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운전석에서 후다닥 내린 보좌관이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익숙하게 의전을 받으며 내리는 중훈을 본 지석이 서둘러 허리를 숙였다.
“지석이구나.”
“네, 오랜만에 뵙습니다.”
중훈이 근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은서를 힐긋 쳐다봤다.
은서는 눈을 내리깔며 중훈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석이니 중훈이 크게 나무라진 않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중훈은 이제 더 이상 제가 알던 예전의 다정한 아빠가 아니었으니.
“…….”
“아, 지나가던 길에 마주쳐서요.”
지석은 다시 제게 시선을 주는 중훈의 의도를 파악하고 답을 내놓았다.
“그래, 그럼 가보거라.”
“아…… 네.”
지석이 당혹스러움을 갈무리하며 미소 지었다.
솔직히 중훈의 등장이 반가웠다. 오랜만에 본 거니 자연스레 그가 집에 들어왔다 가라 초대할 줄 알았으니까.
어릴 때는 자주 가족들과 놀러 왔던 집이었는데,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로는 한 번도 오질 못하고 있었다.
서운한 마음이 앞섰지만, 무턱대고 초대해달라고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뭐라 딱 꼬집어 말하긴 어려운데, 그 친구 좀 변한 것 같아.”
언젠가 저녁 식사 중에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흘리듯 하던 말이 생각났다.
“……다음에 아버지랑 같이 뵙겠습니다.”
“그래.”
“네, 그럼 가보겠습니다.”
지석은 더이상 뭘 어쩌지 못하고 중훈에게 허리를 숙였다.
오늘은 중훈에게 눈도장 찍은 정도로 만족해야 할 것 같았다.
“학교에서 보자.”
“응, 잘가.”
돌아서기 전 은서에게 빙긋 웃어 보인 지석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냈다.
“……들어가지.”
“네, 의원님. 내일 모시러 오겠습니다.”
90도로 허리를 숙인 보좌관을 뒤로하고 중훈은 대문을 넘어섰다.
은서는 중훈의 보좌관에게 덩달아 고개를 꾸벅 숙이곤 중훈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뒷짐을 진 채 돌계단을 오르는 중훈을 보고 있자니 벌써부터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하아.’
은서는 본능적으로 숨을 골랐다.
조금 전, 지석이 등장했을 때 식은땀이 날 정도로 놀랐던 여파가 가시질 않고 있었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혹 중훈이었을까 봐, 그에게 정혁과의 시간을 들킨 걸까 봐 덜컥 겁이 났다.
몰래 시도한 일탈이 들킬 때마다 중훈의 분노로 상황이 더 악화되었던 기억이 학습된 공포를 일으켰다.
정혁을 통해 잠시나마 현실을 잊지만, 사실은 그 시도 자체가 위험한 거였다.
어쩌면 저는 최악의 수를 둔 건지도 몰랐다.
어떤 것도 하지 말고 죽은 듯이 보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은서가 피곤해진 미간을 누를 때였다.
“늘 말하는 거지만 행동거지 조심해라.”
항상 그랬듯 중훈의 입에서 경고를 빙자한 협박이 흘러나왔다.
“……아니에요, 그런 거. 아시잖아요.”
“으흠.”
“그냥 친구예요.”
이젠 하다 하다 소꿉친구인 지석까지 멀리하라는 걸까.
은서는 답답함에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중훈은 제 동료였던 지석의 부친, 형교를 떠올렸다.
권력에 욕심 없는 강직 하고 올곧은 이였다.
공직에 걸맞은 이라는 건 분명하지만, 자신과 같은 길을 갈 수는 없는 사람.
순규의 아들과 지석을 두고 본다면 누구에게 더 후한 점수를 줘야 하는지는 자명한 사실이었다.
“적당히 거리 두고.”
중훈은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듯 말을 내뱉고는 집안으로 들어섰다.
“오셨어요?”
종종거리며 달려 나온 경미가 중훈을 맞다가 은서를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어떻게 같이 들어오시네요.”
마치 신기한 광경을 목격하기라도 한 사람 같았다.
“……앞에서 만났어요.”
이미 안으로 들어가 버린 중훈을 대신해 은서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렇구나.”
경미가 은서의 어깨를 한번 다독이고는 종종걸음으로 중훈을 좇아갔다.
중훈이 소파에 앉으며 자신의 재킷과 넥타이를 받아드는 경미를 노려보다시피 했다.
“이봐.”
“네?”
“내가 이 집에 당신을 들인 이유. 잘 알고 있겠지?”
“……네.”
주눅이 든 듯 쓸쓸하게 미소 짓는 경미에 은서가 불안하게 주먹을 쥐었다.
“집에 있으면서 애 하나 관리 못 하고 뭐 하는 거야. 다 큰 녀석 하나 지켜보는 게 그렇게 어려워?”
“…….”
괜히 저 때문에 죄 없는 경미에게 불똥이 튀어버렸다.
불편해진 은서가 둘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빠.”
“은서야.”
끼어들려는 은서를 경미가 막았다.
은서는 제 손목을 단단히 붙들어 맨 경미의 손을 내려다보곤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나 꽉 붙잡았는지 경미의 손가락이 하얬다.
경미가 눈으로 괜찮다는 신호를 주곤 다시 중훈을 바라봤다.
“죄송해요, 은서가 워낙 자기 앞가림을 잘하는 애다 보니 제가 긴장이 풀렸나 봐요.”
경미가 중훈을 달래듯 바짝 수그리는 걸 보며 은서는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제가 요즘 신경을 통 못 썼어요.”
“……당신 역할이 뭔지 잘 명심해.”
“네, 그럼요.”
중훈이 그만 가라는 듯 헛기침을 하며 옆에 놓인 신문을 집어 들었다.
