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23화 (23/82)

23.

“음…….”

술잔 위를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은서는 침음했다.

스무 살 때 이후로 이렇게 술을 마셔 본 건 처음이었다.

주량도 모르고 홀짝거린 탓에 술기운이 혈관을 타고 빠르게 돌았다.

적당히 어지럽고 알딸딸한 기분이 낯설긴 했지만 나쁘진 않았다.

“이제 그만 마셔.”

“조금만 더요.”

잔을 뺏으려는 정혁의 손을 꽉 붙잡은 은서가 도리질했다.

손등에 닿은 부분이 후끈할 정도로 열기가 그득해 정혁은 저도 모르게 손끝을 움찔했다.

“…….”

정혁이 미간을 찡그렸다.

이렇게까지 만든 건 제 실수였다.

은서는 그 독한 술을 가득 채운 걸 연달아 석 잔이나 비워냈다. 곁들여 먹으라 내준 안주류에는 손도 대지 않은 그녀였다.

“집에 가야지.”

술기운이 오른 눈동자 위로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느리게 내려갔다 올라오길 반복했다.

답답한 듯 긴 머리를 쓸어 넘기자 드러난 앙증맞은 귀가 제법 붉어져 있었다.

“아직요, 시간 더 있잖아요.”

조르듯 투정하는 은서에 정혁이 졌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별다른 말도 없이 빠르게 취하길 선택한 걸 보면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더는 이런 무의미하고 가학적인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차은서.”

결국 인내심이 동이 나고만 정혁이 손가락으로 은서의 턱을 받쳐 들어 올렸다.

느른하게 내리뜬 눈이 점차 위로 향하다 정혁에게 닿았다.

“말해.”

정혁이 짧게 일갈했다.

“무슨 일이야.”

단호하고 묵직한 명령이었다.

술 때문에 조금은 흐릿해진 이성이 은서를 부추겼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비밀이지만, 이 남자에게는 말해도 되지 않을까?

우린 비밀리에 얽힌 사이니까, 앞으로도 깊게 연관되지 않을 사이니까.

그렇구나.

우리는 그런 사이인가.

괜히 심술이 나는 것도 같고.

가만히 정혁을 보던 은서가 양손으로 제 턱을 받친 정혁의 손을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붙잡았다.

“하정혁 씨.”

“…….”

“있잖아요.”

은서에게 순순히 손을 내맡긴 채 정혁은 은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막장 드라마 좋아해요?”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조금 의외의 것이었다.

“글쎄.”

“막장 드라마 있잖아요. 왜…… 행복한 가정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콩가루였던…… 그런 거요.”

은서가 생각에 잠긴 듯 느리게 말했다.

“좋은 아내였고 엄마였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오래된 연인이 있다면서 가족을 떠나 버리고…….”

“고1 때부터 어머니가 집을 나와 따로 살았던 걸로 보여.”

은서의 말 뒤로 도훈에게 전달받았던 내용이 겹치기 시작했다.

“떠났으면 잘 살기라도 하지, 갑자기 콱 죽어버리질 않나.”

“고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거랑…….”

“남겨진 사람들은 하루하루 지옥 속에 사는데. 자기 혼자, 속 편하게 떠나 버리면 그만인가.”

“기록이 불분명한 걸 보면 의도적으로 숨긴 것도 같고.”

쿡쿡 웃는 은서의 입술이 기묘하게 비틀렸다.

“거기다 지저분한 출생의 비밀까지, 막장도 그런 막장이 없어요.”

하하, 소리 내 웃는 그녀의 얼굴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정혁은 은서가 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대략적인 속사정이 짐작이 갔다.

지금 은서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까진 알 수 없더라도.

“……갑자기 졸립네.”

정혁은 조금씩 감기는 은서의 눈을 보며 잡혀 있던 제 손을 빼냈다.

“이상하다, 취하진 않았는데.”

은서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바를 넘어 은서의 옆으로 다가간 정혁은 막 쓰러지려던 은서의 몸을 받아냈다.

정혁은 망설임없이 은서를 안아 올렸다.

‘침실이 있어 다행이군.’

한 번도 사용해 본 적 없는 침대 위에 은서를 눕히며 정혁은 안심했다.

제게 딱히 필요하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인테리어 업자의 설득에 만들어 놓은 곳이었다.

은서의 어깨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 덮어준 정혁이 그녀의 머리맡에 앉았다.

“푹 자.”

정혁의 커다란 손이 은서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은서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좋은 꿈 꾸길.”

적어도 지금 만큼은.

은서의 고른 숨소리를 가만히 듣던 정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옆의 거실로 향했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답은 은서의 입에서 쉽게 흘러나왔다.

그래, 제 속에 담아두기엔 버거웠겠지.

어딘가 털어놓을 곳이 필요했을 테고, 은서의 주변인이 아닌, 누구와도 연관이 없는 제가 은서에겐 제격이었을지 모른다.

정혁은 곧장 전화를 걸었다.

-왜.

“오늘 회사 복귀 못 해.”

-……뭐냐?

음흉한 표정을 짓고 있을 도훈이 저절로 그려졌지만 정혁은 농담에 응해 줄 기분이 아니었다.

“차은서 모친에 대해서 좀 더 알아봐. 집을 떠난 이후 행적 위주로.”

-갑자기?

“차중훈 의원에 대해서 더 파보고.”

