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그게 무슨…….”
“멀어질 때마다 곤란한 일이 생길지도.”
“네?”
“그럼 그렇게 알고.”
더이상의 질문은 듣지 않겠다는 듯 정혁이 인덕션의 전원을 켰다.
장난기 하나 없는 깔끔한 그의 옆얼굴을 보면서 은서는 어이가 없었다.
은서가 황당해하건 말건 정혁은 무언가를 꺼내려는 듯 몇 걸음 옆으로 가 서랍장을 열었다.
“…….”
우뚝 멈춘 그가 은서를 쳐다봤다.
“왜요?”
물끄러미 보는 정혁에 은서가 경계하듯 물었다.
“뭐 해요, 안 따라오고?”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엄격한 얼굴을 하고서, 그는 이상한 요구를 자연스레 뱉고 있었다.
“…….”
그게 우스워 은서는 잠자코 그의 지시를 따르기로 했다.
정혁이 뭘 하든 장단을 맞추기로 한 건 저였으니까.
은서는 스르륵 부드럽게 발을 움직여 정혁의 곁에 바짝 붙었다.
“착하네.”
그제야 정혁이 만족스럽다는 듯 다시 하던 일을 시작했다.
“와.”
정혁이 차려 낸 음식을 본 은서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튀어나왔다.
그리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고 정혁은 고기가 듬뿍 들어간 파스타에 샐러드와 단호박 수프까지 완성했다.
마실 음료를 내려놓은 정혁이 의자를 빼고 은서의 손을 잡아끌어다 앉혔다.
“먹어요.”
은서의 맞은편에 앉은 정혁이 어서 먹으라며 턱짓했다.
“잘 먹겠습니다.”
숟가락을 들어 수프를 한 입 떠먹은 은서의 입가에 겸연쩍은 미소가 피었다.
“……요리 잘하시네요.”
진심이 담긴 칭찬이었지만 정혁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많이 먹어요.”
턱을 괸 정혁은 제가 만든 음식이 은서의 입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천천히 지켜봤다.
붉고 도톰한 입술이 벌어졌다 닫히며 오물거리는 게 퍽 마음에 들었다.
맛이 괜찮은지 만족스러운 듯 적당히 상기된 볼도 볼만했고.
흘러내리는 긴 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 넘겨 무심코 귀에 꽂는 걸 보니 은서는 먹는데 제법 집중하는 것 같았다.
덕분에 옷소매가 아래로 흘러내리면서 하얀 손목이 드러났다.
‘쯧.’
가느다란 손가락과 손목을 보며 정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잘 먹지도 않는가 보군.’
세게 쥐면 부러지기라도 할 것처럼 눈에 보이는 그녀는 너무 연약하고 가녀렸다.
호텔에서 수영장에 빠뜨리려 들어 올렸을 때 깃털처럼 가벼워 깜짝 놀랐던 것이 생각났다.
처음 만났을 때 피어오른 의구심은 몇 번의 만남을 통해 이제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녀가 지금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은서를 바라보는 정혁의 눈빛이 점점 어둑해졌다.
“……안 드세요?”
뒤늦게 제게 고정된 정혁의 시선을 느낀 은서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물었다.
“맛있는데.”
“먹어요.”
고개를 갸우뚱하는 그녀에 정혁이 어깨를 으쓱하곤 물잔을 들었다.
“요리는…… 배운 거예요? 아니면, 취미 같은 건가.”
한참이나 머뭇거리던 은서가 혼잣말하듯 질문을 던졌다.
뭐 대단한 질문이라고 저렇게 망설이나 싶어 정혁은 픽 웃고 말았다.
“혼자 살다 보니.”
혼자가 된 후 정혁을 기다린 건 살아내야 하는 현실이었다.
윤수가 제집으로 들어오라 몇 번 권하기도 했지만, 정혁은 그의 청을 거절했다.
윤수의 바람대로 그의 뒤를 이을 생각은 없었다.
