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혼탁해진 갈색 눈동자를 보던 정혁의 시선이 제 팔을 간절하게 붙든 은서의 손으로 향했다가 다시 은서의 얼굴로 올라왔다.
한동안 얌전하다 싶더니 이 아가씨가 또 왜 이러는 걸까.
그녀의 속내를 가늠하려는 정혁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집에 안 갈래요.”
손에 힘을 푼 은서가 정혁의 팔을 은근하게 감아왔다.
사르륵 문지르는 손길의 의도가 빤히 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돼요?”
“…….”
정혁의 침묵에서 그가 고민하는 게 느껴졌다.
당장 거절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용기가 샘솟았다.
은서가 조르듯 정혁에게 더 가까이 다가섰다.
“이게 무슨 뜻인지, 하정혁 씨는 알죠?”
“……하.”
노골적인 유혹에 정혁이 헛숨을 터트렸다.
“……싫어요?”
은서의 동그란 눈동자가 일렁였다.
정혁은 가여운 강아지처럼 구는 그녀를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안아주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달래듯 키스하고, 만져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게 정말 차은서에게 근본적인 도움이 될까?
그럴 리가.
더더욱이나 남자 경험이라곤 전혀 없는 게 빤히 보이는데.
“차은서.”
정혁이 제 팔을 쥐고 있던 은서의 손을 붙잡으며 낮게 읊조렸다.
정혁의 거절을 짐작한 은서는 정혁의 손을 뿌리치고 그의 가슴팍에 달려들었다.
양손으로 그의 허리를 꼭 감아쥐고, 그의 품에 힘껏 파고들었다.
“……정말 싫어요?”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 떨림을 숨기며 물었다.
“술이 덜 깼어?”
머리 위로 쏟아지는 목소리는 살짝 화가 난 것도 같았다.
“아니, 제정신인데.”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매달린 채로 은서가 웅얼거렸다.
고집스러운 태도에 손으로 얼굴을 덮은 정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만났을 때부터 그녀의 기분이 어딘가 어긋나 있다는 건 짐작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덤벼들 줄은 몰랐다.
“나랑 정말 자고 싶은 건 아닐 테고.”
정혁이 은서의 긴 머리칼을 손으로 말며 가볍게 잡아당기자 말간 얼굴이 드러났다.
“이러는 이유가 뭐야?”
“…….”
“말해, 들어줄 테니까.”
시선이 맞닿은 채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왜 내가 하정혁 씨랑 자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그럼, 자고 싶어서 이러는 거라고? 갑자기?”
정혁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리는 걸 보며 은서가 덩달아 픽 웃었다.
“내가 미친 애 같죠?”
“…….”
“맞아요, 나도 내가 미친 것 같아요.”
복잡해 보이는 정혁을 보며 은서는 되레 머릿속이 명료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냥 하정혁 씨랑 자고 싶어졌어요.”
“…….”
“날 안아줬으면 좋겠어.”
속삭이듯 목소리를 줄이며 은서가 정혁에게서 떨어졌다.
여전히 한 뼘의 거리를 둔 채, 은서는 정혁을 빤히 쳐다봤다.
“내가 어린 애 같아서 싫어요?”
“무슨 소리야.”
“마른 여자는 별로라면서, 그래서 살찌우려고 먹이는 거라면서.”
“…….”
정혁이 침음했다.
그냥 뭐든 먹이기 위해 농담처럼 짓궂게 던진 말이었을 뿐이었다.
“나, 그렇게 없진 않은데.”
무슨 소리인가 싶던 찰나, 은서가 양손으로 정혁의 손을 붙잡고 제게 끌어당겼다.
제 가슴팍 근처에서 멈춘 은서가 눈동자만 위로한 채 정혁을 올려다봤다.
“만져볼래요?”
“……!”
정혁이 손을 빼려 할 때, 은서가 그대로 끌어당겨 그의 손을 제 가슴 위에 얹었다.
“…….”
