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22화 (22/82)

22.

“여기, 차은서 학생이 누구죠?”

정혁과의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서둘러 강의실을 나가려던 은서는 저를 찾는 낯선 여자에 동작을 멈췄다.

강의실 내부를 둘러보던 여자는 학생들의 시선이 쏠리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전데요.”

은서가 옅게 한숨을 쉬며 손을 들었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 학생이구나. 지금 윤수일 교수님 교수실로 가보세요.”

여자는 목적을 이룬 듯 카랑카랑하게 말을 전달하곤 곧장 자리를 떴다.

역시나.

저를 호출한 이를 확인한 은서의 얼굴이 와그작 일그러졌다.

연락을 계속해서 무시했더니, 결국 학교에서 불러내는 걸 선택한 모양이었다.

“와, 윤 교수님이 찾으신다고? 전시회 이야기하시려는 건가?”

몇몇 아이들이 부러운 듯 숙덕거렸다.

회화의 대가로 세계 각국에서 인정받은 그는 학생들의 롤모델 같은 존재였다.

그런 그가 은서의 재능을 아낀다는 건 암암리에 퍼진 비밀이었다.

하지만, 은서는 어두운 표정으로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건물 밖으로 나온 은서는 교수동이 아닌, 그 정반대를 향해 망설임 없이 걸었다.

교수의 호출을 무시하는 학생은 아마 세상에 저 하나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은서에게 중요치 않았다.

아무리 그가 저를 찾는다 한들, 제 발로 그를 찾아가는 일은 평생에 없을 거였다.

*“오늘은 또 왜 그리 화가 났을까.”

“……내가 화 난 것처럼 보여요?”

아무 말 없이 운전하던 그가 툭 던진 말에 은서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상당히.”

“하정혁 씨는, 내 표정이 보여요?”

운전석을 향해 몸을 아예 돌아앉은 은서가 신기해하며 정혁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보통 남들은 제 표정을 잘 읽지 못했다.

그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미소 외에는 거의 무표정일 때가 많았으니까.

민정이나 지석조차도 은서의 속내를 모를 때가 많은데, 희한하게도 정혁은 은서의 기분을 잘 알아채곤 했다.

어른이라서? 아니면, 회사 대표라 통찰력이 뛰어난 걸까?

은서는 새로운 생물을 보듯 정혁을 관찰했다.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추자 정혁이 은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흐음, 하고 작게 소리를 내곤 대답했다.

“빤히 보이는데.”

“…….”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순간 누군가 심장을 꽉 쥐는 것 같아 움찔한 은서는 다시 몸을 바로 했다.

“아닌데. 하정혁 씨가 착각하는 거예요.”

“……그럴까? 뭐, 확인 해 보면 알 일이지.”

정혁이 피식 웃으며 부드럽게 핸들을 돌렸다.

·“…….”

은서는 아무 표정 없는 정혁을 힐긋 눈으로 살폈다.

그의 속내를 읽어보려 애썼지만, 철갑을 두른 듯 조각 같은 얼굴엔 미동도 없었다.

속눈썹 한 올 흔들리는 법 없이 그는 내내 평온한 얼굴이었다.

‘후우.’

속으로 한숨을 삼키는 데 정혁과 눈이 마주쳤다.

정혁이 알듯 모를듯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배팅할 건가?”

“……할게요.”

“콜(call).”

“…….”

“그리고 레이즈(raise).”

“……!”

은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려다 서둘러 표정을 갈무리했다.

“다이(die)?”

“아뇨.”

최대한 덤덤한 척 평정심을 가장한 채 은서는 손에 쥐고 있던 카드를 비장하게 내려놓았다.

“풀 하우스에요.”

“아하.”

정혁이 테이블 위에 펼쳐진 카드들을 보며 제법이라는 듯 웃었다.

그의 반응에 은서는 저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에게서 오늘 처음 배운 포커였지만, 생각보다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몇 번의 연습 끝에 본격적인 내기 게임을 벌인 참이었다.

정혁이 아쉽게 됐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걸 본 은서는 제 승리를 확신했다.

초보자니 만만하게 보고 배팅에서 판돈을 올리기까지 한 정혁이었다.

물론 실제 돈이 오가는 건 아니었지만.

“……이걸 어쩌나.”

정혁이 손에 들고 있던 카드를 테이블에 탁 내려놓았다.

겹쳐진 카드의 맨 앞장은 숫자 4가 적힌 까만색 클로버 카드였다.

뾰족하게 솟은 정혁의 손가락이 카드 한가운데를 콕 짚었다.

이겼나? 내가 이긴 건가?

은서는 두근거리는 기분으로 카드들이 천천히 펼쳐지는 걸 지켜봤다.

“…….”

그리고 밑에 깔려 있던 카드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은서의 표정도 무너져갔다.

까만색 클로버 카드들이 눈에 들어왔다.

“스트레이트 플러쉬.”

“…….”

“내가 이겼네.”

“하아.”

허무해진 은서가 아쉬움이 잔뜩 담긴 숨을 터뜨렸다.

“거 봐. 표정이 다 보인다니까.”

“네, 어련하실까요.”

“어떻게 할까? 내기는 없었던 걸로 해줄까.”

정혁이 놀리듯 되묻자 은서가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됐거든요? 내기는 내기니까.”

“흐음. 그렇단 말이지.”

눈을 가늘게 뜬 정혁이 은서의 얼굴을 보며 입술을 늘였다.

“좋아. 결정했어.”

실제 판돈이 오가는 대신 이긴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 참이었다.

