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15화 (15/82)

15.

정혁을 본 은서의 눈이 삽시간에 굳었다.

탄탄한 몸이 절로 그려지는 정장 차림을 한 그는 학생들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었다.

한쪽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는 그는 마치 광고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비현실적이었다.

“우리 밥 사주셨던, 그분 맞잖아요! 저 얼굴을 어떻게 까먹어.”

“그러네. 현주 만나러 오셨나?”

민정이 수긍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이참, 언니. 현주 언니를 만나러 왜 여길 오겠어요, 이미 졸업하고 없는 사람인데.”

“아, 그러네.”

“여긴 무슨 일일까요? 인사해야 하겠죠?”

그리 묻는 후배는 긴장한 듯하면서도 은근히 설레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볼이 발그레 상기된 게 보였다.

민정이 어떻게 하냐고 묻듯 은서를 쳐다봤지만, 은서는 아무 대답도 해줄 수가 없었다.

정혁을 이런 식으로 다시 마주치는 건 생각조차 못 했던 터라 당혹스럽기만 했다.

은서의 침묵을 동의라고 생각했는지 민정은 은서의 팔짱을 낀 채 후배와 함께 정혁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끌려가듯 따라가면서 은서는 절로 무거워지는 발을 겨우 떼어냈다.

그를 보니 반가운 것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도망가고 싶기도 했다. 정의 내릴 수 없는 복잡한 심경이 혼란하기만 했다.

통화를 하면서 무심코 고개를 돌린 그의 시선이 곧 은서의 일행에게 닿았다.

움찔하는 기색도 없이 자연스레 그는 휴대폰을 귀에서 떼어냈다.

“안녕하세요!”

“…….”

“엊그제, 토요일에 현주 언니 전시회에서 뵀는데. 혹시 기억하세요?”

설핏 미소 지은 정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후배의 얼굴이 한층 더 밝아졌다.

“여기서 또 뵙네요!”

“그래요, 반갑네요.”

전혀 반갑지 않아 보이는 무심한 얼굴로, 그는 예의를 갖췄다.

은서는 볼 안쪽을 지그시 깨물었다.

사무적인 태도인데도 그가 후배의 말에 대꾸해주는 모습을 보는 게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학교에는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만날 사람이 있어서.”

은서는 정혁의 눈길이 제게 닿았다 멀어지는 걸 느꼈다.

정말, 나를 만나러 온 걸까?

문득 아이들 앞에서 제게 아는 체를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도 태연하게 테이블 아래로 제 발을 건드리던 남자였으니까.

은서는 그가 무슨 행동을 해올지 몰라 입안이 마르는 기분이었다.

그의 앞에서만 느낄 수 있는 지독한 긴장감이었다.

“그러시구나.”

후배는 정혁에게 무어라 말을 더 걸고 싶은 눈치였지만, 더이상 이어갈 대화거리가 없는지 입술만 달싹였다.

“그럼.”

그런 그녀에게 정혁이 그만 가보라고 신호를 주듯 짧게 마지막을 고했다.

“네, 그때 밥 사주셔서 감사했어요.”

아쉬움을 진득하니 흘리며 후배가 고개를 숙였다.

은서도 민정과 덩달아 함께 고개를 꾸벅 기울였다.

일행과 함께 뒤를 돌아 멀어질 때까지 정혁은 은서를 잡지 않았다.

“…….”

날 만나러 온 게 아닌가?

묘한 서운함이 일었다.

‘아무래도 나 제정신이 아닌가 봐.’

그를 볼 때마다 다양하게 튀어 오르는 감정을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던 은서는 결국 참지 못하고 뒤를 살짝 돌아봤다.

“!”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은서를 본 그가 싱긋 웃었다.

천천히 주머니에서 손을 빼낸 그가 휴대폰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

은서는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심장이 뛰는 속도가 조금씩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다음 수업이 있는 민정과 헤어진 은서는 목적지를 정하지 못하고 빈 벤치에 앉았다.

수업은 진즉 끝났지만, 원래도 통금시간까지 학교 도서관에서 버티다 집에 가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생각에 정신이 없었다.

아까 그건 전화하라는 뜻이었을까?

전화해? 말아?

두 손으로 휴대폰을 쥔 은서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와 마주치고 엄청난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고작 5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지이잉.

망설이는 그녀의 마음을 알아챈 듯,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 안 할 건가?]

아직 바꾸지 못한 그의 이름이 화면에 떴다.

심장이 마구 쿵덕댔다.

은서는 무언가에 홀린 듯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몇 번의 심호흡 끝에 신호음이 끊겼다.

“……여보세요.”

-또 도망치는 건가 했는데.

그의 목소리에서 미미한 웃음기가 묻어났다.

“무슨 일이세요.”

-말했잖아요. 만나러 왔다고.

“…….”

-전혀 예상 못 했다는 얼굴이네.

말끝에 흐르는 웃음기에 은서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안녕.

길 너머, 은서가 앉은 곳 바로 반대편에 그가 있었다.

건물에 기대어 선 그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은서가 있는 곳으로 다가올 생각은 없는 듯 움직이진 않았다.

“왜…… 오셨는데요?”

은서는 그를 직시하며 물었다.

-그야…….

그의 다음 말이 궁금했다.

-보고 싶으니까?

“…….”

은서가 벌어졌던 입술을 다물었다.

그의 표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흔들림 없이 곧은 시선으로 은서를 응시하고 있었다.

은서는 휴대폰을 쥐지 않은 손바닥을 무릎 위에 문질렀다.

어쩐지 땀이 나는 것 같았다.

“……안 바쁘세요?”

은서는 괜히 말을 돌렸다.

