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의원님, 요즘 많이 바쁘신 것 같습니다.”
“네, 총선에 대선까지 있고 하다 보니 아무래도 분위기가 어수선합니다.”
교회 꼭대기 층, 바깥의 전망이 한눈에 들어오는 순규의 사무실. 인적 드문 곳에는 두 사람과 중훈의 보좌관만이 자리했다.
“민생을 돌본다는 게 참 쉽지 않은 일이죠?”
“하하. 그저 노력하는 거지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고급 찻잔이 놓인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순규와 중훈이 의례적인 안부를 주고받았다.
“참. 아드님이 최근에 취업했다지요?”
“거, 민망스럽습니다. 공부만 해온 녀석이라 제 앞가림이나 할까 싶었는데 어떻게 취업은 또 하더군요.”
순규가 겸손한 척 빼자 중훈이 인자하게 웃었다.
“그 무슨 말씀을. 우리나라 최고 대학을 나와서, 로스쿨도 수석으로 졸업한 인재 아닙니까. 재유의 고문 변호사라니, 훌륭합니다.”
“부끄럽습니다, 의원님.”
“한때 또 제가 법조계에 몸담고 있었으니, 따지고 보면 제 후배 아니겠습니까.”
“그저 좋게 봐주십시오.”
두 사람이 동시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껄껄거렸다.
순규가 중훈의 눈치를 힐끗 살핀 뒤 두 손을 배 위에 얹었다.
“저는 이제 아들 녀석 결혼만 시키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벌써 보내시려고요?”
“올해 나이가 벌써 아홉입니다, 아홉. 예전 같았으면 진즉 장가가서 손주도 안겨줬을 나이 아닙니까.”
“하하, 그건 그렇지요.”
“공부만 한 녀석이라 그쪽 방면으로는 영 숙맥이 따로 없지 뭡니까.”
“뭘 걱정이십니까. 목사님 닮았으면 인물도 훤할 것이고, 건실한 청년이니 어느 집에서 안 반기겠습니까.”
중훈이 손사래를 치며 그의 아들을 치켜세웠다.
“어휴, 자식 걱정하는 목사라고 흉보지만 말아주십시오. 의원님.”
“자식 걱정하는 마음이야 모두가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중훈이 습관이 된 의식적인 미소를 얼굴에 피워냈다.
“역시 우리 의원님, 참 배려 넘치십니다.”
순규가 배를 퉁퉁 두들기며 웃다가 슥 상체를 숙였다.
“그나저나……. 요즘 당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순규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밖에서 기다리게.”
“네, 의원님.”
중훈이 뒤편에 서 있던 보좌관에게 눈짓하자 그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문이 철컥 소리를 내며 닫혔다.
다른 이들 모두를 배제한, 단둘만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댁으로 가시겠습니까?”
“그래.”
차에 오른 중훈이 재킷 단추를 풀며 후, 숨을 길게 뱉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꿍꿍이를 제각기 품고 있는 여우들 사이에서 표정을 숨긴 채 속내를 파악하는 건 꽤 피로한 일이었다.
“참.”
“네, 의원님.”
차를 출발시킨 보좌관이 룸미러로 중훈을 힐끗 보며 답했다.
“최 목사 아들 녀석 있지.”
“네.”
“좀 알아봐, 어떤 친구인가.”
“네, 알겠습니다.”
늘상 있는 일이기에 중훈의 목소리는 심상했고, 대답하는 보좌관도 덤덤했다.
“흐흠.”
중훈이 손가락으로 무릎을 톡톡 두들겼다.
“같은 배를 탔으니, 조금 더 확실하게 붙잡아두는 것도 괜찮지.”
중훈의 입술이 삐뚜름하게 비틀렸다.
*쾅.
자동차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정혁은 재킷 단추를 잠그며 서늘한 얼굴로 하늘을 훑었다.
무거운 마음과는 다르게 가을 하늘은 더럽게도 높고 푸르렀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 정혁이 시선을 조금 내렸다.
청명한 하늘 아래, 낙엽이 깔리기 시작한 오솔길이 보였다.
정혁은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10분쯤 걸었을까.
목적지에 이르자 먼저 와 있는 손님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아직 그리 굵지 않은 나무에 한 손을 얹고 있었다.
정혁은 조용히 남자의 옆으로 가 섰다.
“얼굴 좀 자주 비춰.”
옆에 선 이를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아는 것처럼 남자가 꺼낸 첫마디는 잔소리였다.
“지금도 자주 뵙는 것 같은데요.”
정혁이 무던하게 대꾸했다.
“이런 날 아니면 코빼기도 안 비추면서 큰 소리는.”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센 남자는 그제야 나무에서 손을 떼고는 아래위로 새까만 정장을 갖춰 입은 정혁을 흘겨보았다.
그의 하나뿐인 조카는 어찌 나날이 갈수록 무뚝뚝함만 더해가는 것 같았다.
물론 어릴 때도 살가운 녀석은 아니긴 했지만.
“벌써 9년인가.”
윤수가 이제 막 제 키만 해진 나무를 보며 읊조렸다.
“…….”
윤수의 쓸쓸한 목소리를 들으며 정혁은 굳이 답하지 않았다.
일 년에 한 번 돌아오는 기일이었다.
지금 그가 누군가를 떠올리려 기억을 되짚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혁은 한날한시에 떠나버린 제 부모를, 윤수는 유일한 혈육이었던 제 여동생과 그 남편을 동시에 떠올려 추억했다.
“요즘 회사는 어때.”
함께 오솔길을 걸어 내려오는 길.
뒷짐을 진 윤수가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똑같습니다.”
“내 밑으로 들어올 생각은 여전히 없고?”
“…….”
“녀석, 고집은.”
