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26화 (26/82)

26.

“…….”

잠에서 깬 은서가 가벼운 눈꺼풀을 몇 번 깜빡였다.

전날 술 먹다 잠이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개운하다 못해 상쾌한 느낌이었다.

모처럼 꿈도 꾸지 않고 깊은 잠을 잔 탓이었다.

가뿐한 몸을 느끼던 은서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정신이 들자마자 어젯밤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은서의 눈동자가 곧 경악으로 물들었다.

‘미쳤어!’

먼저 유혹해 놓고 기절하다시피 해버리다니!

미쳤다 싶을 만큼 과감하게 달려들었는데…….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은서가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없나?’

귀를 쫑긋 세우고 주변 기척을 살폈다.

“하아.”

고요한 정적에 절로 한숨이 터졌다.

어젯밤과는 달리 인기척이 없는 게 되레 안심됐다.

솔직히 정혁을 어떤 얼굴로 마주해야 할지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그가 제게 했던 모든 것들이 선명했다. 그에 제가 어떻게 반응했는지까지도.

창피하고 민망해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아, 몰라.”

이불을 뒤집어쓴 은서가 하릴없이 입술만 깨물 때였다.

“깼으면 그만 나오지.”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헉.’

은서는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숨을 삼키고 아직 자는 척을 시도하는데,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아…… 망했어.’

쥐구멍이 있다면 사라지고 싶었다.

그 정도로 고작 정신을 놓아버린 저를, 그가 얼마나 우습게 여길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그래, 그러고 계속 버텨보든가.”

“…….”

“덕분에 출근 안 해도 되겠어.”

“……알았어요, 일어날게요.”

그에게 더이상 민폐를 끼칠 수 없어진 은서가 잠자코 몸을 일으켰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사과해야 하나?

아니, 뭐라고 사과할 건데?

도중에 잠들어서 미안하다고?

내가 너무 피곤했나 보다고?

아니면, 긴장을 너무 한 나머지 기절했다고?

어떤 말을 해도 벌어진 일이 없던 게 되는 건 아니었다.

침묵을 선택하기로 한 은서가 침대를 벗어나 내려섰을 때였다.

뭔가 허전한 느낌에 제 몸을 내려다본 은서는 또 한 번 당황하고 말았다.

“!”

속옷 차림인 것도 모자라 걸친 거라곤 커다란 셔츠 한 장뿐이었다.

심지어 위의 속옷은 어디로 갔는지 휑했다.

“제 옷은요?”

은서의 질문에 정혁이 턱 끝으로 소파 쪽을 가리켰다.

“시간이 없어서 말리기만 했어. 술 냄새는 날 거야.”

“아.”

“아쉬운 대로 그거라도 입어.”

무심한 얼굴로 정혁이 침대 위에 던져둔 제 셔츠를 가리켰다.

흰 셔츠를 보자 기시감이 들었다.

도대체 그의 셔츠만 몇 벌째 입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입고 나와.”

“……네.”

“밥 먹고 데려다줄 테니까.”

“그럴 필요는……”

“나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일갈한 그가 문을 닫고 나갔다.

“…….”

닫힌 문을 바라보는 은서의 눈동자가 묘해졌다.

그에게서 어쩐지 찬 바람이 부는 것도 같았다.

“화났나?”

왜? 무엇 때문에?

괜히 신경이 쓰였다.

*“아, 미친. 시험 다시 봐야 하잖아.”

경영대 PC 실 안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왜 그래?”

무시하려던 지석이 눈만 굴려 대꾸했다.

“토익!! 아오, 짜증나. 880 나왔어. 20점만 더 나오지.”

“……힘내라.”

머리를 벅벅 긁으며 거친 욕설을 뱉는 친구의 어깨를 지석이 툭툭 두들겼다.

“아오, 이제 원서 넣어야 하는데.”

“어차피 인턴 공고 넣을 거잖아? 일단 지원해 봐. 허들이 좀 낮지 않겠어?”

마지막 학기인 지석과는 달리 졸업까지 아직 1년이 남은 친구였다.

“휴, 너는 이런 걱정도 없지? 부럽다, 진심.”

친구 녀석이 존경심 섞인 눈으로 지석을 우러러봤다.

군대 갔을 때를 빼고는 휴학도 없이 달려왔음에도, 지석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스펙을 자랑하는 괴물 같은 녀석이었다.

“왜, 뭐가 필요한데?”

슬슬 띄워주려 시동을 거는 눈치에 지석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역시 센스가 좋아. 야, 나 자소서 한 번만 봐주면 안 돼?”

“맨입으론 안 되지.”

“아, 좀. 나 얼마 전에 300일이어서 지금 개털이란 말이야.”

“아하, 토익 점수가 안 나온 이유가 있었네? 이 와중에 연애도 하시겠다?”

“이 새끼가. 내가 너랑 같냐? 너는 가만히 있어도 여자들이 줄줄 따르지만 난 죽어라 노력해야 그나마 만남이 가능하다고.”

“뭐라는 거야.”

“아, 그냥 좀 봐 주라, 응? 담달에 용돈 받으면 크게 쏠게!”

도끼 눈을 뜬 녀석이 갑자기 아양 떨듯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토할 것 같으니까 그만해라?”

지석이 입을 틀어막으며 정색했다.

“……알았어. 취업은 금융 쪽 생각한댔나? 목표로 하는 데가 어딘데?”

“크으, 역시 인성이 훌륭하십니다. 나나나 증권이나, 투자 회사 쪽으로. 가장 가고 싶은데는 J인베스트먼트야.”

“J인베스트먼트라…….”

