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28화 (28/82)

28.

“그냥 바로 가려고 했는데요.”

“어차피 가는 길이야.”

차에 오르며 미안한 기색을 내보이자 정혁이 무심하게 답했다.

약속대로 학교 앞 대신, 몇 정거장 떨어진 곳에서 정혁을 만났다.

혼자 가겠다는 데도 굳이 그는 저를 데리러 왔다. 그의 집이 하나같이 다 대중교통으로 가기 불편한 곳에 있다는 게 이유였다.

덕분에 편안해진 건 사실이니 은서는 군말없이 정혁을 따르기로 했다.

‘그때 그 집으로 가는가 보네.’

은서는 스쳐 지나가는 도로를 보며 목적지를 짐작했다.

항상 바뀌던 만남의 장소는 어느덧 한 곳으로 고정되어 가고 있었다.

어느새 그를 만난 지도 두 달이 지났다.

그 사이에 조용히 중간고사를 치렀고, 날씨는 제법 쌀쌀해졌다.

그와의 사이를 정의 내리기 어렵든 뭐든 그를 만나는 동안 은서가 얻은 건 분명했다.

마음의 안정.

이렇게 평온할 수가 없었다.

중훈이 해외 순방을 떠난 걸 고려하더라도 지나치게 평화롭긴 했다.

그리고 그게 정혁의 덕이라는 건 굳이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계속 이러면 좋겠다.’

은서는 노곤해진 눈을 두어 번 깜빡거렸다.

·

“이게 다 뭐에요?”

현관문을 열자마자 입구의 긴 복도 위로 쌓여 있는 물건들이 보였다.

지나갈 틈도 없이 다양한 크기의 종이가방과 상자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 양 비서가 다녀간 모양이군.”

은서와 찾는 공간에 다른 이를 들이는 게 싫어 입구에 놓고 가라 지시한 터였다.

“오늘 따로 할 일이 생겼네.”

“……네?”

“따라 와.”

정혁이 대충 긴 다리로 짐을 밀어내며 지나갈 공간을 만들었다.

그의 뒤를 따라가며 대충 훑으니 옷, 화장품 등의 브랜드 로고가 보였다.

‘거하게 쇼핑이라도 했나 보네.’

마치 백화점을 통째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새삼 그의 재력을 느끼던 은서는 곧 관심을 지웠다.

어차피 저와는 상관없는 그의 일면이었다.

“네가 보고 쓸만한 것들만 저쪽에 정리해서 넣어.”

은서가 하룻밤 묵었던 침실 문을 연 그가 턱 끝으로 침대 반대편을 가리켰다.

드레스룸과 욕실이 있는 곳이었다.

“네?”

“필요 없는 건 그냥 두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가버리는 그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붙었다.

“뭘 정리하라는 거예요?”

“…….”

“아야.”

갑자기 멈춰 선 그의 등에 부딪힌 은서가 제 코를 감싸 쥐었다.

은서의 턱 끝을 손가락으로 받쳐 올려 들여다본 정혁이 괜찮은 걸 확인하고는 무심하게 답했다.

“네가 쓸 거니까, 네가 보고 확인하라고.”

“…….”

은서는 정혁의 엄지가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마어마한 양의 종이가방과 상자들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제 거라고요?”

“그래.”

당황스럽기도 했고, 심장이 일렁이는 것 같기도 했다.

“…….”

할 말을 잃은 듯 입술만 움찔거리던 은서가 정혁을 올려다봤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정의할 수 없는 관계인 그에게서 무언가를 받는다는 게 불편했다.

“뭐가 그리 복잡해.”

정혁의 손가락이 은서의 이마를 꾹 눌렀다.

“매번 내 옷을 입고 갈 생각인가?”

“아.”

눈을 내리깐 은서가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러니까, 저 말은.

하정혁, 이 남자가, 자신을 안을 마음을 먹었다는 뜻이겠지?