덕분에 무엇이든 혼자 해내는 데 익숙해져야만 했다.
지금이야 가사 일을 돕는 사람을 쓴다지만, 그 당시에는 그럴 여력도 없었으니 전부 부딪치며 배우며 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 그렇구나…….”
은서는 괜스레 말끝을 흐렸다.
가족과 떨어져 사나?
하긴, 성인 남자이니 일부러라도 독립했을 것 같긴 했다.
하지만 눈을 내리깐 그에게선 왜인지 모를 쓸쓸함이 느껴졌다.
더 깊이 묻지 못하고 은서가 시선을 옮길 때였다.
“그러고 보니.”
“?”
정혁이 뭔가 떠오른 듯 작게 미소 지었다.
“내가 만든 걸 누군가와 나눠 먹는 건 처음이네.”
“…….”
“뭐, 혼자 먹는 것보다는 나은 것도 같고.”
피식 웃은 정혁이 은서를 따스하게 바라봤다.
은서는 그 시선에 조금 놀라고 말았다.
처음 만나 지금까지, 늘 그와 있을 때는 공기가 팽팽한 곳에서 외줄 타기를 하는 느낌이었는데.
다정하게 대하는 정혁이 조금 신기하고 낯설었다.
“조금…… 이상해요.”
은서가 민망함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피했다.
“뭐가?”
“왜 이렇게 갑자기 다정해졌어요?”
“…….”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정혁의 입술이 다물어졌다.
“왜, 다정하면 안 되나. 그간 꽤 친절하게 군 것 같은데.”
그가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오늘의 그는 어색하다 싶을 만큼 다정했다.
기분이 이상할 정도로.
“그럼…….”
양쪽 손을 얽어 그 위에 턱을 괸 정혁이 은서를 천천히 훑었다.
“함부로 대해줬으면 좋겠어?”
“…….”
은서는 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우물거렸다.
미친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그게 더 마음이 편한 건 사실이었다.
정상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그러니 서로 체면 차릴 필요 없는, 그런 관계가 우리에겐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그래.”
침묵을 긍정이라 생각했는지 정혁이 몸을 뒤로 빼며 의자에 등을 붙였다.
“그럼 원하는 대로 해주지.”
한층 낮아진 정혁의 목소리가 음습하게 깔렸다.
“내가 또 배려하는 마음이 넘치는 사람이라서.”
그가 흘린 말의 내용과는 정반대의 표정과 말투였다.
정혁의 까만 눈동자가 박히듯 은서의 눈에 담겼다.
“대신 후회는 하지 마.”
경고하는 그의 입술 끝이 느른하게 올라갔다.
은서는 저도 모르게 꼴깍 침을 삼켰다.
모순 같지만, 그가 주는 이 긴장감이 오히려 편안했다.
·“그냥 두고 이리 와.”
정혁의 긴 손가락이 은서의 목덜미를 가린 블라우스 깃을 갈고리처럼 낚아채 뒤로 당겼다.
“아……!”
얼결에 끌려가게 된 은서가 황급히 양손을 뒤로 뻗어 정혁의 손목을 잡았다.
함부로 대하겠다던 그는 더이상 존댓말을 하지 않았고, 은서를 어린 애 다루듯 하기 시작했다.
정혁의 손을 떼어 낸 은서가 몸을 돌려 정혁을 노려보았다.
“설거지는 해야죠.”
우습게도, 그가 함부로 대할수록 은서도 편히 그에게 덤벼들 수 있었다.
“네가 할 일이 아니야.”
“내가 할 일이 정해져 있기라도 해요?”
“잊었나 본데.”
톡 쏘아붙이자 정혁이 나른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한 뼘의 거리만 두고 다가온 정혁의 입술이 예쁘게 늘어졌다.
“날 유혹하는 게 네 일이라니까?”
“……그 얘기는 이제 끝난 거 아니었어요?”
“끝나다니?”
“어차피 나랑 잘 생각도 없잖아요.”
“하는 거 봐서, 라고 하지 않았나?”
