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글쎄.”
정혁이 느리게 대답했다.
“하는 거 봐서?”
“일을 여기까지 끌고 와 놓고요?”
튕기는 듯한 그의 태도에 은서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했다.
다가가면 밀어내고, 물러서면 다가오고.
정말이지 그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하긴. 굳이 알 필요도 없긴 하지.’
은서의 표정이 무심해졌다.
그의 마음이 어떤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정혁이 말한 대로 그저 게임일 뿐이다.
자신에겐 누구도 모를 도피처가 필요했고, 정혁은 저와 있는 게 재미있다고 했다.
게다가 두 사람 사이에는 문제가 생길만한 어떠한 위험 요소도 없었다.
그러니 그냥 이 남자와의 시간을 즐기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가 주는 긴장감과 편안함으로 답답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면, 그거면 충분한 관계였다.
“그래요. 아무래도 상관없지, 뭐.”
은서가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신 약속만 잊지 말아 주세요.”
“약속?”
“재미있는 거 가르쳐주겠다면서요.”
대답 대신 그는 입꼬리만 올려붙였다.
“그러죠.”
잠깐의 침묵 끝에 정혁이 빙긋 웃었다.
“나는 재미있는 걸 가르쳐주고.”
“…….”
“차은서 양은 열심히 날 유혹하고.”
정혁의 목소리가 느른하게 흩어졌다.
“그게 우리가 하기로 한 게임이니까.”
앞으로 이어질 둘의 관계를 정의 내리는 그의 말투는 담백했고, 은서는 그 사실이 꽤 마음에 들었다.
적당히 막히는 도로를 달리며 두 사람은 각자 침묵에 젖어 들었다.
은서는 더이상 묻지 않았고, 그도 달리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어디로 가는 걸까?’
은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그가 호텔로 직행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은 있었다. 물론 그가 호텔로 저를 데려간다 해도 상관없었다.
어쨌든 뭘 하든 간에 이 남자가 제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 줄 거라는 기분이 들었다.
“도착했어요.”
20여 분을 달려 그가 차를 세운 곳은 한 고급 펜트하우스 빌라의 주차장이었다.
“어딘지 안 물어보나?”
은서의 안전띠를 풀어주며 장난기 섞인 눈빛을 한 정혁이 은서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어딘지는 별로 안 궁금하고…….”
“하고?”
“뭘 할 걸지는 좀 궁금하네요.”
“흐음.”
은서의 대답에 정혁이 눈꼬리 끝을 살짝 접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
“중독될 만큼 재미있는 건…….”
정혁이 긴 팔을 뻗어 은서가 앉아있던 차 문의 손잡이에 손가락을 걸어 당겼다.
“몸 쓰는 게 많지.”
“…….”
“내려요.”
달칵, 소리가 나며 차 문이 열렸다.
*백팩을 한쪽 어깨에 걸친 지석이 캠퍼스를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자신이 주로 수업을 듣는 경영대와 은서가 있는 미대 건물은 캠퍼스에서도 끝과 끝이라 상당히 멀었다.
공강이면 모를까, 쉬는 시간에 여유 있게 다녀올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오빠! 어디 가세요?”
“어, 안녕.”
“어디 가는 길이에요? 저희랑 커피 한잔하실래요?”
“미안. 할 일이 있어서.”
마주치는 후배들의 권유를 빠르게 거절하며 지석은 걸음을 서둘렀다.
수업이 끝난 은서도 도서관에 갔거나 빈 강의실에 있을 터였다.
복학을 앞둔 은서의 시간표는 당연히 개강 전부터 알아두었다.
은서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시간표를 겹치게 짜느라 수강 신청 변경 기간 동안 머리를 싸매야 했다.
마지막 학기인 은서와 교양 수업 하나라도 같이 듣고 싶어 무던히 노력했다. 결국 학교 커뮤니티에 수업 양도글을 찾아 돈을 주고 산 끝에 겨우 성공할 수 있었다.
[어디냐?]
은서에게 무심한 척 문자를 써 보냈다.
답장을 놓칠세라 지석은 휴대폰을 손에 꼭 쥐고 걸었다.
그러다 문득 웃음이 퍽하고 터졌다.
