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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안고, 울리고-17화 (17/82)

17.

정혁이 성큼 다가온 탓에 은서는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아.”

골반 부근이 딱딱한 나무에 닿았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몸이 뒤로 넘어갈 것 같아 은서는 손으로 당구대를 짚어야만 했다.

도망치는 상황에도 은서는 눈동자를 그에게 박아둔 채 떼지 않았다.

“…….”

투명한 갈색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정혁이 시선을 사선으로 내렸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당구대를 쥔 작은 손이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허.’

정혁이 피식 새려는 웃음을 삼켰다.

저렇게 겁을 낼 거면서 자꾸만 도발해 오는 차은서 때문에 곤란할 지경이었다.

진짜 원해서 이러는 건지, 아니면 까부는 건지. 버티는 사람 심정도 고려해주면 좋으련만.

정혁이 다시 느른하게 눈동자를 굴려 은서를 바라봤다.

화장기 없는 새하얀 볼이 살짝 상기되어 붉었다. 괜히 한번 건드려보고 싶게끔.

문득 은서가 바라는 대로 해줬을 때 그녀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졌다.

“……”

더이상 가까워질 거리가 없는데도 정혁은 은서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정혁의 무릎이 은서의 다리 사이를 가르며 비비듯 들어갔다.

닿는 부위가 딱딱하게 굳는 걸 보아 많이 긴장한 모양이었다.

풋.

결국, 참지 못한 웃음이 절로 샜다. 동시에 은서의 붉은 윗입술이 도톰한 아랫입술을 감쳐물었다.

고개를 비스듬히 꺾어 내려가던 정혁의 시선이 정확히 그 입술 위에서 멈췄다.

“…….”

키스……하려는 걸까.

은서는 침을 삼키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콧잔등 위로 그의 날카로운 콧날이 닿을 것만 같았다.

아니, 여기서 조금만 움직이면 분명 입술이 닿을 것이다.

피할 수 없는 거리와 각도였다.

정혁의 단단한 두 팔이 가두듯이 제 양옆을 짚고 있었다.

그의 엄지가 제 왼쪽 새끼손가락을 지그시 누르는 게 느껴졌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팽팽한 긴장감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댔다.

어떻게 할까.

이대로 저질러 버릴까,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고민하던 은서가 눈을 감으려던 찰나.

지이잉.

커다란 진동 소리가 침묵을 갈랐다.

화들짝 놀란 은서가 눈을 반짝 떴다.

가만히 은서를 내려다보던 정혁이 곧 두 팔을 떼어냈다.

은서는 제게서 떨어져 나가는 정혁을 하릴없이 올려다봤다.

미련 없이 멀어져 간 그는 허리를 숙여 소파 위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주워 들었다.

“네, 하정혁입니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가 고개를 조금 숙이며 통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걸음을 옮긴 그가 응접실을 빠져나가 다른 곳으로 향했다.

“…….”

대화가 들리지 않을 만큼 먼 곳까지 간 그는 허리에 한쪽 손을 올리며 통화를 하다가, 다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일련의 행동을 지켜보던 은서는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키스…… 하려는 줄 알았는데.’

그 타이밍에 걸려온 전화가 원망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전화에 밀린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물론 바쁜 그에게 중요한 전화일 거라는 건 알지만, 그가 정말 키스하려던 거였다면 무시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어쩌면 저 남자가 제게 손댈 생각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정도는.

정혁의 시선이 제게 닿지 않는 걸 느끼며 은서는 당구대를 지지대 삼아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창밖으로 한강 너머의 햇빛이 가라앉은 게 보였다.

어느새 집에 가야 할 시간이었다.

자정을 넘길 수 없었던 신데렐라처럼, 갑갑한 현실로 돌아가야 할 때.

잠시나마 그와 웃고 떠들었던 시간이 꿈이었던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이럴 줄은 몰랐는데.’

왜인지 모를 쓸쓸함에 은서는 양팔을 감싸 안았다.

“가려고요?”

어느새 통화를 끝냈는지 정혁이 현관으로 향하는 은서의 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가야죠.”

가방을 고쳐 맨 은서가 차분히 답하자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본 그가 알겠다는 듯 작게 끄덕였다.

“데려다줄게요.”

“아뇨, 그러실 필요 없어요.”

“……갑자기 왜 또 정중한 태도지?”

한걸음 물러서며 고개를 내젓는 은서를 본 정혁이 우습다는 듯 한쪽 입꼬리만 끌어 올렸다.

“……놀리고 싶은 거면, 그러지 마세요.”

“가요.”

괜히 불퉁하게 입을 비죽이자 잘게 웃은 정혁이 고개를 까딱했다.

*은서는 운전하는 그의 옆에서 얌전히 침묵을 지켰다.

역시 낮에 나온 게 무리한 거였는지, 그는 운전하면서도 간간이 업무 전화를 받았다.

단둘만 있는 차 안에서 그의 통화 내용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은서는 턱을 괸 채 차창 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

아까부터 시작된 쓸데없는 생각들이 자꾸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정혁이 쓰는 향수가 무엇일까 라든가, 그는 회사에 뭐라 말하고 나왔을까 하는.

우리는 또 보는 걸까? 아니면 오늘로 끝인 걸까 하는 그런 쓸데없는 호기심들.

그중에서도 가장 궁금한 건, 제가 앉아 있는 이 조수석에 탔던 다른 여자가 또 있었을까 하는 거였다.