중훈에게 향하는 분노를 터트리기 일보 직전인 은서를 경미가 2층으로 이끌었다.
“잠깐 들어가도 될까?”
창백한 은서를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경미가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죄송해요.”
“아니야, 은서 네가 왜.”
은서가 기어가다시피 하는 목소리로 고개를 떨궜다.
“그냥…… 전부 다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저 경미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뿐이었다.
“원래…… 저렇게 못된 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한때는 따뜻하고 자상한 아버지였다.
세상에서 아내를 제일 사랑하고 제 딸을 아끼는.
“괜찮아. 나는 네 아버지 마음 이해해.”
경미가 은서의 손을 잡고 토닥였다.
“네 아버지가, 네 어머니를 너무 사랑해서, 그래서 상처가 더 크신 거야.”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아버린 은서를 따라 경미가 같이 무릎을 꿇었다.
“나도 그런 상처를 겪어봤기 때문에 잘 알아.”
경미의 눈가가 조금 붉어졌다.
은서는 차마 경미를 마주 볼 수 없었다.
사랑 하나만 믿고 부잣집에 시집갔다던 그녀는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소박을 맞았다 들었다.
제 편이 되어 줄 줄 알았던 남편은 가족 뒤에 숨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나뿐인 딸을 뺏기고 아무것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쫓겨난 그녀는 종교를 가지고서야 조금씩 제 상처를 치유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경미는 중훈을 만났다.
“남들은 몰라도 난 네 아버지를 보자마자 알 수 있었어. 아, 저 사람. 나와 같은 상처를 가졌구나 하고.”
첫 만남을 떠올리는 경미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있잖아, 은서야. 네 아버지 조금씩 괜찮아질 거야. 내가 이 집에 들어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어.”
“…….”
“이 나이에 사랑이라고 하면 우습지만, 난 네 아버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이렇게 예쁜 딸도 생기고 말이야.”
“…….”
“네가 오해할까 봐 조심스러워 말 못 했는데, 나는 네 어머니께 고맙기까지 한걸. 이렇게 예쁜 딸도 생겼고, 또 네 아버지도 만나게 됐고.”
경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누군가는 이렇게 수영의 배신을 고마워할 수도 있구나 싶어 문득 우스웠다.
“이미 떠나신 분, 너무 미워하지 마. 네 아버지도 마찬가지고. 네 아버지 불쌍한 사람이야.”
“…….”
알아요.
은서가 입술을 즈려 물었다.
평생을 사랑한 아내에게 배신당한 아버지가 안쓰럽고 불쌍했다.
중훈은 은서에게서 수영의 흔적을 깡그리 지우고 싶어 했다. 그는 수영처럼 은서가 자신을 떠나버릴까 두려운 것처럼 보였다.
수영이 떠났을 때, 중훈이 느꼈을 배신감과 상처를 알기에 그런 중훈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수영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건 저도 중훈과 똑같은 감정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비뚤어져 버린 중훈의 애정을 감당하려 애썼다.
하지만 나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중훈의 집착과 통제는 어린 은서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웠다.
미칠 것 같아 벗어나고 싶다가도 중훈이 불쌍해서 참고야 마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이건 절대 끝나지 않을 뫼비우스의 띠 같았다.
이 복잡한 상황과 감정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좋아서 네 아버지 옆에 있는 거야. 그러니까 괜찮아. 자, 그렇게 어두운 표정 하지 말고. 예쁜 얼굴이 가려지잖니.”
경미가 환하게 웃으며 은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아버지가 찾으실 것 같아. 난 내려갈 테니까 그만 쉬어, 알겠지?”
“……네.”
“마음 풀고.”
신신당부를 남긴 경미가 방을 떠나고, 은서는 지친 몸을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놈의 사랑, 사랑이 뭐라서.
수영은 미련 없이 가족을 버리고 떠나버렸고, 경미는 스스로 지옥에 걸어 들어왔다.
이 집에 들어온 이후 다니던 교회에도 나가지 못하는 경미였다.
이유는 하나였다. 그 교회에 중훈이 있었기 때문에.
호적에도 오르지 못하고, 대외적으로 가족이라고 드러낼 수도 없는데.
대체 왜, 그녀는 무엇 때문에 중훈의 곁에 있는 걸까.
왜 이런 희생과 모욕을 감당하는 걸까.
갑갑했다.
바깥 공기가 절실해졌다.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자 바람에 커튼이 휘날렸다.
흩날리는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은서는 어느새 캄캄해진 밤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모든 게 거지 같았다.
이 모든 감정들과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평온해지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정혁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그와 보냈던 시간이.
사람을 긴장시키는 그의 존재감과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것 같은 그의 묵직한 향기가.
그에 대해 생각하느라 바빠서 잠시나마 현실을 잊게 됐던 그 짧은 시간이.
떨렸다.
그리고 편안했다.
“…….”
은서는 홀린 듯 걸어가 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몇 시간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기이한 바람이 피어났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럼 좀 나아질까.
은서가 머뭇거리며 정혁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떨리는 손가락이 통화 버튼을 누르고 곧장 신호음이 울리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미친 건가.”
스스로 정혁을 찾다니.
집 앞에서 느꼈던 공포감을 기억해야 했다.
은서가 황급히 종료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
신호음이 끊겼다.
통화 중으로 넘어간 화면을 보며 은서는 마른 침을 삼켰다.
-먼저 전화라니, 이건 예상 못 했는데.
그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
이상했다.
-……차은서 양?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숨통이 퍽하고 트이는 것만 같았다.
“하아.”
은서가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하아하아, 한 번 터진 숨이 호흡을 정상화시키려는 듯 거칠어졌다.
은서가 숨을 몰아쉬는 동안 정혁은 말이 없었다.
-……지금 어딥니까.
곧 사나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