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찰나였지만 그런 걸 왜 묻냐는 듯 은서의 눈동자가 차가워졌다.
불편한 속내를 가리듯 은서의 눈이 곧 예쁘게 휘었다.
타인에게 표정을 숨기는 건 손쉬운 일이었다.
오로지 단 한 사람, 하정혁을 제외한다면.
“그건 왜?”
“어?”
되돌아오는 질문에 당혹스러워진 건 오히려 지석이었다.
왜냐니.
지석은 긍정이나 부정이 아닌, 짧은 단어 하나에 담긴 뜻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글쎄, 그냥……. 네가 요즘 좀 달라진 것 같아서?”
“내가?”
은서가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 조용히 웃었다.
“응. 사람이 변하는 이유야 연애 말고 뭐가 있겠어. 안 그래?”
농담하듯 말을 툭 던지며 동의를 구했다.
지석은 은서가 제게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평행선만 달릴 것 같았다.
‘그 남자 누구야?’
묻고 싶은 게 목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은서의 입에서 나올 답이 진심으로 두려웠다.
만약 확인 사살을 당한다면 쉬이 회복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은서야.”
몇 번이나 망설인 끝에 지석은 결국 입을 열었다.
“사실 말이야.”
뜸을 들이는 지석에 은서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를 빤히 봤다.
“나 지난번에, 네가 어떤 남자 차 타고 가는 거 봤어.”
“!”
은서는 서둘러 표정을 갈무리했다.
지석이 말하는 남자가 누구인지는 뻔했다.
하정혁 외에 다른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학교 근처에서, 검은색 세단.”
“……그래?”
“그래서, 그 남자가 혹시 네 남자친구일까 생각했어.”
“그랬어?”
지석의 눈동자가 끊임없이 은서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녀는 차분하기만 했다.
“그런데 미안해서 어쩌지?”
은서의 입가가 장난스레 휘었다.
“응?”
“아니야, 남자친구.”
“……아니라고?”
“응, 아니야.”
“아, 아니구나. 그렇구나…….”
단호하기까지 한 대답에 지석은 찝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럼 그 남자와는 왜 둘이 만났어?
정확히 무슨 사이인데?
더 묻지 못한 말은 일단 마음에 남겨 두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처럼 언제고 지켜볼 수만은 없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젠 움직여야 할지도.’
책상 아래, 무릎 위에 두었던 손등 위로 핏줄이 섰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기 전, 은서는 먼저 화장실에 들렀다.
마지막 칸으로 가 문을 걸어 잠그고 벗은 재킷과 가방을 걸어 둔 그녀는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톡톡 풀리는 단추에 어젯밤, 그가 제 블라우스를 벗기던 손길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읏.”
입술을 말아 문 은서가 고개를 내저으며 빠르게 옷을 벗어젖혔다.
정혁의 셔츠는 어느새 제 온기로 따스해져 있었다.
이유 모를 아쉬움과 함께 셔츠를 종이 가방에 넣고 둘둘 말아 가방 깊숙이에 넣고는 다시 제 블라우스를 걸쳤다.
아직 술 냄새가 희미하게 나는 것 같긴 했지만, 향수를 들이붓다시피 해서 그런지 괜찮게 느껴졌다.
집에 가서 경미와 인사를 나누는, 그 잠깐만 피하면 될 일이었지만 정혁의 셔츠를 입고 들어갈 순 없었다.
“흠.”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나온 은서가 거울 앞에 서서 마지막 점검을 했다.
“남자친구일까 생각했어.”
“……남자친구라.”
지석의 질문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다지 흔들리지 않고 무사히 넘겼다.
사실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라 거리낄 것이 없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낄 일도 아니었고.
그는 제 남자친구도 아니었고, 썸을 타는 사이도 아니었다.
‘그럼 우린 무슨 사이이려나?’
잠시 생각하던 은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 사이가 아니긴 해도, 그래도…… 안기고 싶은 남자.
굳이 정의하자면, 그 정도일까 싶었다.
‘회사는 잘 갔을까.’
자연스레 그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본의 아니게 저 때문에 많은 시간을 빼앗겼을 그였다.
휴대폰을 꺼내 만지작거리던 은서는 결심한 듯 입으로 바람을 후 불고는 톡톡 화면을 두들겼다.
어쨌든 당분간 학교 근처에서 보는 건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몇 번 만나는 와중에 벌써 지석에게 들켜 버리기까지 했으니까. 그나마 입이 무거운 지석의 눈에 띄어 다행이었다.
문자를 보내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진동이 울렸다.
[왜.]
무언가 불만족스러운 듯 퉁명스러운 대답이었다.
정혁 특유의 서늘한 얼굴이 선명히 그려졌다.
풋 웃음을 터트린 은서가 휴대폰을 그대로 집어넣었다.
‘조금 보고 싶은 것도 같고.’
그의 향기가 아직 코끝에 걸려있는 것 같았다.
*[하정혁 씨, 다음부터는 학교로 오지 않는 게 좋겠어요.]
뜻 모를 문자에 이유를 물었지만 은서는 묵묵부답이었다.
“이건 또 무슨.”
눈에 뻔히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그녀는 종종 이렇게 제 상식을 벗어났다.
“하여간.”
픽 웃어버린 정혁이 전화를 걸었다.
-네.
