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정혁이 다가왔던 거리만큼 다시 뒤로 물러나며 멀어졌다.
위협적으로 속을 파고들던 그의 눈빛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해져 있었다.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간 자리가 홧홧하면서 휑했다. 그게 참을 수 없어 은서는 제 손으로 그 부근을 감싸 쥐었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걸까, 하고 궁금해하는 얼굴이네.”
그가 주머니에 손을 밀어 넣으며 말했다.
아니라고 부정은 못 하겠다.
은서는 혼란스러웠다.
정혁이 제게 뭘 원하는 건지 알 것 같으면서도 전혀 모르겠다.
어린 애의 철없는 유혹에 불쾌해하는 줄 알았는데 그의 말을 들어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이 남자는 정말 제가 자신을 유혹해주기를 바라는 걸까?
그럴 거면 처음엔 왜 거절한 거지?
생각이 바뀐 거라면, 그 이유는 또 뭐고?
날……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은서는 입술 끝을 깨물었다.
“계속 고민하고, 고민해 봐요. 그러다 보면 알 수 있겠지.”
정혁은 복잡한 빛을 띤 갈색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빙긋 웃었다.
“내 생각 많이 해요.”
긴 다리로 옆을 성큼 지나치던 그가 격려하듯 커다란 손으로 은서의 어깨를 꾹 누르고 떠나갔다.
그가 떠나간 자리에는 그의 향기만이 짙게 남아 있었다.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희미해지고 나서야 은서는 무너지듯 털썩 주저앉았다.
정말이지, 사람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드는 남자였다.
자기 생각을 많이 하라니. 지금도 자꾸만 당신 생각이 나는데.
“하아, 정말 모르겠다.”
고개를 내저은 은서는 훅하고 달큰한 숨을 뱉어냈다.
*“전시회 주인공이 이렇게 자리를 비워도 되는 거예요?”
“괜찮아! 난 뭐 하루종일 밥도 안 먹고 거기 지키니?”
아이들의 걱정에 현주가 꺄르륵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우리야 밥도 얻어먹고 좋긴 하지만…….”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이면서도 아이들은 연신 함께 걷는 남자들을 힐끔거렸다.
아무리 방탕하다 한들 노는 클래스가 남다른 건 알고 있지만, 현주의 지인이라는 남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하나같이 다 눈에 띄었다.
인물, 키, 체격. 뭐 하나 빠지는 거 없이 완벽해 보이는 남자가 셋이나 있었다.
거기에다 돈도 많겠지?
다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지만 같은 생각을 했다.
평생에 저런 남자를 마주할 기회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현실감 없는 존재들이었다. 저런 남자들과 어울리는 현주에게 새삼 경외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민정의 관심은 다른 데 있었다.
“너 진짜 괜찮아?”
민정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조용히 속삭였다.
작게 한숨을 쉰 은서가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을 먹자는 현주의 제안에 집에 가봐야 한다며 거절을 했더니, 현주는 그럼 이른 저녁을 먹겠다며 전시회장을 박차고 나왔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며 만류했으나 현주의 고집은 막무가내였다.
덩달아 같이 먹고 가자며 아기 새들처럼 매달리는 아이들 때문에 끝끝내 거절하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중훈의 일정을 확인한 경미가 적당히 유예의 시간을 줬다는 점이었다.
“어쩔 수 없지. 빨리 먹고 가면 돼.”
은서가 민정을 안심시키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밥을 먹고 곧장 집에 가면 얼추 괜찮을 것 같았다.
뒤에서 걸어오고 있는 정혁이 신경이 쓰이긴 하지만,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 그가 아는 체해올 것 같지도 않았고.
“은서, 이리로 와.”
도훈의 앞자리를 차지한 현주가 제 옆을 툭툭 쳤다.
“아니, 난…….”
“이쪽에 앉으세요.”
바로 앞에 정혁이 있는 걸 본 은서가 거절하려 하자 도훈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최대한 정혁과 먼 곳에 앉으려 했으나 바로 옆 테이블에는 이미 현우와 다른 아이들이 자리를 잡은 후였다.
“뭐 해, 얼른 와.”
현주와 한 칸 떨어져 앉은 민정이 눈짓하자 현주가 후다닥 일어서며 은서가 들어갈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얼결에 현주와 민정의 사이에 앉은 은서는 결국 정혁과 마주하게 되어 버렸다.
“말했나? 난 현주 사촌 오빠예요.”
“어쩐지! 은근히 닮았다 했어요!”
“현주 쟤랑 왜 놀아줘요, 쟤 되게 피곤할 텐데.”
정혁의 옆에 앉은 현우는 어느새 그쪽 테이블의 대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화기애애한 옆 테이블과 달리 은서가 앉은 테이블은 조용했다.
오로지 꽃받침을 한 현주만이 도훈에게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을 보내며 흐뭇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흐흠.”
헛기침한 도훈이 애써 현주를 외면하며 은서를 바라봤다.
“만나서 반가워요.”
“……네, 안녕하세요.”
은서가 현주를 슬쩍 본 뒤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빠, 은서한테 관심 가지면 안 돼.”
현주가 검지를 휘휘 저으며 경고하듯 말했다.
“야, 넌…….”
도훈이 당황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반응이 재미있는지 현주가 깔깔대는 사이, 금방 음식이 서빙되었다.
“많이 먹어, 얘들아. 이분 돈 많으시니까.”
현주가 정혁을 가리키자 아이들이 잘 먹겠다며 한 마디씩을 보탰다.
눈빛으로 대강 대꾸하는 정혁에 움찔한 아이들은 서둘러 현우에게로 다시 관심을 옮겨갔다.
