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집……이에요.”
은서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무슨 일이지.
“……아무것도요.”
-괜찮은 건가.
무언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그의 목소리는 아직 딱딱했다.
서서히 안정되는 호흡을 느끼며 은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 여러 번 놀라게 하네.
“……뭐가요.”
-계속 도망칠 것 같더니 갑자기 태도가 바뀐 것도 그렇고.
“제가 뭘요.”
은서가 헛웃음을 지으며 반박했지만 바람 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먼저 전화를 하질 않나.
“…….”
-그러더니 다 죽어가는 사람처럼 굴고.
“……미안해요.”
-이거 봐. 지금 나보고 미안하다고 한 건가?
“…….”
대체 그의 머릿속에 차은서란 사람은 어떤 모습인 걸까.
사과하는 것조차도 이상하게 여기는 그에 은서는 불퉁스러워졌다.
-그래서, 왜 전화한 건데요.
정혁이 갑자기 목적을 물어온 탓에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까. 전처럼 돌려줄 셔츠가 있는 것도 아닌데.
하지만 그가 뱉은 다음 말에 걱정이 무색해졌다.
-그새 또 보고 싶었나?
뻔뻔하다 싶을 만큼 당당한 말투였다.
“……하하.”
은서는 그만 실없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기운 없는 웃음소리였다.
사무실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던 정혁이 휴대폰을 들고 있던 손을 바꿨다.
서류를 내려놓은 그는 본격적으로 은서와의 통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화면에 뜬 은서의 이름을 보고 의아해하던 감정은 불안한 그녀의 호흡에 이미 걱정으로 바뀐 후였다.
‘물어봐야 답하지 않겠지.’
조금은 상태가 나아진 것 같으니, 그저 모르는 척 달래주는 수밖에 없었다.
정혁은 답답했다.
도훈에게 시켜 은서를 조사한 것만으로는 은서에게 벌어진 일이나, 그녀가 처한 상황을 다 알 수 없었다.
정혁은 은서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건지 정확히 알고 싶었다.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은데.”
무던한 투를 가장한 본심이 튀어 나갔다.
-……그런 거 아니에요.
하지만 입을 꾹 다문 그녀는 목소리가 새어나갈까 봐 두려운 사람처럼 거의 속삭이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무슨 일이 있었든 그녀가 제게 연락했다는 사실이었다.
집중해야 들릴 만큼 작은 소리였지만 간질거리는 게 나쁘지 않았다.
“그래요, 그럼 목적 없이 전화한 차은서 양.”
-…….
“무슨 말이든 해봐요, 아무 말이라도 좋으니.”
-어, 음.
그래도 끊고 싶진 않았는지 은서는 할 말을 생각하는 듯했다.
웃음을 참으며 그대로 일어선 정혁은 창가로 다가갔다.
반짝거리는 야경을 보며 새살 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나는 대체 네게 뭘 해주고 싶은 걸까.
정혁 자신조차도 아직 뚜렷한 답을 몰랐다.
그만 끊겠다고 하려 했는데.
아무 말이나 해보라는 정혁의 말에 은서는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하지만 무슨 대화를 나눠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오늘 포켓볼 재미있었어요.”
결국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 앵무새처럼 낮에 했던 말을 반복했다.
-내가 뭐랬어요. 몸으로 하는 것 중엔 재미있는 게 많다니까.
“몸으로 하는 거랑 재미는 전혀 상관없는 것 같은데…….”
은서가 조용히 반박했다.
사람을 오해하게 만드는 그의 표현에, 첫 만남때 정혁이 유혹한 거라 착각했던 게 떠오른 탓이었다.
그때의 일만 생각하면 창피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차은서 양은 몸을 좀 움직일 필요가 있죠.
“운동이라도 시킬 생각이에요?”
-궁금해하는 걸 보니 다음 만남이 기대되는데.
다음.
다음이라.