받지 않고 버틸 줄 알았던 그녀는 의외로 순순히 전화를 받았다.
-안 바빠요?
“바빠.”
-그런데 왜 전화했어요?
“네가 궁금하게 만들었으니까.”
-아.
“아?”
정혁이 어이없다는 듯 은서의 짧은 탄식을 따라 했다.
-그냥 안전하게 만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래요.
“……무슨 일 있었나?”
정혁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그러자 휴대폰 너머에서 큰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내가 뭐랬어요. 하정혁 씨 너무 눈에 띈다고 했잖아요.
“하?”
갑자기 제 탓을 해오는 은서에 정혁이 어이없다는 듯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우리가 하는 건 게임이라고, 하정혁 씨가 그랬잖아요.
“그런데.”
-난 아직 엔딩을 보고 싶지 않아요.
“…….”
-어쨌든 현주도 그렇고, 누군가에게 알려지면 곤란하지 않나요? 우리.
정혁의 침묵을 동의라고 생각했는지 은서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조심한다고 했는데도, 학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아서요. 이제 그냥 다른 데서 만나요. 학교로 오지 말아요.
“……분부대로 하지.”
의자 깊숙이 몸을 묻은 정혁이 피곤한 듯 미간을 꾹꾹 눌렀다.
-음, 하정혁 씨?
“말해.”
-있잖아요. 한 번씩, 연락해도 되는 거죠?
“……허락이 필요한 건가?”
-아마도요.
“계속해서 말했잖아.”
정혁이 쿡 웃음을 터트렸다.
“연락, 기다리겠다고.”
-음, 네. 저, 그리고요…….
“…….”
-저기…… 어젠, 도중에 잠들어서 미안했어요.
크흠, 헛기침한 은서가 “그럼 또 봐요.” 인사를 남기곤 전화를 끊어버렸다.
후회하지 않는다는 건 진심이었나 보다.
도망칠 줄 알았던 그녀는, 오히려 한 발짝 더 가까이 제게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학교로 오지 말라는 말에 못내 불쾌해졌던 기분이 금방 고요해졌다.
깨질 듯한 유리를 다루는 대신, 거칠게 함부로 대했더니 더 다가오는 그녀다.
“이러면 맞춰줄 수 밖에 없는데.”
곤란한 듯 미간을 문지르던 정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표실을 나섰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탁구공 같다는 건 확실히 알았으니 준비를 해 둘 필요가 있었다.
술에 전 블라우스를 들려 보낸 게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매번 제 셔츠를 입혀 보낼 수도 없고.
“대표님,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바로 옆 비서실에 들어가니 앉아 있던 직원이 벌떡 일어나 물었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초조하게 빛을 냈다.
호출이 아니라 비서실까지 직접 그가 올 일이 뭐가 있을까 싶었다.
“…….”
정혁은 단정하게 양손을 모으고 꼿꼿하게 서 있는 여인을 슥 보며 은서를 떠올렸다.
은서가 조금 더 마르긴 했지만, 대략 비슷한 키와 체격이었다.
“사적인 부탁을 해야겠습니다.”
가장 입이 무거운 후배라며 도훈이 비서 일을 맡길 생각으로 데려온 사람이었다.
“말씀하십시오.”
정혁이 그녀의 책상으로 다가가자 긴장한 여인이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허리를 숙인 정혁이 책상 위의 메모지를 꺼내 휘갈기듯 적었다.
“주소랑 비밀번호입니다. 내일까지 이곳에 20대 중반의 여자가 입을 만한 옷이랑 해서 전부 채워 넣어 주세요.”
“옷…… 말씀이십니까?”
“네. 그 외에도 필요한 물품은 전부 넣어 주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제 상사의 지시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여인이 한 박자 느리게 답했다.
“예전 생각하면 일하기 더 편하긴 할 거야.”
출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도훈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알게 됐다.
비서 업무를 하면서 어디 가서 말도 못 할 온갖 지저분한 일을 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랬던 이전 상사들에 비하면 정혁은 아주 철저하게 선을 지키던 사람이었다.
그런 정혁이 처음 내린 지시가, 그것도 여자에 관련된 것이라니. 그의 밑에서 일한 건 이제 3년이었지만 믿기지 않았다.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대표님?”
“?”
“여성분 사이즈를 혹시 아실까요.”
대략적인 여체가 그려졌으나, 비서에게 말로 표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양 비서님하고 비슷할 것 같네요. 혹시 모르니 아래위로 한 사이즈씩 같이 준비해 주세요.”
눈치를 보던 비서가 덤덤한 대답에 안도한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런 상대가 아닌 건가?’
“네, 알겠습니다.”
그가 직접 찾아와 내린 지시였다.
그 얘기인즉슨, 도훈도 모르는 사적인 영역이라는 뜻일 터.
도훈에게도 물을 수 없으니, 그녀는 프로답게 호기심을 누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런 사람도 연애를 하긴 하는 걸까.’
하지만, 도대체 저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상사가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여자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하긴 했다.
어쩐지 일 중독자인 정혁이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그럼 부탁하죠.”
여전히 철갑을 두른 표정으로 정혁이 비서실을 떠났다.
‘별걸 다 하게 만드는 군, 차은서.’
하지만 정혁이 속으로 헛웃음을 흘리고 있다는 건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