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13화 (13/82)

13.

환하게 웃던 지석의 얼굴이 대번에 구겨졌다.

정혁은 표정 변화가 급격히 이루어지는 지석의 얼굴을 느리게 훑었다.

아직 어린 태가 나는 남자는 가시를 바짝 세운 채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지석아.”

‘아하.’

남자를 부르는 은서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혁은 이유를 알아차렸다.

은서의 부름에 반응하듯 남자의 표정이 밝아진 탓이었다.

하지만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은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을 마주한 표정이었다.

“네가 여긴 웬일이야?”

은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 하자 지석이 급히 문을 손으로 막았다.

“일단 내려.”

“어, 응.”

은서가 얼떨결에 발을 앞으로 옮기며 지석에게 한 걸음 다가서자 지석이 옆으로 비켜서며 길을 터주었다.

그러면서도 지석의 시선은 여유롭게 은서의 뒤를 따라 나오는 정혁에게 향해 있었다.

은서와 정혁을 번갈아 볼 때마다 지석의 표정이 천국과 지옥을 오가듯 실시간으로 바뀌었다.

‘흐응, 재미있네.’

누가 봐도 적개심이 팽배한 눈빛에 정혁은 웃음을 삼켰다.

‘순정파 기사님이라.’

정혁은 저 어린 녀석이 저와 은서를 어떤 사이로 착각하고 저런 눈을 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은서의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저렇게 드러내는 걸 보니 녀석이 꽤 오래 맘고생 했으리라 짐작이 됐다.

“내가 연락했어!”

민정이 지석의 옆에 나란히 서며 활짝 웃었다.

“지석이도 마침 이 근처라고 하더라고.”

“아, 그랬어?”

“과제 때문에 연락하다가.”

두 사람이 따로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은 은서에게 크게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지석은 변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너흰 여기서 뭐해?”

지석은 정혁을 뚫어져라 보며 물었다.

질문의 속뜻은 왜 은서가 저 남자와 함께 있는 걸까를 묻는 거였다.

심지어 민정도 같이.

“아, 밥 먹었어. 오늘 전시회한 친구의 사촌 오빠랑 친구분들을 마주쳐서, 우리 다 같이 밥을 사주셨거든.”

해맑게 설명하는 민정은 정혁과 은서의 접점을 모르는 눈치였다.

두 사람, 원래 알던 사이인가?

지석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뭔가 알 수 없는 찝찝함이 아랫배에 자리 잡았다.

“뭐야, 왜 이렇게 늦게 내려와!”

조금 떨어져 있던 현주가 투덜거리며 다가왔다.

“이대로 헤어지기 아쉽잖아. 한잔하러 갈까? 은서 너도 같이 가자! 지금 온 그쪽 친구도 같이.”

현주가 지석조차도 처음부터 일행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레 합류를 권했다.

물러서 있던 정혁은 방관자처럼 이들의 대화를 지켜봤다.

순정파 기사는 상황을 파악하려는 건지 연신 바쁘게 눈을 굴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뒤에 있는 정혁을 신경 쓰듯, 은서와 정혁의 사이를 슬쩍 가로막으며 자리를 잡고 섰다.

‘감은 좋네.’

노골적인 경계에 정혁은 픽 웃음을 흘렸다.

이거야 원, 마치 순진한 기사님에게서 공주님을 빼앗으려는 악당이 된 기분이었다.

‘그래, 잘 지켜봐.’

느긋하게 입꼬리를 올린 정혁이 격려하듯 지석의 뒷모습을 보며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어 섰다.

“갈 거야? 어떻게 할 거야?”

“미안, 난 이제 집에 가야 해.”

현주의 재촉에 은서가 미안해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뭐야, 오늘 오랜만에 날인가 싶었더니.”

현주가 실망한 기색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어쩔 수 없지. 그래, 잘 가. 오늘 전시회 와줘서 고마웠어.”

그러면서도 익숙한 듯 더 권하지 않고 손을 휘휘 흔들었다.

“응. 잘 봤어, 전시회 정말 좋았어.”

