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시선을 먼저 피한 건 은서였다.
막연하게 입을 먼저 맞출 거라 생각했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내밀한 곳을 그의 눈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 시작일 줄은 몰랐다.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아…….”
민망해진 은서가 팔을 들어 드러난 속살을 가려보려 했지만, 애매하게 벗겨져 중간에 걸린 블라우스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가릴 필요 없어.”
정혁이 옴짝거리는 은서의 두 손목을 붙잡아 테이블 위에 고정했다.
그의 낮은 목소리는 거칠지 않았음에도 거역할 수 없는 명령처럼 들렸다.
정혁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불이 인 것처럼 뜨거웠다. 옷에 가려진 아랫배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 같았다.
가만히 은서를 보던 그가 입술을 내린 건 찰나의 순간이었다.
“흐읏.”
그가 곤두선 예민한 곳을 입술로 부드럽게 물어온 탓에 은서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한껏 머금어 빨아들이는 그의 머리 위로 긴 머리칼이 쏟아져 내렸다.
그의 어깨든, 머리든. 어디든 붙잡고 싶었지만, 그에게 양손이 잡힌 탓에 움직일 수도 없었다. 손을 움직거릴수록 손목을 쥔 그의 힘은 더욱 강해졌고, 정점을 자극하는 움직임은 난잡해졌다.
그저 하릴없이 테이블 위에 닿은 손바닥만 옹그린 채, 몸을 울리는 낯설고 강렬한 감각을 강제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흣, 하아.”
목을 조여오는 긴장감에 숨을 쉴 수가 없어 자꾸만 호흡이 가빠졌다.
유혹에도 밀어내던 것이 무색할 만큼 그는 거침없었다.
제가 이런 감각에 면역이 없을 거라는 걸 잘 알면서도, 그는 무자비하게 저를 함락해 오고 있었다.
톡톡 건드리다가 부드럽게 핥는 일련의 행위들이 적나라하게 느껴져 자꾸만 몸이 뒤틀렸다.
“아……!”
잘근거리던 그가 힘을 주어 깨무는 순간, 은서의 허리가 바짝 섰다.
불쾌하지 않은 고통과 쾌락,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감각이 몸을 관통했다.
입술을 꽉 깨물어 연신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막았지만, 몸의 반응은 숨길 수 없었다.
머리끝이 쭈뼛 서는 느낌에 발끝을 오므린 은서가 다리를 그러모았다. 하지만 정혁의 몸에 가로막힌 탓에 그녀의 다리가 되레 정혁의 몸을 끌어안은 꼴이 되고 말았다.
적나라할 정도로 솔직한 반응에 정혁의 움직임은 점점 과감해졌다.
장난치듯 혀를 놀리며 그는 한 손으로 은서의 허리를 받쳤다.
정혁이 놓아준 탓에 그제야 자유를 찾은 손목은, 지탱하던 힘이 사라지면서 맥없이 무너졌다.
정혁의 다른 손이 제 몸에 붙어 있던 은서의 다리를 감싸 쥐며 천천히 위를 향해 미끄러졌다.
느릿한 동작에 간지러워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은서의 손이 매달릴 곳을 찾아 정혁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의 손은 어느새 스커트 밑을 파고들고 있었다.
천천히 움직이는 그의 손길이 사람을 더욱 미치게 했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 걸쳐진 스커트 자락이 함께 말려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공기 중에 드러난 피부가 선득했지만, 그의 손이 감싸 쥔 곳만큼은 뜨거웠다.
감각이 가슴으로 몰렸다가, 그의 손이 닿아있는 다리로 오가길 반복했다.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자꾸만 숨이 차올랐다.
비명을 참느라 입술을 앙다물고 버틴 탓에 호흡이 엉망으로 엉켰다. 긴장으로 수축된 몸이 저릿저릿했다.
마지막에 과하게 들이킨 술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처음 겪는 쾌락이 너무 진해서인 걸까.
이대로 정신을 놓아버릴 것만 같았다.
은근히 다가오던 그의 손가락이 가장 은밀한 곳에 닿는 순간, 은서는 참지 못하고 신음을 터트렸다.
“하아.”
그와 동시에 가슴 위에서 정혁의 뜨거운 숨이 뭉개졌다.
무리 없이 천 하나를 빗겨낸 그의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파고들었다.
“흡.”
정혁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끝이 뾰족하게 섰다.
박힐 것처럼 파고드는 손톱 때문에 날카로운 통증이 일자 미간을 구겼다 핀 정혁이 벌을 주듯 입술에 힘을 주어 물었다.
정혁이 주는 자극대로 반응하며 쾌감에 바르르 떠는 움직임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호흡이 한계에 다다른 은서는 이제 거의 헐떡이다시피 하고 있었다.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 만족감이 퍼져나갔다.
그를 유혹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은서에게 낯선 감각을 선사했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모든 걸 잊게 할 만큼 강렬한 경험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자극적이고, 통렬한.
“……하아.”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끝으로, 은서는 그만 의식을 놓아 버렸다.
*은서의 머리맡에 앉은 정혁은 물끄러미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기자 고운 얼굴이 달빛에 드러났다.
깊이 잠든 은서는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를 흘렸다.
“참나.”
평온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에 어쩐지 헛웃음이 나왔다.
“사람을 놀라게 해놓고는.”
정혁은 은서의 뽀얀 볼을 잡아당기려다 말았다.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던 몸이 순식간에 늘어져 제 몸 위로 쓰러지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덜컥했다.
귓가에 들리는 숨소리를 듣고서야 잠이 든 것뿐이라는 걸 알았다.