지석이 포털 사이트에 회사 이름을 입력했다.

회사의 정보를 알아야 그나마 도움이 될만한 조언을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심하게 검색 결과를 훑던 지석의 눈동자가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이미지 검색 결과에서 어딘가 낯익은 얼굴을 본 탓이었다.

지석의 손가락이 빠르게 사진을 눌렀다.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분명 은서가 만났던 그 남자였다.

지석은 손가락을 놀려 여러 사진을 확인했다.

많지는 않았지만, 지석은 몇 장의 사진만으로도 남자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대표라고?’

지석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심지어 상당히 큰 규모의 회사였다.

그런 회사의 대표가 은서와는 무슨 일로?

중훈과 연관된 사람인가 짐작하려던 지석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묘한 공기의 흐름은 못내 찝찝하게 느껴질 정도로 진득해 보였다.

서로에게 오가는 시선을 본 순간, 그 둘이 결코 공적인 관계는 아닐 거란 불행한 느낌이 왔다.

불안해진 지석이 벌떡 일어나 가방을 챙겼다.

“어, 어? 왜 이래?”

“미안. 나 급한 일이 생각났어.”

“뭐?”

“자소서 메일로 보내 놔. 보고 이야기해 줄게.”

황당해하는 친구를 뒤로하고 지석은 걸음을 서둘렀다.

다음 수업은 유일하게 은서와 함께 듣는 교양 과목이었다.

수업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빨리 은서를 보고 싶었다.

그리고 지석은, 그녀가 여전히 제가 아는 차은서였으면 했다.

*‘음.’

차창에 비치는 정혁을 힐끗거리며 은서는 고민에 빠졌다.

차라리 아예 그와 자버렸으면 나았을까?

이도 저도 아니게 애매하게 끝나버리니 오히려 더 뻘쭘한 기분이었다.

정혁이 다정하게 대해줄 땐 그거대로 불편하더니, 그가 조용하니 그것 또한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다른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 좋긴 하지만.’

하여튼 이래저래 온 신경을 제게 집중시키는 남자였다.

그 사실이 웃겨서 입술 사이로 픽 바람이 샜다.

“……쓸데없는 생각하는 소리가 다 들려.”

옆에서 한숨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긴.”

은서가 슬쩍 몸을 바로 하며 정혁의 옆얼굴을 살폈다.

“……실망했어요?”

결국 고민만 하던 질문을 슬쩍 던졌다.

“뭘?”

“어제, 중간에 멈춰서…….”

“왜, 그래 보여?”

“아니, 그렇다기보단…….”

“자존심은 상하네.”

“……네?”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종류의 말이었다.

“내가 차은서 유혹에 그리 쉽게 넘어갈 줄은 몰랐는데.”

은서의 미간이 좁아졌다.

하여간, 끝까지.

“네에. 생각보다 쉽게 넘어오시더라고요.”

퉁퉁 부은 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때?”

“뭐가요.”

“후회해?”

“……뭘요?”

“후회하냐고, 유혹한 거.”

“…….”

정혁의 의중을 살피려는 듯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던 은서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아뇨. 전혀요.”

자동차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정혁의 시선이 은서의 것과 맞부딪쳤다.

“다음을 기대하게 하는 말이네.”

“네, 그땐 술은 절대 안 마시려고요.”

“…….”

“또 봬요.”

최대한 예쁘게 웃어 보인 은서가 조수석 문을 열었다.

그녀는 힘들게 찾은 도피처를 놓을 생각이 결코 없었다.

*은서가 강의실로 들어섰다.

“여기!”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지석이 곧장 손을 흔들었다.

은서가 언제 나타날지 몰라 한시도 입구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참이었다.

지석이 반가움을 숨기지 않고 웃었다.

저와 눈이 마주치자 은서의 무표정하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는 게 참 좋았다.

‘응?’

망설임 없이 제 곁으로 다가오는 은서를 설레하며 기다리던 지석은 문득 그녀의 옷차림이 낯설다고 생각했다.

품이 큰 재킷을 입고 있긴 하지만, 그녀의 가녀린 목을 감싼 셔츠 깃이 유독 커 보인 탓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은서가 지석의 옆자리에 조용히 자리했다.

“먼저 와 있었네?”

“어, 응.”

은서의 셔츠 깃을 따라 시선을 내린 지석의 눈이 이내 가늘어졌다.

작고 동그란 단추에 음각으로 선명하게 새겨진 브랜드 마크가 눈에 들어왔다.

지석도 잘 알고 있는 유명 남성복이었다.

심지어, 아무나 쉽게 살 수 없는 고가의.

‘설마.’

은서를 보고 저도 모르게 헤실거리며 풀어졌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집에서 바로 왔어?”

참지 못한 질문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어?”

은서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다시 말해달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긴 머리가 차르르 쏟아지며 향기가 훅 풍겼다.

항상 그녀에게서 나던 향기가 아니었다.

조금은 낯선, 남자의 묵직한 우디향이 섞여 있었다.

은서에게 답을 들을 필요가 없을 만큼 확실한 증거였다.

하지만 지석은 목을 가다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집에서 바로 왔어?”

“……응. 왜?”

친절한 미소 속에 무감한 그녀가 있었다.

제게 선을 긋는, 거리를 두는 차은서가.

바로 곁에 있는 그녀였지만 마음의 거리는 까마득히 멀었다. 아득할 정도로, 아주 멀리.

“은서야.”

“응?”

머릿속으로는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지석은 멈출 수가 없었다.

“요즘, 만나는 사람 있어?”

기어코 그는 제 손으로 직접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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