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야, 그런데 말이야.”
문이 다시 열리고 도훈이 얼굴을 쑥 들이밀었다.
정혁은 또 왜 그러냐는 듯 짜증 섞인 시선을 툭 던졌을 뿐이었다.
축객령은 떨어지지 않은 탓에 도훈이 싱글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지.”
“……뭐가.”
“솔직히 말하면, 이 정도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아? 이렇게 바쁜 와중에 꼬박꼬박 시간 내가면서까지 할 건 아니지 않냐고.”
“…….”
“아니, 내 말을 좀 들어 봐.”
사나워지는 표정을 본 도훈이 금방 꼬리를 내렸다.
“솔직히 널 기억조차 못 한다며.”
어디 계속 떠들어보라는 듯 정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정작 그 아가씨는 널 기억도 못 하는데, 네가 이러는 게 의미가 있어?”
“그게 중요한가?”
“중요하지. 너 잊었나 본데, 네가 지금 앉아있는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몰라?”
도훈이 정혁의 명패를 툭툭 치며 일갈했다.
밑바닥까지 알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정보가 들어오는 곳.
다른 이들이라고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내 편이 되면 좋지만 적이 되면 곤란한 사람. 모두에게 정혁은 그런 존재였다.
지금이야 정혁이 웅크리고 있으니, 관심 밖의 대상으로 두는 것이지만.
“괜히 약점 만드는 거 아닌가 걱정돼서 그렇지.”
“쓸데없는 걱정이야.”
“……내가 보기엔, 너 그냥 고마운 마음으로 그러는 것 같진 않아서 그래.”
“그게 아니면?”
“끌리는 거야.”
“…….”
“내가 보기엔 너 지금, 그 아가씨한테 끌리고 있어.”
끌린다고.
내가, 차은서에게.
정혁이 재미있다는 듯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들겼다.
“아니라고 할 수 있어?”
“딱히 부정할 생각도 없는데.”
“뭐야, 인정하는 거야?”
이렇게 쉽게?
도훈이 오히려 놀란 듯 되물었다.
“연민을 느끼는 것도, 동질감을 느끼는 것도. 굳이 따지자면 끌림의 일종이겠지.”
“아니, 그런 거랑은 좀 다른…….”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정혁이 픽 웃으며 도훈의 말을 잘랐다.
“난 차은서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걸 내주기로 마음먹었으니까.”
“…….”
“그리고 내 역할은 거기까지야.”
차은서가 다시 웃음을 되찾게 되면 이 이상한 게임도 끝이 나겠지.
정혁이 씁쓸하게 웃었다.
·“늘 보던 거기에 있을게요, 그럼.”
-연락하지.
“네.”
통화를 끝낸 은서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떠올랐다.
습관처럼 그와의 통화 기록을 지운 은서는 휴대폰을 꼭 쥐고 창문으로 다가갔다.
집에서는 가급적 통화도 하지 않던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누가 들을까 소곤거리며 정혁과 통화를 하는 건 나름의 스릴이 있었다.
창문을 열자 아직 초록빛이 남은 정원과 담 너머 보이는 동네의 전경이 들어왔다.
밤바람이 시원한 게 기분이 좋았다.
“얼마 만이더라.”
눈을 지그시 감은 은서가 만족스럽다는 듯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 집에서 이토록 기분이 상쾌하고 평온한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은서는 휴대폰 화면의 달력을 보며 정혁을 만날 날을 확인했다.
일주일에 한 번 이뤄지는 그와의 은밀한 만남이 벌써 몇 주 째 이어지고 있었다.
정혁의 배려였는지 만남은 걱정이 무색할 만큼 철저하게 비밀리에 이뤄졌다.
누군가의 눈에 띄지도 않을, 안전한 곳에서 생각보다 건전한 만남이 지속되고 있었다. 물론 은서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전혀 건전하지 못했지만.
하지만, 적어도 그가 저를 욕망이 섞인 눈으로 보는 일은 없었다.
그게 마음이 놓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싫었다.
“이상해.”
아무래도 자신이 제정신은 아닌 것 같다고.
은서는 그리 정의를 내렸다.
하긴, 애당초 정혁과의 관계가 정상으로 볼 수 있는 범주에 속하진 않았다.
여느 연인들처럼 썸을 타거나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아는 지인으로 치부하기엔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없었고.
창틀에 팔을 얹고 얼굴을 올린 은서가 창가에 떨어져 있는 낙엽 하나를 쥐고 팽그르르 돌렸다.
정혁의 낮은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예상할 수 없는 그의 돌발 발언과 행동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빨리 다음 주가 됐으면 좋겠다.”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를 만나고, 은서는 잊고 있었던 즐거움이란 감정을 다시 느끼고 있었다.
*“은서야, 오늘 바쁘니?”
주말 아침, 물을 마시러 1층으로 내려온 은서를 경미가 불러세웠다.
“……아뇨. 무슨 일 있으세요?”
경미가 먼저 스케줄을 물어오는 건 처음이었다.
의아함에 한 박자 늦게 답한 은서가 빙긋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으응, 나 부탁이 있어서.”
부탁?
경미의 입에서 한 번도 나온 적 없는 단어였다.
그녀는 늘, 집에서 공기처럼 떠다니는 것이 당연한 사람처럼 되어 있었으니까.
“말씀하세요.”
“있지. 나랑 같이 데이트해 주면 안 될까?”
“데이트요?”
그래서인지 그녀의 제안은 상당히 의외였다. 은서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 우리 둘이 어디 나가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아서.”
되묻는 은서가 불편해하는 거라 여겼는지 경미가 당혹스러운 티를 숨기지 못하며 말을 급히 덧붙였다.