말캉한 감촉이 손바닥을 통해 고스란히 느껴졌다. 가슴 윗부분을 따라 이어지는 속옷의 선까지도.
은서가 정혁의 손가락을 움직여 제 속살을 한껏 움켜쥐게 했다.
“이런 유혹은, 별로예요?”
은서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자 조금 붉어진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성적인 욕망을 넘어서 어딘가 절박해 보이기까지 하는, 불안한 표정이.
언제까지고 미루는 건 더이상 불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정혁은 선택의 순간이 다가온 것을 직감했다.
이런 게 정말 네가 원하는 거라면.
정혁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거절하면.”
“…….”
“또 다른 남자를 찾겠다고 할 건가.”
“그러겠다고 하면, 안아줄 거예요?”
“……좋아, 내가 졌어.”
대답을 끝내기도 전, 정혁은 은서의 허리를 감아 제 몸에 밀착시켰다.
그녀의 귓가로 입술을 가져가는 동시에 붙잡혀 있던 손에 힘을 실었다.
“읏.”
부드러운 살이 뭉개질 만큼 꽉 움켜쥔 탓에 은서의 입술 사이로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넘어가 줄게, 네 유혹에.”
낮게 속삭이자 은서의 몸이 흠칫 떨리는 게 느껴졌다.
정혁은 은서의 귀 뒤에 입술을 묻으며 손을 미끄러뜨렸다.
허리를 타고 내려간 손이 숨겨져 있던 블라우스 자락을 끄집어냈다.
하늘거리는 천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손이 예민해진 피부 위를 부드럽게 스치자 은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정혁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정혁의 손을 놓치고 갈 곳을 잃었던 그녀의 두 손은 어느새 매달리듯 정혁의 셔츠를 움켜쥐고 있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그녀의 손길을 고스란히 느끼며 정혁은 은서의 한계를 가늠하듯 손을 더 깊숙이 넣었다.
“벌써 굳으면 곤란한데.”
“그런 거 아닌……, 아.”
등허리를 문지르는 손길에 은서의 몸이 앞으로 밀리며 정혁에게 안기듯 달라붙었다.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누가…… 뭐래요?”
떨리는 목소리로 반항하듯 뱉어내는 은서에 정혁이 쿡 웃으며 속옷 밑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장난치듯 고리가 있는 쪽에 손가락 하나를 건 정혁이 살 위를 느리게 문질렀다.
몇 번의 움직임만으로도 정복이 가능할 만큼 가녀린 몸이었다.
은서의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날 때쯤, 장난을 치던 손이 훅 빠져나갔다.
은서의 뒤로 손을 뻗은 정혁이 아직 치우지 않은 술병을 집어 들었다.
“필요해?”
정혁에게 밀려 바에 몸을 기댄 은서의 눈앞에 반쯤 남은 금색 액체가 출렁거렸다.
불과 몇 시간 전, 제가 마시던 거였다.
은서는 문득 정혁과 맞닿아 있는 부분을 의식했다.
허리 아래로 맞붙어 있는 그의 몸은 여전히 잠잠했다.
아무리 경험이 없다 한들, 지금 잔뜩 긴장한 저와 달리 그가 지극히 평온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주세요.”
잠시 갈등하던 은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잔잔하게 남은 술기운이 저를 여기까지 밀어주었고 남자를 움직이게 했다.
이 남자가 저를 진심으로 원하도록 만들려면, 조금 더 나아가야 했다.
이 선을 넘으려면 더한 용기가 필요했다.
은서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정혁은 말없이 잔을 채웠다.
“마셔.”
은서는 흘러넘칠 것처럼 가득 채워진 잔을 받아 들었다.
제가 취할 것을 걱정해 반의반도 채워주지 않던 사람이었다.
이렇게 밀어붙이면 그만둘 거라고 생각한 걸까.
어쩐지 정혁의 속내가 읽히는 것 같아 웃음이 났다.
쉽게 물러설 것 같았으면, 시작도 안 했을 거야.