그때 느낀 건 아쉬움인지, 안도감인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씻길 수도 없어 겨우 술에 젖은 옷만 갈아입혔다.
침대에 눕힐 때까지도 은서는 깨지 않았다.
정혁은 그제야 끝까지 잠겨 있던 제 셔츠의 윗단추를 풀어낼 수 있었다.
“차은서.”
턱을 괸 정혁이 조용히 읊조렸다.
“이제 만족해?”
기분이 복잡했다.
은서가 처음인 걸 알면서도 일부러 배려하지 않았다.
도중에라도 두려움을 느끼고 그를 멈추게 했으면 싶었다.
빠르게 항복 선언을 하길 바랐지만, 고집스레 버티던 그녀는 결국 정신을 잃었다.
오히려 차은서를 만만하게 봤다는 사실만 다시 한번 깨닫고 말았다.
술을 더 먹인 것은 어쩌면 현명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뭐가 그리 복잡한데?”
정혁은 대답을 듣지 못할 질문을 건넸다.
하루 동안 다양한 표정을 내보인 그녀였다.
잔뜩 굳은 얼굴로 나타난 그녀는 포커 게임 때는 기분이 풀어진 듯 제법 집중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뜬금없이 술을 요구하고, 끝내는 제게 유혹의 손길을 뻗쳐 왔다.
끝과 끝을 오가던 그녀의 마지막은 흥분에 젖은 얼굴이었다.
붉어진 눈가로 입술을 잘근거리며 신음을 흘리던 모습이 정혁을 자극해댔다.
쾌락에 물들어 가던 표정은 꽤나 강렬해서, 쉬이 잊힐 것 같지 않았다.
‘……미쳤군.’
혼란스러운 정혁의 눈동자가 은서의 고운 이마와 콧날을 따라 움직이다 그녀의 입술 위에 멈췄다.
그녀가 계속해서 깨문 탓에 붉고 도톰한 입술이 살짝 부풀어 있었다.
머뭇거리던 정혁의 손가락이 은서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었다.
몇 번이나 삼키고 머금고 싶던 걸 참아내야만 했던 곳이었다.
“그거 아세요? 그게 제 첫 키스였던 거.”
술에 젖은 입술이 눈에 들어온 순간,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더불어 그날의 기억도.
키스가 아닌, 아주 찰나였던 입맞춤. 그 기억이 정혁의 이성을 붙잡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입술을 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죄책감 때문인지, 아니면 적어도 그녀에게 달콤한 첫 키스의 추억만큼은 남겨주고 싶었던 것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하.”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자 정혁은 은서의 입술 위를 맴돌던 손을 미련 없이 떼어냈다.
이제 와 다정한 척, 신사인 척하는 게 무슨 소용이라고.
입술만 욕심내지 않았을 뿐, 그는 더한 것을 가졌다.
그가 오늘 은서에게 한 모든 행위는 은서가 처음 겪는 것들 뿐이었을 테니까.
쾌락을 비롯해 그녀가 느꼈을 모든 감각도, 어쩌면 처음이었을 것이다.
“…….”
그녀가 바라는 걸 내주기로 했다지만…… 어쩐지 입이 썼다.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한 정혁은 은서를 남겨둔 채 몸을 일으켰다.
아직 남아있던 몸의 열기가 빠르게 식는 기분이었다.
*“흐음.”
아무도 없는 조용한 집 안을 천천히 서성이던 경미는 거실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봤다.
어느새 시간은 막 자정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오늘 친구네 집에서 자고 가도 될까요?”
저녁 즈음해서 걸려 온 전화였다.
은서는 허락을 구하는 것 같은 말투였지만 사실은 통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고 흔쾌히 허락했다. 당연히 중훈에게도 알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제가 이 집에 들어온 이래 은서의 외박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다못해 은서는 중훈이 정해 놓은 통금 시간을 어긴 적도 없었다.
아무리 중훈이 해외 순방을 가 있다곤 해도, 은서의 성격상 외박을 선택한다는 건 분명 큰 변화였다.
또 한편으로 생각한다면, 그만큼 저에 대한 신뢰가 쌓였다는 뜻이기도 할 터.
지금은 은서의 신뢰를 더 쌓는 게 우선이었다.
“후훗.”
경미의 입술이 만족스럽게 늘어졌다.
꽉 닫혀 있던 은서의 마음을 열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싶었다.
오히려 아내의 배신으로 상처가 컸던 중훈의 마음을 사는 것이 더 쉬웠을 정도였다.
그간의 인내와 노력이 드디어 빛을 발할 때가 된 것 같았다.
“걱정 마, 은서야. 난 좋은 엄마가 될 거야.”
그럼, 그렇고말고.
찻잔을 든 경미가 우아한 걸음으로 거실 창을 향해 다가갔다.
커다란 창문 너머로, 조경수 몇 그루를 제외하곤 오로지 잔디뿐인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배덕한 주인 때문에 미움을 받아 꽃들이 전부 뽑혀 나간 정원은 썰렁하니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올봄에는 꽃을 심어볼까.”
이 집에서 조금씩 수영의 흔적을 지우고, 제 흔적을 새겨 넣을 것이다.
그렇게 진짜 가족이 되어가는 거지.
머릿속으로 새로운 정원을 그려 보며 경미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나저나, 우리 은서한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찻잔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던 경미가 결심한 듯 종종걸음을 쳤다.
찻잔을 내려놓고 소파에 앉은 그녀는 곧장 휴대폰을 집어 들고 전화를 걸었다.
-응.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상대방은 기다렸다는 듯,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리지도 않아 전화를 받았다.
“잤니?”
-아니, 왜?
“왜긴 왜야. 은서 때문이지.”
경미가 익숙하게 말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