“맛있는 것도 먹고, 은서 옷 한 벌 사주고 싶기도 하고.”
“…….”
“다른 모녀들처럼, 그렇게 한 번…….”
더이상 요구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리는 그녀가 퍽 안쓰러웠다.
중훈의 기에 눌려 사는 건 은서뿐만이 아니었다.
은서는 수영의 그림자에 가려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고 사는 경미가 항상 안타까웠다.
“그게 뭐 어려운 거라고 부탁까지 하세요.”
은서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경미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럼 같이 가 주는 거지? 의원님한테는 내가 잘 말할게.”
“네, 그래요.”
어차피 해외 순방을 나간 그가 지금 당장 두 사람을 강제할 방법은 없었다.
“어머나, 설레네. 나 금방 옷만 갈아입고 올게. 맛있는 거 먹자 우리.”
“네. 저도 옷 갈아입고 내려올게요.”
은서는 설렘을 숨기지 못하고 소녀처럼 방으로 토도도 달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모처럼 편안하게 웃을 수 있었다.
“이 원피스 어때?”
“예쁘네요.”
“이건? 이것도 너무 예쁘다, 은서 너한테 잘 어울리겠어.”
경미는 정말 신이 난 모양이었다.
“우리 은서는 피부가 하얘서 무슨 색을 입어도 참 예쁘네.”
백화점 의류 매장에서 이것저것 은서에게 대보는 그녀는 지금까지를 통틀어 가장 밝아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따님이 너무 예뻐요.”
경미의 곁에 다가온 직원이 사르르 눈웃음을 치며 말을 보탰다.
“그렇죠? 우리 딸…… 아.”
점원의 립서비스에 호응하던 경미가 대답하다 말고 은서의 눈치를 살폈다.
“감사합니다.”
은서가 동의하듯 차분히 눈꼬리를 접었다.
“맞아요, 우리 딸. 너무 예쁘죠.”
경미의 얼굴이 다시 해사하게 피었다.
경미를 보면서 은서는 가슴 한구석이 아리면서 몽글거리는 걸 느꼈다.
“우리 딸, 세상에서 최고로 예쁜 우리 딸.”
저만 보면 사랑을 숨기지 못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똑 닮은 얼굴로 화사하게 웃던 예쁜 얼굴.
“엄마.”하고 부르면 눈꼬리를 한껏 접으며 힘껏 안아주던…….
사랑했던 만큼 큰 상처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버린 밉고도 그리운 사람.
은서는 수영과 전혀 다른 얼굴을 한 경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쌍꺼풀이 짙은 수영과 달리 경미는 작은 눈이었고, 키가 큰 편이었던 수영과 달리 경미는 작은 키에 아담했다.
전혀 다른 사람이었지만, 은서는 그래도 경미가 좋았다.
수영의 대신이 아니라, 그녀 자체가.
망설이던 은서는 머뭇머뭇 손을 뻗어 경미에게 팔짱을 꼈다.
“배고파요, 우리 밥 먹으러 가요.”
“아, 배고파?”
경미가 화들짝 놀라며 옷걸이를 내려놓았다.
“네.”
경미가 집에 온 지도 벌써 6년이었다.
수영에게 받았던 상처로 어쩌면 경미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벽을 세웠던 건지도 모른다.
이제는 진짜 가족이 되어도 괜찮지 않을까.
은서의 입술이 아름거리다 열렸다.
“네, 엄마.”
“…….”
경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버지 앞에선, 조심할게요.”
중훈의 앞에서 수영을 떠올리게 만드는 ‘엄마’는 금지 단어였다.
“둘이 있을 땐 그렇게 불러도 될까요?”
“그러엄, 당연하지.”
은서는 경미의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을 못 본 체하기로 했다.
“은서 많이 먹어.”
“네.”
다정한 얼굴을 한 경미가 은서 쪽으로 그릇을 밀어주었다.
“내가 오늘만 기다린 거 알아? 네 아버지 아시면 서운해하시겠지만.”
경미는 중훈이 출국하기만을 기다렸다며 웃었다.
“여기, 내가 은서랑 와보고 싶어서 전부터 점찍어 놓은 곳이었어. 어때? 음식 맛 괜찮지?”
“네, 맛있어요.”
“모처럼 생긴 자유시간인데 만끽해야지, 안 그래?”
개구쟁이처럼 웃는 경미를 보며 은서도 덩달아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런데 은서야.”
“?”
“은서, 요즘 무슨 좋은 일 있니?”
“좋은…… 일이요? 아뇨, 딱히 그런 건 없는데. 왜 그러세요?”
“아니, 요즘 은서 얼굴이 좀 밝아진 것 같아서.”
“아.”
그렇게 티가 났나.
은서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등으로 제 얼굴을 눌렀다.
그냥, 숨통이 좀 트인 것 같다고만 생각했는데.
“……남자친구?”
경미가 목소리를 낮추며 조심스레 물었다.
“……아녜요, 그런 거.”
“그래? 아무리 봐도 연애하는 얼굴인데.”
연애라.
은서는 정혁을 떠올렸다가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어딜 봐도 연애라 칭할 수 없는 관계였다.
그런 종류의 감정이 섞인 것도 아니었고.
“정말 아니야?”
“아니에요.”
단호한 부정에 경미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어렸다.
“은서,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말해. 알았지? 내가 아버지 눈 피할 수 있게 열심히 도와줄 테니까.”
“네.”
“나 소원이었거든. 이렇게 딸하고 연애 상담도 하고 그러는 거.”
경미가 눈을 반짝이며 은서의 손을 잡았다.
“난 정말, 은서가 내 딸이 돼서 행복해.”
“……감사해요.”
은서가 다른 손으로 경미의 손등을 다시 덮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이상하게 불안할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