“말장난은 그만 해요.”
“말장난이라니. 그게 아니면 왜 우리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요. 날 여기로 데려와서, 음식까지 직접 만들어 먹였잖아요.”
“그러는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해?”
“…….”
뜻 모를 그의 미소에 은서가 주춤하는 찰나, 정혁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은서의 가슴으로 향했다.
그를 따라 덩달아 시선을 내리던 은서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지금 무슨…….”
“마른 여자는 취향이 아니라서.”
삐딱하게 선 그가 팔짱을 끼며 여유롭게 웃었다.
“조금 더 찌워서 잡아먹을까 하고.”
“뭐라고요?”
은서가 어이없다는 듯 그를 노려보다가 휙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을 더 받고 있으면 헐벗겨진 느낌이 들 것만 같았다.
씩씩대며 부엌을 나서면서도 은서는 저도 모르게 제 몸을 힐끗 살폈다.
‘지금 무슨 생각을.’
그러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은서가 소파에 풀썩 앉을 때였다.
툭.
그녀의 손에 걸린 휴대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무심코 휴대폰을 집어 들던 은서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화면 위에 부재중 전화가 떠 있었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지만, 은서는 연락해 온 사람이 누구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연락 좀 주겠니?]
두 번의 부재중 통화와 한 통의 문자.
여러 번 차단했는데도 그는 또다시 새로운 연락처를 만든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야.”
어느새 은서의 앞에 선 정혁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
은서가 휴대폰을 제 쪽으로 휙 당기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건 뭐였을까.’
은서를 데려다주고 사무실로 돌아온 정혁은 의자에 몸을 묻은 채 턱을 문질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말과는 다르게 창백해진 얼굴이었다.
휴대폰을 쥔 은서의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눈을 지그시 감은 정혁의 얼굴에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똑똑.
정혁의 상념은 노크 소리에 중단됐다.
“네.”
대답이 미처 끝나기도 전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역시나 도훈이었다.
“소꿉놀이는 잘하고 왔냐?”
“뭐, 그럭저럭.”
“표정이 왜 그 모양이야? 잘 놀고 온 거 아니었어?”
“글쎄. 현우가 내온 정보는?”
“여기.”
파일철을 정혁에게 넘긴 도훈이 양손으로 정혁의 책상을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 있었어? 복잡해 보이는데.”
알만하다는 듯 도훈의 입술이 길게 늘어졌다.
“여자에 대해 전혀 모르는 네가, 어린 여대생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 안 그래?”
정혁이 신소리 말라는 듯 한쪽 눈썹만 치켜올렸다.
“그냥 해달라는 대로 해줘. 갖고 싶은 거 있다고 그러면 사주고, 먹고 싶은 거 있다 그러면 사주고, 그게 너도 쉬울걸?”
……해달라는 대로 해주라고?
함부로 대해주길 원하는 것 같은 은서를 떠올리자 헛웃음이 나왔다.
“알았으니까 그만 나가.”
정혁이 시끄럽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내 충고 명심해, 그래도 여자 관련해선 내가 너보단 조금 더 낫잖냐.”
도훈이 쿡쿡 웃으며 밖으로 나가고, 정혁은 파일철을 열어보다 말고 창밖을 바라봤다.
솔직히 은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하던 건 사실이었다.
첫 만남이야 의도적으로 자극했고, 그 후에도 풍선이 터질 때까지 바람을 욱여넣듯이 건드려대며 자극했다.
하지만 계속 그런 관계를 이어갈 생각은 없었다.
게임 운운하며 안정적으로 만날 핑계도 만들었으니 따스하게 감싸주고 싶었다.
은서에게 마음의 빚을 갚고 싶었으니까.
그랬는데…… 다정한 게 싫다니.
정혁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스물다섯의 차은서는,
꽤 복잡한 어른이 된 모양이었다.
“일단은, 원하는 대로 해줘 볼까.”
반짝이는 야경을 담은 정혁의 무거운 눈동자가 날카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