“나도 참 나다.”
이렇게 차은서 하나에 모든 걸 맞추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더라.
같은 해에 두 달 차이로 태어나 자연스레 소꿉친구로 자랐다.
중학교까지는 같이 다녔지만, 저가 고등학교를 외고로 진학하면서 은서와는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만 했다.
항상 곁에 있는 게 당연했던 은서와 갈라지고 나서야 제 마음속에 은서가 친구 이상으로 자리 잡았다는 걸 깨달았다.
떨어져 있는 내내 은서가 보고 싶었다. 그리웠고, 자꾸만 생각이 났다.
그리고 몇 달 만에 은서를 만났을 때는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하지만 변한 건 저 하나만이 아니었다.
“오랜만이야.”
그리 말하며 반겨주는 은서를 보며 지석은 적잖이 놀랐다.
어렸을 때부터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던 은서는,
항상 톡톡 튀는 생각으로 놀거리를 찾아내며 즐겁게 해주던 그녀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탁구공처럼 발랄하던 그녀는,
해맑게 웃으며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던 그녀는…
웃음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은서는 마치 웃으면 안 되는 사람처럼 그렇게 소리 없는 미소만 지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부모님께 이유를 물어봐도 쉬쉬할 뿐,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무언가 큰 상처를 받은 것만 같아 은서에게 물을 수도 없었다.
민정이야 은서가 원래 차분하고 말 없는 성격인 줄 알지만, 어렸을 때부터 쭉 함께 자란 지석은 은서의 변화가 서글프고 낯설었다.
대학생이 된 은서는, 더욱 말이 없어졌고 늘 집에 얽매였다.
그녀는 더이상 자유롭지 않았고, 예전처럼 어딘가 4차원처럼 통통 튀던 발랄한 이야기도 하지 않게 됐다. 틀에 박힌 사람처럼 그저 학교와 집을 오갈 뿐이었다.
“답장이 없네.”
씁쓸해진 지석이 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지석은 자연스레 민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라면 은서의 행방을 알 터였다.
-은서? 은서 집에 간다고 했는데?
“지금? 지금 이 시간에?”
그럴 리가 없는데.
의아해하면서도 통화를 마친 지석은 문득 마주쳤던 그 남자를 떠올렸다.
그리고 시선은 주지 않으면서도 온 신경은 그에게 쏟고 있던 은서가 생각났다.
지석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차은서가 변했다.
제가 모르는 데서, 또다시.
*“손에 힘을 풀어요.”
“그렇지만…….”
단호한 명령에 은서가 어물거렸다.
“그렇게 꽉 잡고 있으면 움직일 수가 없잖아.”
“안 그러면 놓칠 것 같은걸요.”
정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은서의 손가락을 건드렸다.
“이렇게.”
긴 손가락이 은서의 손가락 하나를 톡 쳐올렸다.
“잡은 듯, 안 잡은 듯…… 이렇게 쥐어요.”
“아.”
손가락이 탁 풀리면서 쥐고 있던 것이 아래로 떨어졌다.
“이거 봐요. 놓친다니까.”
은서가 투덜거리자 정혁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다시 잡으면 되잖아. 이리 와요.”
정혁의 손이 은서의 허리 언저리에 닿았다.
“허리를 좀 더 숙이고, 시선은 앞에 고정하고.”
끙, 앓는 소리를 낸 은서가 눈을 부릅떴다.
그의 손이 닿은 곳이 신경이 쓰여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이렇게 각도를 맞춰서…….”
장막이 덮이듯 커다란 손이 은서의 손을 감싸 쥐었다.
제 위로 그의 상체가 내려오는 게 느껴졌다.
묵직하고 강렬한 우디향이 훅 퍼지면서 머리끝에서부터 온몸으로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등 뒤에 닿을 듯 말듯 아슬아슬한 거리를 둔 그의 존재가 느껴졌다. 몸이 닿는 건 아닐까 저절로 피부와 근육이 움츠러드는 기분이었다.
“…….”
은서는 저절로 허리가 빳빳해지는 걸 느끼며 상체를 꼿꼿하게 폈다.
그의 아래에서 긴장한 기색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머리가 흘러내리네.”