은서의 속눈썹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집 앞에서 지석을 마주쳤을 때만 해도 덜컥 겁을 먹은 탓에 다시는 정혁과 만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랬는데 지금은…….
-왜 또 말이 없지?
은서가 눈을 떴다.
“다음엔…… 뭘 할 거예요?”
지금은 그를 다시 보고 싶었다.
“아, 몸 쓰는 건 안 하고 싶어요.”
-원하시는 대로.
그가 쿡쿡 낮게 웃는 게 들려왔다.
그 소리가 꽤 듣기 좋았다.
문득 고개를 드니 화장대 거울 속에 웃고 있는 제 모습이 보였다.
일그러져 엉망이었던 얼굴에 피어난 미소가 어쩐지 낯설면서도 싫지 않았다.
*“사람 불러 놓고 이 자식은 어디 갔어?”
대표실 문을 열고 들어온 현우는 주인 없이 텅 빈 자리를 보고는 휙 몸을 돌렸다.
“정확히 널 부른 건 나이긴 하다만.”
현우를 따라 오며 문을 닫은 도훈이 소파로 친구를 이끌었다.
“정혁이는 소꿉놀이를 시작해서 바빠.”
“소꿉놀이? 그게 무슨 소리야?”
도훈의 맞은편에 풀썩 앉으며 현우가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그런 게 있어.”
“……설마.”
곰곰이 생각해 보던 현우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이미 짚이는 게 있는 현우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설마가 사람 잡는 법이지.”
“진짜로? 걔 지금 진짜 현주 친구랑 만나고 있어?”
“아니.”
“그럼 뭔데.”
“만나는 게 아니라 작업 중이라는 게 더 가까울 것 같은데.”
“……뭐?”
“그래, 놀랍겠지. 놀라울 거야.”
도훈이 대충 중얼거리며 현우에게 건넬 서류들을 눈으로 훑었다.
현우가 놀라는 것도 이해는 가지만, 지금 도훈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정혁이 그 어린 아가씨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제게 던져 놓고 간 업무가 한가득이었다.
“그래, 까라면 까야지. 내가…… 하아…….”
“진짜? 진심으로 그러는 거야, 걔?”
현우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한 아이처럼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일에 절어 투덜거리는 도훈은 현우의 관심 밖이었다.
“일이나 합시다, 일.”
“그건 좀 천천히 해도 되잖아? 바쁜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비워놓고 간 그 녀석이 잘못한 거지.”
현직 검사인 위치를 잊지 않고 법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현우는 철저하게 기브앤테이크에 충실한 자세로 정보를 교환했다.
“지금은 이 이야기가 제일 재밌네. 썰이나 풀어 봐. 그 둘 정확히 뭐야?”
손깍지를 낀 현우가 다리를 꼬며 빙긋 웃었다.
“하정혁, 그놈이 첫눈에 반했다 뭐 다 그럴 리는 없고. 그 둘 사이에 뭐 있는 거 맞지?”
누가 현직 검사 아니랄까 봐 예리하게 파고들 준비를 하는 현우에 도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늙지, 늙어.”
친구 잘못 만나 매일 고생길을 걷는 것만 같다.
“소꿉놀이의 정체가 뭔데? 현주 친구, 그 아가씨가 뭐길래 하정혁이 그렇게 공을 들이는 거야?”
“소꿉놀이가 소꿉놀이지, 다를 게 뭐가 있는데.”
“현주는 모르는 것 같지만, 그 친구. 차중훈 의원 딸이잖아.”
“알고 있었어?”
현우가 말없이 어깨만 으쓱했다.
어후, 여우 같은 자식.
이럴 때 보면 의뭉스럽기가 정혁과 어깨를 견줄 정도였다.
“그런데 진짜 별다른 거 없어. 차 의원 딸인 거랑도 상관없고. 차 의원 딸인 건 사실, 우리도 예상 못 한 우연이야.”