본의 아니게 이 차에 탄 것도 벌써 여러 번이었다.

그의 향기만이 그득한 밀폐된 공간 안에 있는 다른 여자의 모습이 상상이 되질 않았다.

‘이런 생각은 왜 하는 거람.’

은서는 그런 자신이 어이없었지만 생각하는 걸 멈출 수는 없었다.

그가 그동안 만났던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을지 궁금했다.

어른스럽고, 차분한 느낌의 성숙한 여자였지 않을까.

그에 비하면 저는 아직 한참이나 부족하게 느껴질까.

그래서 말로는 유혹해보라면서도 막상 선을 넘지 않는 걸까.

머릿속으로 그의 과거의 여자들을 그려보다가 은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너무 과하다, 차은서.’

네가 궁금해 할 부분이 아니라고 애써 선을 긋는데 문득 차창 너머로 자신을 보는 그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건지.”

정혁이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제게 하는 말이 분명해 은서도 덩달아 몸을 바로 하며 정면을 봤다.

“앞으로도 이 시간에 만나죠. 어때요?”

“……네?”

은서가 의외의 말을 들은 사람처럼 정혁을 쳐다봤다.

“저녁때는 나오기 어렵다고 했으니, 주말도 마찬가지일 테고.”

정혁이 덤덤한 투로 말을 이었다.

“오늘, 그 시간에는 학교에 가야 하니 항상 나오는 거 아닌가.”

“…….”

“왜 대답이 없어요. 또 안 볼 생각이었나?”

“아뇨. 그건 아니지만…….”

“아니지만?”

“……회사는요?”

그가 쿡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내 걱정하는 건가?”

“……대표님이시잖아요.”

은서가 입을 비죽이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나 하나 없다고 돌아가지 않을, 그런 회사는 아니거든.”

그의 말끝에선 강한 자신감이 묻어났다.

“그리고.”

정혁의 붉은 입술 끝이 나른하게 올라갔다.

“원래 나쁜 짓은 낮에 하는 거예요.”

속삭이듯 건네는 말에 은서의 고개가 정혁 쪽으로 휙 돌아갔다.

“나……쁜 짓이라뇨.”

뭐라 명명하기 어려운 관계가 된 건 사실이었다. 그렇다 해도 정혁의 입을 통해 확인 사살당하는 건 그리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그럼, 그렇게 허락하는 걸로 알죠.”

은서가 결론을 내려버리는 그를 노려보는 사이, 정혁의 차가 어느새 익숙한 길로 들어섰다.

은서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그는 전에 은서를 내려줬던 곳에 당연하다는 듯 차를 세웠다.

은서가 안전벨트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정혁의 커다란 손이 벨트 끈을 움켜쥐었다.

“?”

은서가 무슨 일이냐는 듯 정혁을 올려다봤다.

“또 봅시다.”

“……네.”

“물론 그 전에 또 보면 더 좋고.”

“…….”

어름거리던 은서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정혁은 그제야 쥐고 있던 벨트 끈을 놓아주었다.

차르륵 소리를 내며 제자리를 찾는 벨트 끈을 보다가 은서는 차에서 내려섰다.

그의 자동차는 그 새벽과 마찬가지로, 같은 자리에 머무르다가 은서가 멀어지고 나서야 떠나갔다.

멀리서 엔진 소리가 들리자 은서는 몸을 돌려 정혁이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자동차가 사라진 자리가 어쩐지 휑해 보였다.

하지만, 다음을 기약하는 그의 말이 귀에서 맴돌았다.

이유 모를 안도감을 느끼며 은서가 다시 집으로 향할 때였다.

“차은서.”

“!”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은서가 가방끈을 꽉 움켜쥐며 몸을 돌렸다.

“……지석아.”

싱글거리는 얼굴을 본 은서는 다리에서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만약, 만약 중훈이었다면…….

속으로 한숨을 쉰 은서는 가방끈을 겨우 놓고 목 뒤를 문질렀다.

차가운 피부 위로 소름이 옅게 돋아나 있었다.

“……괜찮아? 얼굴이 창백해.”

뒤늦게 은서의 얼굴을 본 지석이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레 은서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응, 괜찮아.”

걱정이 가득한 지석의 표정에 은서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데?”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을 구부려 뒤로 숨긴 은서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다른 생각 하다가 놀라서 그래.”

“이런, 미안해.”

“아니야.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은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석의 집은 이곳에서 멀지는 않았지만 자동차로 20분 이상은 가야 하는 곳이었다.

“아.”

지석이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산책 삼아 와 봤어.”

“아.”

“그런데 어디 다녀오는 길이야?”

“아, 응.”

“아까 도서관에도 없던데.”

“그냥 일이 좀 있었어.”

“그렇구나.”

자세히 대답하지 않고 얼버무리는 은서에 지석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걷혔다.

“지금 집에 바로 들어가야 되나? 만난 김에 차 한잔하면 좋은데.”

“아, 지금 시간이…….”

은서가 집 대문을 힐긋 보며 곤란한 얼굴을 했지만, 이대로 물러나기엔 아쉬웠다.

뭔가 그럴듯한 핑계를 찾아내려 지석은 재빨리 머리를 회전시켰다.

“그럼 나 이만 들어갈…….”

은서가 작별을 고하려던 때, 자동차 한 대가 무거운 엔진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은서와 지석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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