하긴, 뿜어내는 위압감이 어마어마한 사람이었다. 은서는 그런 상황을 보며 속으로 수긍했다.
앞에 앉은 남자의 존재감을 잊으려 노력하며 첫술을 뜰 때였다.
툭.
누군가 발끝을 툭 치는 통에 은서가 멈칫거렸다.
테이블 밑에서 다리가 엉킨 건가 싶어 은서는 무심코 발을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툭.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가려는데 누군가 또다시 발끝을 건드렸다.
“!”
느리게 다리 사이로 파고들어 온 발목이 은서의 발목을 쓰다듬듯 건드리고 지나갔다.
실수가 아니었다.
노골적인 터치였다.
은서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천천히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겼다.
은서는 눈동자만 올려 눈앞의 남자를 살폈다.
그는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느긋하고 우아하게 식사하고 있었다.
옆 테이블의 시끄러움도 다른 세상의 일인마냥 무감한 표정으로.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발이 들어온 각도를 생각했을 때, 정혁 말고는 다른 이를 생각할 수가 없었다.
여전히 은서의 가느다란 발목은 나무토막처럼 단단한 것에 맞닿아 있는 채였다.
티 나지 않게 움직여 다리를 다른 쪽으로 빼 보아도 도망칠 곳이 없는 것처럼 금방 그의 다리가 닿았다.
발을 조금씩 안쪽으로 옮기자 따라오듯 그의 다리도 조금씩 움직였다.
다리를 휙 끌어오려던 은서는 행동을 멈췄다.
테이블이 붙어 있어 지금은 보이진 않겠지만, 지나치게 안쪽으로 들어오면 자칫하다가 현주나 민정의 눈에 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망설이던 은서는 안으로 당겼던 발을 앞으로 쭉 뻗었다.
그러자 제 쪽으로 길게 뻗어진 다리에 엉키듯 종아리가 부딪쳤다.
“쿡.”
희미하게 터져 나온 웃음소리를 들은 은서의 귀가 붉어졌다.
‘지금 웃은 거야?’
그가 장난을 치고 있다는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왜 이래요?’
은서가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자 그가 느리게 음식물을 씹으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뭘?’
어깨를 으쓱한 그는 피해 볼 테면 피해 보라는 듯, 태연자약한 태도였다.
그의 긴 다리가 아예 은서의 두 다리를 제 사이에 두고 가뒀다.
슬쩍 발에 힘을 줘 보았지만, 묶이기라도 한 것처럼 두 다리는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은서는 점점 몸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누군가 보기라도 할까 봐, 들키기라도 할까 봐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미친 게 분명해.’
매우 정상적인 ‘어른 남자’라고 생각했던 건 취소다.
수영장에 저를 내다 던지던 그가 떠올랐다.
지금의 그는 그때와 같았다.
그는 은서가 보이는 반응을 즐기는 것 같았다.
“왜 그래? 어디 불편해?”
뒤늦게 은서가 이상하단 걸 눈치챈 민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속닥거렸다.
“어? 어, 아니.”
은서가 과하다 싶을 만큼 고개를 빠르게 내저으며 웃었다.
그런 은서를, 정혁이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제발 그렇게 보지 좀 마.’
그의 시선이 마치 샅샅이 속내를 훑는 기분이었다.
이러다 들키면 어쩌지.
“얼른 먹어.”
“응.”
은서는 민정의 의심을 피하려 부러 앞에 놓인 음식을 듬뿍 떠 입으로 가져갔다.
정혁은 아무 표정이 없었지만, 은서는 어쩐지 그가 웃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잘 먹었습니다.”
한데 입을 모아 정혁에게 감사를 표한 아이들이 우르르 엘리베이터로 몰려갔다.
문이 열리자마자 아이들이 앞다투어 올라탔고, 은서와 정혁만이 남아 있을 때였다.
“아이고, 우리 좀 탑시다!”
은서가 발을 옮기려는 찰나, 옆에서 여러 명의 아주머니가 은서의 앞을 가로질러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충돌을 피하려 저도 모르게 한걸음 뒤로 물러선 은서의 등이 정혁의 가슴팍에 부딪혔다.
“어, 어?”
아직 타지 못한 은서를 두고 아이들이 당황하는 사이 정원 초과 알림음을 울린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얼결에 정혁과 단둘이 남은 은서는 당혹스러웠다.
적어도 지금은 이 남자와 단둘이 있고 싶지 않았다.
“이런, 버려졌네.”
정혁이 아무렇지 않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다시 눌렀다.
다행히 다른 쪽의 엘리베이터가 금방 도착했고, 두 사람은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텅 빈 엘리베이터가 금세 그의 향기로 가득 찼다.
“식사는 맛있게 했어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정혁이 고개만 옆으로 내리며 물었다.
고집스레 앞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엘리베이터 문에 그의 모습이 고스란히 비치고 있었다.
은서는 유일하게 저만 정혁에게 감사를 표하지 않았음을 기억해냈다.
“글쎄요, 뭘 먹은 건지 모르겠네요. 누구 덕분에.”
“잘 먹던데, 씩씩하게.”
까칠한 대답에 정혁이 쿡 웃음을 터트렸다.
테이블 아래의 상황을 의식하지 않으려 평소보다 과식했더니 속이 불편했다.
상대하지 말자.
상대하면 또 말리는 거다.
은서가 다짐하듯 그를 외면했다.
“집에 갈 거죠?”
“…….”
“데려다줄게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평한 그의 태도가 얄미워 입을 꾹 다물고 버티던 때, 1층에 도착한 문이 열렸다.
“차은서!”
그리고 그곳엔, 지석이 서 있었다.
은서를 보며 활짝 웃던 지석이 은서의 옆에 선 이를 발견하고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