“네 입에서 그런 소리 들으니 기분은 좋네. 그럼 또 봐.”

“집에 가는 거지?”

대화가 마무리되는 것 같자 지석이 반색하며 은서를 쳐다봤다.

“같이 가, 데려다줄게.”

지석이 자연스레 은서의 팔을 잡아당겼다.

‘아.’

은서는 어쩐지 뒤에 서 있을 정혁이 신경 쓰여 잡혔던 팔을 슬쩍 빼냈다.

은서의 무의식적인 행동에 상처를 받은 듯 지석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런 변화를 눈치챈 건 줄곧 지석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민정뿐이었다.

‘집에 데려다준다고 했었는데.’

은서는 정작 정혁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었다.

은서는 고개만 살짝 돌려 정혁을 올려다봤다.

그와 함께 집에 갈 생각도 없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더더욱 불가능했다.

“…….”

그냥 갈까 잠시 고민하던 은서는 말없이 고개를 꾸벅 숙여 정혁에게 인사를 고했다.

아무 표정 없이 서 있던 정혁이 성큼 다가온 건, 은서가 막 고개를 들려던 때였다.

“!”

“실례.”

그의 긴 손가락이 볼을 스치듯 문지르고 지나갔다.

은서의 동공이 커다랗게 팽창했다.

은서는 무의식에 제 볼을 감쌌다. 그가 닿았던 자리가 붉게 물드는 것 같았다.

“뭐가 묻었길래.”

정혁은 입술을 옴짝거리는 은서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거짓말이었다.

묻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은서가 이대로 저를 두고, 그것도 다른 남자와 함께 가버릴 걸 예상했기에 작은 심술을 부렸을 뿐이었다.

“잘 가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하지만, 정혁은 순순히 은서를 보내주기로 마음먹었다.

잔뜩 날을 세운 어린 녀석의 앞에서 제 손이 닿았을 때.

인형같이 고고하던 얼굴이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흔들리는 것이 제법 마음에 들었으므로.

*“이렇게 셋이 모였는데 그냥 집에 가려니까 아쉽긴 하다. 그렇지?”

어딘가 모르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민정이 동의를 구하며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원래도 조용하고 차분한 편이던 은서는 혼이 나간 사람처럼 유독 멍한 듯 보였고, 지석은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 계속 어두운 얼굴이었다.

“그런데 아까 그 사람들 말이야.”

지석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 사람들? 누구?”

드디어 입을 연 지석이 반가웠던 민정이 과하게 반응했다.

“같이 밥 먹었다던 사람들.”

“아아. 그 사람들이 왜?”

“오늘 처음 본 거야?”

민정을 보면서도 지석은 은서의 반응을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은서는 대화에 참여하지 않을 것처럼 무심한 얼굴이었다.

“응, 당연히 오늘 처음 봤지.”

곧장 대답하는 민정과 달리 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서, 너는?”

지석이 조심스레 물었다.

뭐라고 대답할까 너는.

은서의 눈동자가 빠르게 옆으로 향했다 제자리를 찾았다.

“……처음 봤어.”

거짓말.

은서가, 제게 거짓말을 했다.

어째서? 왜? 그 남자가 대체 뭐길래.

지석의 턱 아래 힘줄이 솟아올랐다.

“그렇구나.”

지석은 주먹을 말아쥐면서 가까스로 웃었다.

그 남자와 무슨 사이야?

당장 따져 묻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제게 그럴 권리가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았다.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나마 친구라는 편리한 명목하에 곁을 지키는 것뿐이었다.

“아저씨는? 아저씨는 오늘 집에 계셔?”

“아아…… 외부 일정이 있으셔서.”

“아저씨 뵌 지도 오래됐네. 그러고 보니 너희 집 자체를 놀러 가 본 게 오래된 것 같다.”

“그러게.”

은서가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는 중훈의 회사 동료나 가까운 지인들이 종종 찾아오곤 했었다.

수영이 떠나고 경미가 온 이후로 집에 손님이 찾아오는 일은 더이상 없었다.

“한 번 놀러 갈까? 어때?”

지석이 민정의 의사를 물었다.

