만나는 날까지야.”

다시 만나는 날…….

그와의 시간을 생각하니 조금씩 호흡이 제자리를 찾는 기분이었다.

은서가 고개를 들자 내내 중훈에게 향해 있던 남자의 시선이 얼핏 은서에게 와 닿았다.

싱긋 웃어 보이는 남자를 보며 은서는 정혁을 생각했다.

만약 제가 정말로 이 남자와 결혼하게 된다면, 정혁을 더이상 볼 수 없게 되는 거였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커다란 상실감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

“짜잔.”

“어머, 뭐야. 이현주잖아?”

“너 오랜만이다?”

음악 소리가 사방에서 쿵쿵 울려대는 클럽 안.

VIP석 가운데에 모여 있던 무리가 현주의 등장을 반겼다.

“뭐 하느라 이렇게 오랜만에 얼굴을 비춰?”

“나 전시회 때문에 바빴잖아!”

“아, 그랬지 참.”

“이제 끝내고 홀가분하게 좀 놀아 보려고! 아, 그리웠어, 이 공기.”

“참나. 이게 무슨 좋은 공기라고.”

“야, 그럴 만도 하지. 참새가 방앗간에 나타났는데.”

무리에 스며들듯 섞인 현주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다들 뭐 하고 살았어?”

제 앞에 놓인 잔을 집어 들며 현주가 빙글거렸다.

“나야 뭐 늘 똑같지. 시집갈 준비.”

“촌스럽긴. 요즘 결혼 장사하는 데가 어디 있다고.”

“참나. 그래서 오빠는 회사 생활 열심히 하고 있나 보지?”

“그럼. 나 김 대리잖아. 아주 근면성실하게 하고 있지.”

“지랄.”

왁자지껄한 대화 내용을 들으며 현주는 싱긋 웃었다.

서울 바닥에서 핫하다는 곳은 전부 꿰고 있는 그녀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어울리는 무리가 생기기 마련이었고, 그렇게 생긴 인맥의 풀은 놀라울 정도로 넓었다.

현우가 귀찮아하면서도 현주를 받아주는 이유 중 하나였다. 현주가 물어다 주는 정보도 쏠쏠했으니까.

어차피 유흥을 즐기는 VIP들끼리는 연결이 될 수밖에 없었다. 유명 정치인의 자녀들, 대기업 오너가 3세들, 연예인 등등. 다양한 인생 군상들이 술과 쾌락을 좇아서 모이는 곳이었다.

“야, 현주야. 얘 요즘 누구랑 만나는 줄 아냐?”

“왜왜? 누구랑 만나는데?”

“그 요즘 인기 있는 아이돌 있잖아. 얘네 회사 광고 찍은.”

“진짜? 걔 엄청 어리지 않아? 이제 스무 살 아냐? 가만있어 봐. 오빠랑 그럼 몇 살 차이 나는 거야?”

“야야, 나이 따지지 말자.”

한 달 만에 왔더니 재미있는 소식들이 늘어났다.

누구와 누구가 만난다더라, 누가 사고를 쳤다더라 등의 가십거리들.

“참, 제일 재미있는 소식이 있다.”

“뭔데?”

“민준 오빠 결혼할 거라는데?”

“……뭐?”

현주가 눈썹을 찡그렸다.

“최민준 말하는 거야? 그 오빠가 결혼을 한다고?”

“그래, 그 최민준. 최근에 주변 정리 싹 한 것 같던데?”

현주가 코웃음을 치며 조소했다.

“흥, 개가 똥을 끊지.”

“아냐, 진짜 이번엔 진지한 것 같던데?”

“참나. 어떤 여자인지는 몰라도 인생 말아먹게 생겼다. 최민준이라니, 운도 지지리 없지.”

현주가 혀를 끌끌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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