-알았어.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도훈은 엉뚱한 말을 더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정혁은 휴대폰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놓고 빙글빙글 돌리며 벽 하나 너머에 잠들어 있는 은서를 생각했다.

이렇게 몰래 뒤에서 조사하고 있는 걸 안다면 은서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졌다.

“그냥 호기심에 이러는 건 아니야, 차은서.”

은서의 입에서 전부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엔, 정혁의 인내심은 그리 길지 못했다.

*“으응.”

몸을 뒤척이던 은서가 눈을 번쩍 떴다.

눈을 몇 번 깜빡이니 낯선 풍경이 보였다.

은서는 제 몸을 덮고 있는 이불 위로 팔을 빼냈다.

‘침대?’

제가 누워 있는 공간을 인지한 은서가 꿈지럭거리며 몸을 옆으로 돌렸다.

포근한 이불 덕분인지 개운하다 싶을 만큼 깊은 잠을 잤다.

은서는 곧 눈을 질끈 감았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술기운을 핑계로 정혁에게 남 이야기하듯 제 비밀을 털어놓았으니까.

몇 년 동안 혼자 속으로만 품고 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으니 후련한 게 당연했다.

‘어떤 반응이었더라?’

정작 정혁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리며 은서는 다시 눈을 떴다.

‘몇 시지?’

더듬더듬 손을 움직였지만 휴대폰이 근처에 있을 리 만무했다.

‘언제 잠든 거야. 얼마나 잔 거고?’

눈을 요리조리 돌려봤지만, 정혁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설마, 간 건가?’

은서는 몸을 벌떡 일으켜 앉았다.

꺼진 불빛과 적막 속에는 어떠한 인기척도 느껴지질 않았다.

“정말?”

아무리 하정혁이라 해도 잠든 사람을 혼자 두고 가버렸을까 싶었다.

은서가 막 자리에서 일어나는 찰나, 멀리서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은서는 침대에서 후다닥 내려 소리가 난 쪽으로 걸었다.

“하정혁 씨?”

경계심을 세운 은서가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일어났군.”

어둠 속에 드러난 그의 실루엣과 목소리에 안도감이 들었다.

“가버린 줄 알았어요.”

은서가 침실 밖으로 나서며 투덜거렸다.

술기운이 아직 가시진 않았는지 걸음이 조금 비틀거렸다.

“그래서 무서웠나. 상당히 반기는데.”

놀리듯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따라가자 전면 창으로 들어오는 불빛에 얼룩진 정혁의 얼굴이 보였다.

선이 뚜렷한 얼굴이 더 입체적으로 느껴졌다. 웃음기 없는 얼굴에 드리워진 조명 때문에 마치 야수파 화가의 강렬한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넋을 잃고 그를 보는데 문득, 잠결에 느꼈던 그의 체취와 자신을 안아 옮기는 단단한 몸이 주던 기묘한 감각이 떠올랐다.

“잘됐네. 안 그래도 깨우려 했는데.”

“왜요?”

“내가 차은서의 해장 심부름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어.”

그제야 은서가 정혁의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종이가방 겉에 적힌 상표를 본 은서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삼켰다.

해장국이라니, 그와는 참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다정하시네요.”

“설마.”

그럴 리가 있겠냐는 듯 정혁이 조소했다.

“더이상 귀찮은 일은 사양하고 싶거든.”

만취한 사람을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기색이 역력한 말투였다.

그는 조금 짜증이 난 것도 같았다.

“먹고 그만 집에 가.”

차갑게 명령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는데 문득 서러워졌다.

시무룩하게 그의 뒤를 따라가는데 소파 위에 놓인 제 휴대폰이 보였다.

시간을 확인하려 무심코 폰을 집어 드니 새로운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오지 않을 생각이니? 계속 기다리고 있단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만나서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구나.]

선명하게 찍힌 부재중 표시와 수일의 문자는 불과 10분 전의 것이었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는 거야?’

은서는 어지러운 듯 눈을 감았다 떴다.

술기운이 올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수일의 연락에 불쾌함이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올라서였을까.

갑자기 진득한 두통이 일었다.

제 몸이 진창에 처박혀 있는 기분이었다.

“이리 와.”

정혁의 낮은 목소리가 순식간에 파고든 덕분에 은서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숨을 몰아쉬었다.

저를 보는 정혁을 보다가 은서는 낯선 열망을 느꼈다.

정혁의 곁에 있으면 잠시라도 다른 걸 잊을 수 있는 게 좋았다.

만약…… 그와 조금 더 가까이 있는다면, 그러면 더 나아질까?

이대로 그의 곁을 떠나면 또다시 괴로워질 것 같았다. 지금 제게는 조금 더 강렬한 자극이 필요한건지도 몰랐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문 은서가 빠르게 정혁에게 다가섰다.

은서는 한 뼘은 더 큰 정혁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왜 그러지?”

말간 눈동자가 탁해진 걸 본 정혁이 걱정을 숨기며 물었다.

은서는 손을 뻗어 정혁의 팔을 붙잡았다.

“…….”

정혁의 시선이 그녀의 움직임을 좇았다.

소매끝을 타고 올라와 팔뚝을 붙잡은 가녀린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생명줄이라도 움켜쥔 듯 절박함이 묻어 있는 그녀의 손길에 정혁은 복잡한 심정으로 은서를 내려다보았다.

“있잖아요.”

“…….”

은서의 도톰한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오늘 자고 가면 안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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