“제가 지금 이 자리를 지키는 게, 여러모로 좋은 겁니다.”
“그건 네 생각일 뿐이지. 지금이야 아직 내가 사지 멀쩡하니까 내버려 두는 거라는 것만 알아두거라.”
협박에 가까운 통보에도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정혁에 윤수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하여간, 고집은 제 엄마를 닮았지.”
나이를 먹을수록 외모는 제 아비를 더 닮아가고 있긴 했지만, 까칠한 건 아무리 봐도 제 어미와 똑같았다.
“……그렇죠.”
정혁의 입꼬리에 희미하게 웃음이 걸렸다.
윤수가 그런 정혁을 보며 쓰라린 마음을 달랬다.
저리 무딘 녀석이어도 가족에 대한 정이 남달랐다는 건 알고 있었다.
여동생 부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정혁이 얼마나 무너졌었는지,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때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어느새 길의 끝에 이르자 하얀 벽돌로 쌓은 2층짜리 예쁜 별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여기가 너무 좋아, 오빠. 나중에 우리 정혁이 장가가면 손주도 태어날 거 아냐. 예쁜 며느리랑 차 마시면서 손주 녀석이 여기서 뛰어노는 거 상상만 해도 행복해.”
여동생이 특히나 아끼고 좋아해서 가족들이 즐겨 찾던 별장이었다.
선산 대신 이곳에 수목장한 것도 정혁의 뜻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슬슬 결혼도 해야지.”
윤수가 잔소리에 시동을 걸었다.
어느새 한 회사를 번듯하게 키울 만큼 자리를 잡았으니, 따뜻한 가정을 꾸리면 참 좋을 것 같았다.
여동생은 제 바람을 눈으로 볼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윤수는 그녀의 바람을 대신해서라도 이뤄주고 싶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정혁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누가 널 잡아다 바치기라도 하겠다든?”
다시 딱딱해진 정혁을 보며 윤수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결혼 이야기만 나오면 정색을 하는 것이 걱정스러웠다.
“만나는 아가씨도 없고?”
“…….”
정혁은 문득 은서의 새하얀 얼굴을 떠올렸다.
여기서 왜 그녀가 떠올랐는지는 저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회사 경영을 하지 말고 차라리 도를 닦는 게 낫겠구나.”
정혁이 아무런 답이 없자 윤수가 혀를 끌끌 찼다.
“이 녀석아, 내가 네 부모 볼 면목은 만들어줘야지.”
윤수가 답답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회사를 물려준대도 싫다, 회사 자리 잡는데 도와주겠다는데도 싫다, 좋은 아가씨를 소개해준대도 싫다. 무슨 젊은 녀석이 그리 뻣뻣한지.”
윤수는 저보다 한 뼘은 더 큰 조카를 올려다보며 못마땅한 듯 눈을 찡그렸다.
고집스레 앙다문 입술을 보니 더 말을 보태봐야 귓등으로도 들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 말해봐야 내 입만 아프지.”
윤수가 포기했다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종종 집에 와. 네 외숙모가 너 보고 싶어 해.”
“네.”
“우리가 자식이 없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네 외숙모는 널 아들처럼 아껴. 그건 너도 알겠지.”
“…….”
“바쁜 건 알지만, 한 번씩 얼굴 비추고 그러면 좋겠구나.”
“죄송합니다.”
한결 차분해진 정혁의 말투에 윤수가 픽 웃었다.
그래도 제 아비 피가 섞여 그런지 속은 정 많고 따뜻한 녀석인 건 분명했다.
“그래, 이제 회사로 들어갈 거냐?”
“네.”
“젊은 녀석이 너무 일만 하고 사는 것도 안 좋아. 가끔 숨도 돌리고 그래야지.”
“네.”
윤수가 정혁의 어깨를 한번 쓰다듬고는 기사가 열어준 차 뒷좌석에 올랐다.
“들어가세요.”
“그래.”
떠나가는 자동차를 묵묵히 보던 정혁이 넥타이를 조금 끌어 내렸다.
항상 이 날이면 떠오르던 아이.
지금은 그 아이를 직접 볼 수 있었다.
“……숨 돌리러 가볼까.”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 정혁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방금 그 남자 너무 멋있지 않아?”
“와, 최고였어. 슈트핏 봤어? 미쳤나 봐!”
“학생 같진 않은데 교수님인가?”
“교수라고 하기엔 어려 보이지 않아?”
“왜 그런 거 있잖아, 가끔 천재라서 박사까지 파바박해서 오는 교수님들.”
“그런 건가? 아 저런 사람이 우리 교수님이면 좋겠다.”
지나가는 여학생들마다 호들갑 떠는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뭐야, 뭔데 저래?”
대화 내용을 주워들은 민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글쎄.”
은서가 관심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언니!”
민정과 막 강의동을 빠져나가던 때였다.
과 후배 하나가 요란하게 뛰어와 두 사람의 앞에 서서 숨을 골랐다.
“뭐가 이리 급해? 그러다 숨넘어가겠다.”
“나, 방금, 저기서 봤는데……!”
“뭘 봤는데?”
“진짜 잘생긴 사람이…….”
“응?”
“왜 그때, 우리 본 사람 있잖아요!”
숨을 헐떡이면서도 후배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잘생긴……?
은서는 순간 날개뼈 부근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설마…….
“현주 언니 전시회 때 본 사람이요! 그 키 크고 엄청 냉미남이었던……!”
“그래?”
설마 아닐 거야.
은서가 선득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깊게 호흡했다.
“아, 저기 있다!”
“!”
하지만 노력이 무색하게도 후배가 가리키는 곳을 본 은서의 심장은 쿵 소리를 내며 아래로 추락했다.
저 사람이 여길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