설마, 지금 바로?

“……어, 음…….”

은서가 뭐라 물을까 고민하면서 어물거리자 속내를 알아챈 정혁이 픽 조소하며 손에 든 태블릿 PC를 들어 보였다.

“일단 오늘은 아니야.”

“누가 뭐라고 했나요.”

괜히 민망해진 은서가 입을 비죽이며 툴툴거렸다.

“도움 필요하면 말하고.”

한쪽 입꼬리만 비싯 올린 정혁이 은서를 지나쳐 갔다.

은서 혼자 정리하기에 많기는 했으나, 제가 옆에 붙어 있어 봐야 그녀가 편할 리 없었다.

양 비서에게 사다 놓으라고 시킨 건 저였어도, 물건을 확인하는 건 전적으로 은서의 사적인 영역이었다.

은서는 정혁이 소파로 가 다리를 꼬고 앉는 걸 지켜보다가 미적거리며 현관으로 향했다.

“……이걸 언제 다 정리하지.”

다시 봐도 놀라운 양이었다.

꽤 큰일이 될 것 같아 아찔해졌다.

힐끗 고개를 돌려 정혁을 보니 그는 벌써 업무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은서는 슬쩍 종이가방 하나를 열어 보았다.

네이비색 트렌치코트였다.

‘이런 것 까지는 필요 없는데.’

작게 한숨을 쉰 은서가 본격적으로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원피스부터 시작해서 여러 종류의 의류와 화장품, 욕실용품에다가 심지어는 속옷까지 있었다.

‘왜 같은 옷이 또…….’

의문이 들어 확인해보니 사이즈가 달랐다.

‘와.’

사이즈까지 맞춰 준비한 치밀함이 대단할 정도였다.

은서는 제게 꼭 필요할 것만 몇 가지 골라냈다.

이 전부를 다 갖기에는 부담스러웠다.

솔직히 제 것을 가져다 놓아도 상관없었지만, 경미의 눈을 피해서 하나씩 옮기기엔 한계가 있었으니 그의 호의를 받아들일 참이었다.

블라우스에 스커트, 바지와 니트류 한두 개에 세면도구 몇 가지만 집어 드니 막상 꺼낸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고른 것을 드레스룸에 채워 넣는데 그의 옷가지 몇 벌이 함께 걸려 있는 게 보였다.

생활은 여기서 하지 않아서인지 그리 많진 않았다.

그와 같은 드레스룸에 제 것을 놓자니 기분이 묘해졌다.

‘그런데, 이건 누가 샀을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가 돌아다니며 제 옷을 고르는 건 당연히 상상되지 않았다.

“……끝났나?”

그의 곁에 다가가 서성이니 고개를 든 그가 물어왔다.

“대충요.”

물끄러미 은서를 보던 그가 태블릿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손도 안 댔잖아.”

몇 개 풀지도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는 짐들을 본 정혁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은서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이렇게 많이까지는 필요 없어요.”

“사람의 성의를 무시하면 안 되지.”

“……직접 샀어요?”

“그럴 리가.”

“…….”

“왜? 서운해?”

“아뇨. ……누가 샀는데요?”

“유능한 비서가 있지.”

지나가듯 묻자 태평한 대답이 돌아왔다.

“……여자예요?”

“…….”

“아니, 그냥.”

“왜. 신경 쓰여?”

결국 참지 못하고 묻자 그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아뇨.”

“그래, 뭐.”

정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마음에는 들고?”

“……고마워요.”

“그게 끝인가?”

“……감동이라도 받아야 할까요?”

“울기까지 하면 더 좋고.”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은서는 그의 노골적인 발언을 못 들은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

“피곤하구먼.”

중훈이 넥타이를 끌어 내리며 인상을 팍 썼다.

많은 언론이 주목하고 있다 보니 일정 내내 빡빡하기 그지없었다.

“의원님.”

보좌관이 물컵과 함께 피로회복제를 건넸다.