“회사 대표가 이 시간에,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건가요.”

은서의 차분한 물음에 그가 픽 웃는 게 보였다.

그가 휴대폰을 쥔 손을 바꾸며 고개를 기울였다.

-어쩌겠어요, 기다려도 연락이 오지 않을 것 같은데.

“…….”

-아쉬운 사람이 와야지. 안 그래요?

은서는 무의식에 그가 있는 곳과의 거리를 가늠해보았다.

마음먹고 일어서 몇 걸음만 옮기면 닿을, 딱 그만큼의 거리였다.

“……한가하신가 봐요.”

-그럴 리가.

어이없다는 듯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맞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건 은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건넨 명함에 찍혀 있던 회사의 이름을 본 이후로, 뉴스 기사에서 그의 회사가 종종 언급되는 걸 봤다.

몰랐으면 모를까, 알게 되자 더 눈에 잘 들어오고 귀에 들렸다.

그렇게 큰 회사의 대표라면, 분명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것이다.

그런 사람이, 평일 낮에 자신을 찾아 학교까지 왔다.

저를 쫓아서.

그 사실이 묘한 흥분을 일으켰다.

어쩌면 저 남자는, 진심으로 이 시간을 즐기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

-반겨줄 건가요?

은서는 인정하기로 했다.

그가 주는 긴장감이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는 것을.

그의 존재가 모든 걸 잊게 해줄 만큼 강렬하다는 것을.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그를 만난 이래,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를 생각했다는 것을.

“네.”

은서는 스르르 몸을 일으켰다.

“반갑네요.”

그리고 그의 시선에 화답하듯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생각보다, 많이.”

*“…….”

펜을 쥔 민정의 손이 종이 위에 무의미한 낙서를 끄적댔다.

수업을 듣고 있지만,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뭐지, 뭘까.’

민정이 미간을 좁혔다.

현주의 전시회에 갔던 날 본 지석의 표정이 쉬이 잊히지 않았다.

평소에도 종종 은서를 핑계 삼아 지석에게 연락하곤 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은서와 같이 있다는 걸 알면, 당연히 그가 관심을 보일 걸 알았기 때문에.

역시나 그는 마침 근처였다며 전시회장에 왔다. 물론 거짓말이었겠지만.

그랬는데…… 현주 사촌오빠의 친구라던. 그 남자를 보는 지석의 눈빛이 상당히 날카로웠다.

처음에는 은서가 낯선 남자들과 있는 게 싫어 그러나 싶었는데, 유독 한 남자에게만 그런 것 같았다.

‘워낙 잘생겨서? 그래서 괜히?’

민정은 자신의 추측이 우스워 킥킥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나란히 선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을 때,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신기할 정도로 두 사람은 정말 잘 어울렸다.

친구라서가 아니라, 은서는 객관적인 눈으로 봐도 참 예뻤다.

늘씬한 몸매에 하얀 피부. 청순함이 물씬 풍기는 이목구비에 맞춘 듯 잘 어울리는 비단결처럼 풍성한 긴 머리.

누구나 돌아볼 만큼 예쁜 아이.

위압감이 넘쳐흐르는 냉미남 옆에서도 그린 듯 잘 어울리던 은서의 모습이 떠올랐다.

‘에휴.’

그러니 지석도 은서를 좋아하는 걸 테지.

어릴 때부터 그렇게 예쁜 아이를 보면서 자랐는데 다른 여자가 눈에 차겠어?

민정은 날카로운 펜 끝으로 종이 위를 북북 그었다.

입 안이 떫은 감을 씹은 것처럼 씁쓸했다.

“흠.”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민정은 캠퍼스에서 마주쳤던 정혁을 떠올렸다.

‘그 사람은 누굴 만나러 온 걸까.’

괜한 호기심이 샘솟았다.

‘은서는 도서관에 있으려나?’

수업은 끝났어도 늘 그랬듯 도서관에 있지 않을까 싶었다.

[어디야?]

민정은 교수님의 눈치를 보며 빠르게 문자를 톡톡 두들겼다.

은서에게서 답장이 온 건 꽤 시간이 흐른 후였다.

[집에 가려고.]

집에 간다고?

눈을 찌푸린 민정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2시.

아직 그녀의 통금 시간까지는 5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벌써?]

민정은 곧장 답장을 보냈다.

하지만 은서에게서는 더이상 답장이 없었다.

“…….”

뭔가 이상한데.

민정은 의구심의 실마리를 찾으려 생각에 빠져들었다.

*“앞으로는 학교로 오지 않으셔도 돼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학교 밖에서 정혁의 차에 오른 은서가 안전벨트를 매며 말했다.

눈으로 의미를 묻는 그에게 은서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볼 거면 연락하고 만나자는 뜻이에요.”

차를 출발시키기 전, 정혁은 은서의 표정을 차분히 살폈다.

무언가를 숨기는 것 같진 않았다. 색채 없는 표정이긴 해도 이건 첫날 그녀가 보였던, 진짜 얼굴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계속 도망칠 것 같더니, 갑자기 왜?”

시간이 더 필요할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그녀의 태세 전환이 빨랐다.

꽤 숨으려 들 줄 알았더니.

“학교까지 찾아오신 분이 할 말은 아니지 않아요?”

톡 쏘는 말에 정혁이 웃음을 삼켰다.

확실히, 이쪽의 차은서가 더 마음에 들었다.

“아하. 그러니까 내가 몰아붙여서?”

“나더러 유혹해보라고 하더니, 오히려 하정혁 씨가 유혹하고 있는 것 같아요.”

“뭐,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럼 지금은 넘어올 건가요?”

“?”

“내가 유혹하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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