“그럼 뭐야? 하정혁이 그렇게 신경 쓰는 이유.”
“정혁이 지금 빚 갚는 중이야.”
“……빚이라니?”
현우가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찡그렸다.
*은서는 자동차가 들어서는 건물을 신기한 듯 올려다봤다.
그가 데려온 곳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보안이 철저한 고급 빌라였지만, 그때와 같은 곳은 아니었다.
‘다 자기 집인가.’
그다지 답이 궁금하지 않은 질문을 속으로 던지며 은서는 다소곳한 자세를 취했다.
주차장에 차가 멈추고 시동을 끈 정혁이 은서의 안전벨트 끈을 풀러 냈다.
“내려요.”
“어딘…… 뭐 하려고요?”
약속한 대로 정혁과 정해진 날 다시 만났다.
학교 근처에서 은서를 픽업한 그는 곧장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그녀를 데려왔다.
“점심 먹으려고요.”
“점심이요?”
은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서요?”
은서의 반응에 픽 웃기만 하고 내린 정혁이 보닛을 돌아와 조수석 문을 열었다.
“가보면 알겠지.”
·“지금 이게…….”
은서는 식탁 위에 늘어져 있는 음식 재료들을 보며 당황한 걸 숨기지 못했다.
“눈치챘어요?”
정장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풀어놓은 그가 은서의 곁을 지나쳤다.
“밥을… 만들어 먹으려고요?”
은서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 끝을 높였다.
살면서 요리를 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정혁이 요리를 할 것 같은 이미지도 아니었고.
이 남자가 또 뭘 하려는 걸까 싶었다.
“혼자 만들라고 안 할 거니까 그렇게 겁먹을 필요는 없고.”
식탁으로 다가간 정혁이 재료를 확인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어느새 소매를 걷어 올린 그는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할 태세였다.
“요리 잘하세요?”
그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은서가 조금 긴장을 풀고 정혁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럭저럭?”
“뭔가 애매한데요?”
“나쁘진 않을걸요.”
익숙해 보이는 모습에 은서는 궁금증이 일었다.
의식적으로 그에 대해 더 알게 되는 걸 꺼리고 있다 보니 이런 사소한 걸 묻는 게 조심스러웠다.
어쨌든 그가 보여주는 모습이 꽤 다양하다는 건 신기했다.
“고기랑 해산물 중에, 뭐가 더 좋아요?”
한 손으로 허리를 짚은 정혁이 은서를 돌아보며 물었다.
갑자기 제게 향한 시선에 은서가 살짝 옆으로 물러섰다.
아무 생각 없이 그의 바로 옆까지 다가왔던 탓에 생각보다 그의 얼굴이 가까웠다.
“아무거나 괜찮아요.”
“골라요.”
정혁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라는 듯 되물었다.
“그럼…… 고기로.”
그제야 정혁이 만족한 듯 다시 손을 움직여 재료를 정리했다.
뭘 도와야 할지 알 수 없어 은서는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며 정혁이 하는 행동을 지켜봤다.
“도와드릴까요?”
“그건 됐고.”
단칼에 거절하는 그에 괜히 서운하고 민망해졌다.
“그냥 앉아 있을까요?”
은서가 입술을 말아 물며 식탁 의자를 붙잡았다.
“어딜.”
“그럼 어떡해요?”
뭘 어쩌라는 건지.
은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리 와요.”
정혁의 긴 손가락이 제 바로 옆을 가리켰다.
정혁이 의도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한 은서가 눈만 끔뻑였다.
“옆에 있으라고.”
은서가 쭈뼛쭈뼛 정혁이 지시한 곳까지 다가갔다.
정혁이 은서와 제 사이의 거리를 손가락으로 가늠하듯 짚었다.
정혁의 손가락 하나 정도 될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딱 이 만큼.”
정혁이 은서의 눈을 보며 명령했다.
“이 이상 떨어지지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