군말 없이 받은 중훈이 꿀꺽 한 번에 삼키고 입가를 훔쳤다.

“참, 그 친구 좀 알아봤나?”

“네. 깔끔합니다.”

“그래?”

중훈이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최 목사가 상당히 엄격하게 관리한 것 같습니다. 교우 관계도 나무랄 데 없고, 흠잡을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군.”

“다만 마음에 좀 걸리는 부분이 있다면…….”

“뭐야.”

순식간에 서늘해진 중훈의 눈꼬리가 사납게 올라섰다.

“만났던 여자들이 좀 있습니다.”

사소한 문제일 수 있겠지만, 이들에겐 중요한 이슈였다.

중훈의 정치 생활이 어디까지 확장될지 모르는 때에, 가족으로 들이는 걸 염두에 둔 사람이니 걸릴 만한 것이 없어야 했다.

그저 사윗감을 고르는 게 아니다.

순규와 연결해 줄 중요한 끈이 될 존재이고, 아울러 순규의 뒤에 있는 사람들과 연결해 줄 매개체였다.

“잡음이 흘러나오지 않게 신경 쓴 것 같았습니다. 지금은 전부 정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보좌관이 빠르게 덧붙였다.

“그래, 나이도 있고 멀쩡한 사내 녀석이 만나던 여자가 몇 있는 것 정도야.”

중훈이 그제야 안심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인물도 훤칠하고, 여자 한둘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그 정도 흠은 있어야 우리도 큰소리치기 좋고.”

계집질 정도야, 순규와의 연결고리를 생각한다면 충분히 이해해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은서 양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요.”

“…….”

중훈의 표정이 더없이 서늘해졌다.

“죄송합니다.”

빠르게 제 실언을 인정한 보좌관이 허리를 숙였다.

“……자네.”

“네, 의원님.”

“자네는 내가 이해가 안 되겠지.”

“…….”

중훈도 제 모순을 알았다.

은서를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은서가 누구와 연관되는 것도 싫어 가두고 통제하면서도 은서의 결혼을 서두르고 있으니.

“자네 그거 아나.”

“…….”

중훈이 혼잣말을 하듯 말을 이어갔다.

“차라리 내 손과 눈이 닿는 곳에 있는 게 나은 법이지.”

하나뿐인 딸이었다.

무슨 짓을 해도 빼앗기지 않을.

*

“……네.”

-갑자기 전화를 드려 놀라셨지요, 은서 양.

“……무슨 일이시죠?”

수업을 듣다 말고 나온 은서는 손이 뻣뻣하게 굳는 걸 느꼈다.

전화를 걸어 온 이는 중훈의 보좌관이었다.

-오늘 오전 수업뿐이시죠?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제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쥐고 있다는 사실에 또 숨이 턱 막혀 왔다.

“……네, 그런데요.”

-의원님께서 함께 점심 식사를 하자고 하십니다.

돌아오는 날이 오늘이었나 보다.

“…….”

중훈이 밖에서 만나자고 하는 건 처음이라 은서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가족……이 다 같이 보는 건가요?”

-아닙니다, 의원님께서 두 분이 뵙길 원하십니다.

경미를 돌려 묻자 곧바로 부정이 돌아왔다.

거절하고 싶었으나, 그럴 명분이 없었다. 그럴 자격도 없었고.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그냥 은서 양과 오랜만에 식사를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럴 리가.

은서는 보좌관의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어차피 물어봐야 소용도 없을 거였다.

“……알겠어요.”

-시간과 장소, 문자로 남겨 드리겠습니다.

“네…….”

통화를 마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문자가 울렸다.

문자를 노려보던 은서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오늘 그 사람 만나는 날인데…….’

어쩔 수 없이 약속을 취소해야 했다.

설레기까지 했던 기분이 바닥을 치다 못해 끝도 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미련 가득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은서는 힘없이 문자를 써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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