허리 부근에 있던 그의 손이 스치듯 옆구리를 타고 올라왔다.
흘러내린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모아 귀 뒤로 꽂아주는 손길은 사뭇 다정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귓바퀴에 뜨거운 열이 올랐다.
은서는 사람의 몸이 이렇게까지 예민해질 수도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자, 집중해요.”
정혁이 그런 은서의 속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하듯 낮게 채근했다.
“……보고 있어요.”
은서가 반항하듯 대꾸했다.
머리 위에서 살풋 웃는 소리가 들린 듯도 했다.
남자의 존재감을 애써 무시하며 은서는 눈앞의 목표물을 노려보듯이 뚫어져라 응시했다.
“아, 더는 못 하겠어요. 손에 쥐 날 것 같아. 눈도 아프고.”
한참이나 큐대를 쥐고 공을 노려봤더니 손가락도 얼얼하고 눈도 뻑뻑했다.
은서는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며 당구대 옆의 소파에 털썩 눕듯이 앉았다.
“이 정도로 지치면 곤란한데.”
다리를 꼬고 당구대에 기대어 선 정혁이 초크로 큐대 끝을 문지르며 나지막이 타박했다.
은서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죽 소파에 몸을 늘어뜨린 채 정혁을 올려다봤다.
그의 뒤로 독특한 무늬의 나무로 만든 당구대와 종류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주병이 빼곡히 들어찬 장식장이 보였다.
곳곳이 집안을 지탱하는 화려한 대리석 기둥이 주는 위압감은 집주인과 묘하게 비슷했다.
그는 몸짓 하나하나가 마치 새겨 넣은 듯이 우아한 남자였다.
가끔가다 내뱉는 알쏭달쏭한 발언들이나 행동만 아니라면, 그가 주는 위압감에 말 한 마디 나누기도 어려웠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공간만 해도 그랬다.
들어오는 동안 몇 번이나 보안을 거쳐야 했을 만큼 은밀한 곳이었다.
응접실 한가운데 놓인 거라곤 당구대와 커다란 홈시어터 설비, 실내 바가 전부였다.
둘러보지 못한 다른 공간들도 많은 듯했는데 그 안에는 뭐가 있을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그냥, 휴식이 필요할 때 오는 곳이에요.”
이런 커다란 집을 단순히 유흥의 목적으로만 쓰는 남자.
그런 그가 자신과 어울리면서, 그것도 대낮에 한가하게 포켓볼이나 가르쳐주고 있다는 게 이상했다.
“어때요? 할 만했나?”
“……재미있었어요.”
은서가 정혁의 질문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엔 물음표가 가득했다.
적당히 어울리고 나면, 그는 흥미를 잃게 될까?
제 앞에서 그렇게 망나니처럼 까분 사람이 없어서, 그래서 신기했던 걸까?
분명 시작한 건 저이긴 했다. 하지만, 실수를 깨닫고 물러서려는 제게 다가온 건 그였다. 유치하리만큼 책임을 운운하면서.
이 남자가 제게 갖는 관심의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이 관심이 언제까지 지속이 될는지도.
“잘하던데. 처음치고는.”
“그런가요? 까먹진 않겠어요, 처음 해보는 거라.”
“……뭐든, 처음은 그렇지.”
“그렇구나…….”
은서의 입꼬리가 은근히 올라섰다.
그러니 그의 관심이 사라지기 전에, 충분히 즐겨야 했다.
“그런데 그거 아세요?”
몸을 일으킨 은서가 당구대 근처로 다가가며 물었다.
“그날 말이에요, 우리 처음 만난 날 수영장에서.”
“?”
“그게 제 첫 키스였던 거.”
정혁의 몸이 흠칫 굳었다.
미약해도 그가 흔들리는 걸 보는 건 짜릿했다.
“아니, 뭐든 처음은 기억에 많이 남는다길래.”
은서가 어깨를 으쓱하며 그의 반응을 즐기는 동안, 정혁은 천천히 팔짱을 풀었다.
그는 어느새 여유만만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말은 바로 해야지.”
그가 비싯 웃었다.
“그런 건 키스로 치지 않거든.”
그가 느리게, 하지만 숨이 닿을 만큼 가깝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