은서는 고집스레 정혁을 보며 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꼴깍대며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타는 듯한 감각이 목 언저리에서 맴돌았지만, 은서는 멈추지 않았다.
알코올의 기운이 빠르게 번지며 머리가 핑글 도는 것도 같았다.
순간적으로 어지러움을 느낀 은서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놓쳐버린 크리스털 잔이 남은 액체를 쏟아내며 은서의 가슴 위로 굴러떨어졌다.
“……아.”
은서가 눈을 내리깔며 옅은 탄식을 뱉는 사이, 정혁이 받아든 컵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어린애라고?
정혁은 비소를 흘렸다.
두어 개의 단추가 풀어져 벌어진 앞섶 위로 흘러내린 액체가 옷을 적시고 그녀의 윤곽을 도드라지게 했다.
언뜻 비치는 살 위로 젖은 액체가 은은한 조명에 비쳐 반짝였다.
참으로 색스럽고, 선정적인 광경이었다.
누가 봐도 시선을 떼지 못했을.
“차은서.”
목을 긁는 것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지막 기회야.”
“…….”
“무를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그런 거…….”
도발적으로 눈을 치켜뜬 은서가 정혁을 보며 고요히 웃었다.
“필요 없어요.”
“……후회해도 소용없어.”
고개를 떨어뜨린 정혁이 그대로 은서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아…….”
생경한 감각에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뺄 뻔했다.
은서는 양손으로 바 테이블을 짚으며 버텼다.
도망가려는 본능을 알아챘는지 정혁의 단단한 팔이 허리를 그러안고, 다른 손으로 은서의 목 언저리를 붙잡았다.
정혁에게 잡혀 더이상 뒤로 물러날 수도 없게 된 은서가 그의 어깨 위로 두 손을 옮겼다.
턱 아래, 목덜미를 자근거리던 입술 사이에서 나온 뜨거운 무언가가 피부 위를 꾹 눌렀다.
“……!”
은서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모든 감각이 낯설었다.
제 몸을 붙잡고 있는 남자의 힘도, 뜨거운 온기도, 피부 위에 닿는 습한 숨결도, 전부 처음 느껴보는 것뿐이었다.
피부를 축축하게 적신 술을 닦아내듯 곳곳을 부드럽게 움직이던 그가 조금씩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간지러운 감각이 목덜미를 타고 흐르다 쇄골 아래로 향했다.
눈을 질끈 감은 은서는 그의 어깨가 덩달아 조금씩 낮아지고 있음을 느꼈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이 제 블라우스 위로 향하는 게 느껴졌다.
닿을 듯 말 듯 몸을 스치고 올라온 손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블라우스 단추를 건드렸다.
톡, 톡 몇 개의 단추가 더 풀리면서 벌어진 옷자락 사이로 서늘한 공기가 닿았다.
이미 젖어버린 탓에 닿은 공기가 더 차갑게 느껴졌다. 그 위로 뜨거운 것이 닿으며, 동시에 정혁의 손이 블라우스를 들추고 들어왔다.
장난질로 끝난 조금 전과 달리 그의 손은 망설임 없이 고리를 풀어냈다.
“아!”
가슴을 조이던 압박감이 사라지자 은서가 작게 탄식을 터트렸다.
낮게 웃음을 흘린 정혁이 은서를 안아 올려 바 테이블 위에 앉혔다.
술인지 뭔지 모를 액체에 젖은 그의 입술이 빛에 받아 반짝이는 걸 보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반쯤은 드러난 속살이 그의 눈높이에 있었다. 그가 조금만 숙이면 저 입술이 제 은밀한 곳에 닿을 것만 같았다.
눈만 올려 힐끗 은서를 본 정혁은 말없이 블라우스 단추를 두어 개 더 풀어내곤 흐물흐물해진 옷자락을 어깨에서부터 천천히 밀어젖혔다.
헐거워진 끈이 함께 내려가면서 가릴 것이 없어진 몸이 고스란히 그의 시야에 들어찼다.
“…….”
기묘한 침묵 속에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