은서는 내심 정혁이 무엇을 말할지 궁금하기도 하고 긴장도 됐다.

혹 이상한 걸 시키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최근의 그는 제멋대로 저를 휘두르기로 작정한 사람 같았으니까.

“언젠가.”

은서는 그의 입술에 집중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가 네게 손을 내밀게 된다면.”

“…….”

“망설이지 말고 잡아.”

내기의 소원이라기엔 어딘가 아리송한 말이었다.

“명령이야.”

하지만, 은서는 나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그의 말에 토를 달기가 어려웠다.

정혁은 고분고분해진 은서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멈칫하곤 손을 자연스레 테이블로 내렸다.

“한 번 더?”

“아뇨, 어차피 또 질 것 같아서.”

은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카드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혁은 그새 차분해진 은서를 잠자코 지켜봤다.

몇 번의 만남을 거치며 은서는 제법 제게 마음을 연 모양이었다.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는 횟수도 늘었고, 전보다 더 솔직하게 말하거나 반응한다는 게 느껴졌다.

함부로 대하니 오히려 마음을 열어 오다니.

이런 모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싶었다.

정혁이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은서를 보내기까지는 여유가 좀 있었다.

“시간이 비는군.”

“……가야 해요?”

은서가 시무룩하게 물어왔다.

정혁과 시간을 보내면서 수일에 대한 걸 잊을 수 있었는데.

아직은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달리하고 싶은 거라도?”

당장 보내진 않을 것 같은 질문에 은서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부여잡았다.

“……술, 마시고 싶어요.”

“…….”

정혁의 미간이 조금 좁아졌다 제자리를 찾았다.

“안 되나요?”

“딱히 안 될 이유는 없지.”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수일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문을 멀거니 바라봤다.

일부러 과 조교를 시켜 은서를 불러들였지만, 몇 시간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직접 말했는데요, 아직 안 왔나요?”

과 조교는 은서에게 직접 전했다고 했으니, 이쯤이면 은서가 의도적으로 무시한 게 맞다고 봐야 했다.

“하아.”

씁쓸하게 한숨을 쉰 수일이 책상 위에 있던 다이어리를 펼쳤다.

맨 앞,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꽂아둔 사진을 꺼내자 환하게 웃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오랜 친구였고, 오랜 시간 사랑했던 여자.

“수영아.”

수일은 사진 속 환하게 웃는 여자를 엄지로 부드럽게 문질렀다.

교수직을 받아들인 것도 순전히 은서가 이 학교에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똑 닮은 딸을 지척에 뒀는데도 만날 수가 없었다.

“나 은서한테 미움받는 것 같은데.”

전공 필수 과목이 수일의 수업이면 그녀는 굳이 다른 교수를 선택해 들었다.

연락했다 하면 그 번호는 차단당하기 일쑤였고, 은서를 만나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웠다.

수일은 이 꼬인 실타래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니까 왜 그렇게 빨리 떠났어.”

사진을 보는 수일의 눈이 그리움에 젖었다.

*“와인? 아니면…….”

“독한 걸로 마실래요. 제일 독한 거, 무조건.”

진열장에서 술을 고르던 정혁이 고개만 뒤로 돌려 은서를 힐끗 바라봤다.

꽤 단호한 말투였다. 은서는 사뭇 전투적이기까지 한 눈빛으로 바 의자에 앉아 있었다.

걱정이 앞섰지만, 어차피 들어먹을 그녀가 아니었다.

제가 종종 즐겨 마시던 위스키병을 꺼내 내려놓은 정혁이 허리를 숙여 잔 두 개를 같이 꺼냈다.

정혁은 곧바로 냉장고 문을 열었다.

스트레이트로 마시게 할 수는 없으니 얼음이라도 넣어 온더록스라도 해 줄 생각이었다.

“와.”

“!”

하지만 성미 급한 차은서는 이미 술을 따라 그대로 입 안에 털어 넣은 후였다.

술이 독했는지 은서의 미간이 일그러져 있었다.

정혁이 어이없다는 듯 그 모습을 보다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지간히 급했나 보군.”

정혁이 서둘러 초콜릿 껍질을 까 한 알을 은서의 입에 넣어 주었다.

금색의 액체가 타고 흘러가는 곳이 불에 탄 듯 뜨거웠다.

별다른 반항 없이 받아먹은 은서가 혀를 굴려 초콜릿을 녹였다.

“그런 날 있잖아요. 술이 필요한 날.”

해외 순방을 나간 중훈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제겐 든든한 경미가 있으니 이런 일탈을 하기엔 제격인 날이었다.

무엇보다 수일의 연락을 받은 탓에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최악이었고.

“그럼 어디 마음 놓고 마셔 봐.”

정혁이 제대로 맞춰주겠다며 몇 가지의 안주류를 더 꺼내 주고 위스키도 종류별로 꺼내 놓았다.

취할 것 같을 때 멈추게 할 요량이었다.

“하정혁 씨는 안 마셔요?”

“데려다줘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같이 마셔주면 안 되나.”

“…….”

“일하러 가야 해요?”

은서가 정혁의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잔 두 개를 채웠다.

조그만 게 여우짓도 할 줄 알고.

하는 짓이 귀여웠다. 정혁은 웃음을 삼키며 은서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택시 타고 갈 테니까, 안 될까요?”

“유혹하는 솜씨가 꽤 좋은데.”

정혁이 은서가 제 쪽으로 슥 밀어놓은 잔을 집어 한 번에 들이켰다.

“그럼, 어디 차은서 주량이나 확인해 볼까.”

정혁이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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