“어어?”

“얘네 집 한 번 놀러 가자고.”

“아아, 좋지…….”

민정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뺏겼네?”

“…….”

“그것도 한참이나 어린 녀석한테.”

도훈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로 정혁을 슬슬 긁었다.

달라붙는 현주를 겨우 떼어내고 정혁을 따라 나온 그는 빙글거리면서 정혁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뺏기다니.”

“그럼 아니라고?”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는데.”

정혁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의 심상한 반응에 오히려 도훈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럼 네 사람으로 만들 생각은 있고?”

“글쎄.”

떠보듯 물었지만 정혁은 별 반응이 없었다.

이상한데.

도훈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정혁이 그 아이에게 큰 관심을 보이는 건 맞았다.

정혁의 눈동자가 꽤 집요하게 그녀를 좇고 있었으니까.

“여자로 보이긴 하고?”

“남자는 아니잖아?”

정혁이 별 쓸데없는 소리를 다 한다는 듯 말을 자르고는 차 문을 열었다.

시동을 켜던 정혁이 입꼬리를 당겼다.

내 사람으로 만드는 건 모르겠고, 일단 곁에 머물 생각이었다.

차은서가 필요하다면, 어떤 모습으로든 얼마든지.

*일요일 오전, 강남의 한 대형 교회에 커다란 세단들이 하나둘 주차를 마쳤다.

“의원님, 도착했습니다.”

“수고했어.”

보좌관의 안내에 중훈이 풀어 두었던 정장 재킷 단추를 채웠다.

후다닥 보닛을 돌아온 보좌관이 차 뒷문을 열어주고 나서야 중훈이 발을 내렸다.

줄줄이 서 있는 차량에서 내리는 사람들은 전부 비슷한 복장과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아이고, 이게 누구신가.”

“의원님, 나오셨습니까.”

앞서 내렸던 장년의 남자가 중훈에게 아는 체를 하며 다가오자 중훈이 적당히 허리를 숙이며 반겼다.

같은 당 소속으로 같은 정치 노선을 밟고 있는 5선 의원이었다.

오랜 연차만큼이나 능구렁이 같은 영감이라 썩 반가운 건 아니었지만, 척을 지어 좋을 건 없으니 중훈은 늘 그를 깍듯이 대했다.

이 남자뿐만이 아니었다.

온갖 술수가 난무하는 정치계에서 중훈은 가급적 적을 만들지 않았다.

표면적으로 적대적인 당 소속 의원들과도 두루두루 좋은 관계를 유지할 정도였다.

“들어가시지요.”

중훈이 예의 바르게 손을 앞으로 뻗으며 걸음을 옮겼다.

정권이 바뀐 뒤 야당으로 밀려나며 한때 교회 분위기가 안 좋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이었다.

청와대와 집권당에 대한 지지도는 점점 낮아지고 있었고, 이는 중훈이 속한 한우리당에 큰 기회였다.

차기 대선과 총선을 기대하며 사기는 충분히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그 태풍 속 핵심 인물들이 전부 이 교회에 모여 있었다.

한국대.

서울외고.

희망교회.

유명 여배우 한서희의 이름을 따 불리는 세력이었다.

검사 생활을 하다 정치에 뜻을 갖게 된 후 학교 선배들을 따라 일부러 다니기 시작한 교회였다.

“의원님들, 오셨군요.”

“안녕하십니까.”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사람 좋은 미소를 장착한 순규가 교회당 입구에서 그들을 맞았다.

교회의 담임목사인 그는 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의 구심점이었다.

수영이 떠나고 힘들어하던 시기에 선배의 소개로 이곳에 온 중훈에게 먼저 손을 내민 것도 바로 순규였다.

“목사님, 오늘도 좋은 말씀 기대하겠습니다.”

중훈은 최대한 정중한 미소를 만들어내며 순규와 눈을 맞췄다.

“예, 또 다른 이야기는 예배 후에 나누시죠.”

순규가 다정한 몸짓으로 중훈의 손을 마주 잡았다.

“네, 그러시죠.”

마주 잡은 손이 끈끈하게 얽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