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11화 (11/82)

11.

정혁은 현주의 사촌오빠와 나란히 서 있었다. 그 옆에는 처음 보는 남자도 함께였다.

그는 그간 보던 슈트 차림이 아닌, 조금 더 편안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짙고 어두운색의 슬랙스에 재킷을 걸친 그는 조금 더 어려 보이는 듯도 했다.

살짝 내린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가로로 긴 눈이 참 깊었다.

“다 같이 왔구나?”

현주가 기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무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전시회 축하해.”

가까스로 정혁에게서 시선을 떼어낸 은서가 현주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차은서가 오다니. 아무래도 전시회 대박 날 것 같아.”

아이들과 차례로 포옹하던 현주가 은서를 신기한 생물 보듯 아래위로 훑었다.

현주의 목소리 톤이 한껏 올라간 걸 보니 꽤 들뜬 것 같았다.

현주의 반응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애당초 은서가 이런 외부 행사에 참석하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런 외출도 집안의 분위기에 익숙해진 경미가 눈치껏 중훈의 관심을 막아주기 때문에 가능해진 거였다.

“이미 잘 된 것 같은데, 뭐.”

“나중에 네 전시회 기대된다.”

대답 대신 은서는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을 담아 웃어주며 어깨를 으쓱였다.

현주가 말하는 자신의 전시회는 오지 않을 미래였으니.

“아, 참. 그러고 보니.”

현주가 뒤늦게 떠오른 듯 뒤에 두고 온 남자들을 보다가 다시 입을 다물고 은서를 쳐다봤다.

그녀는 눈으로 묻는 것 같았다.

애들 앞에서 아는 체를 해도 되느냐고.

아무리 자유 영혼이라고 해도 다른 사람의 상황을 고려하는 눈치는 빠른가 보다.

은서가 고마움을 담아 슬쩍 고개를 내젓자 현주가 알았다는 듯 빠르게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세심한 배려가 고마웠다.

“그럼 그림 구경 좀 해볼까?”

“후후, 내가 직접 설명해줄까?”

“아니요, 언니! 우리가 직접 보고 느낄게요.”

현주의 자화자찬을 예상한 아이들이 극구 사양하며 그림 앞으로 몰려갔다.

은서는 무리 너머 서 있는 남자들을 힐끔 쳐다봤다.

“!”

또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은서는 그를 보지 않은 척 고개를 돌리고 무리 틈에 스며들었다.

어쩐지 심장이 불안하게 쿵쿵거렸다.

·‘흐음.’

정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눈이 마주친 게 분명한데도 은서는 그 흔한 눈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학교에 데리러 갔을 때도 남의 눈에 띄는 걸 싫어하는 것 같더니.

“그때 그 친구 아냐?”

정혁은 옆에서 아는 체 하는 현우의 말에도 은서에게 고정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현우가 그런 정혁의 옆모습을 보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이미 은서의 뒷조사를 하면서 얼굴을 확인한 도훈도 은서를 알아본 건 마찬가지였다.

“너 알고 온 거야?”

도훈이 조용히 정혁에게 물었다.

아무리 현우가 불러냈다지만 이런 전시회에 따라나설 녀석이 아니었던 터라 안 그래도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그럴 리가.”

정혁이 비싯 웃음을 흘렸다.

전시회에 온 건 순전히 같이 가지 않으면 앞으로 정보는 없을 줄 알라는 현우의 협박과도 같은 부탁 때문이었다.

현직 검사인 그에게 여러모로 신세 지고 있는 게 많아 적당히 휘둘려주던 참이었다.

억지로 끌려 나왔는데 이렇게 차은서를 마주할 줄은 몰랐다.

“그래? 이렇게 마주치는 거 보면 인연이긴 한가 보다.”

도훈이 흥미롭다는 얼굴을 했다.

“그런데 왜 아는 체도 안 해? 둘, 뭐 있는 거 아니었어?”

현우가 멀어지는 은서의 뒷모습을 보다가 물었다.

“글쎄.”

정혁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함께 점심을 한 이후, 기다리겠다고까지 했음에도 은서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첫날의 도발이 꿈이었나 싶을 정도로, 그녀는 철저하게 선을 그어놓고 넘어오지 않았다.

“……의외로 겁이 많은지도.”

“응?”

“정혁 오빠.”

도훈이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찌푸리는 사이, 현주가 팔랑거리며 다가왔다.

“은서랑 어떻게 됐어? 둘이 뭐 있는 거 아니었어?”

누가 사촌 아니랄까 봐, 현우와 똑같은 걸 묻는 현주에 도훈이 웃음을 삼켰다.

“없어, 아무것도. 그러니까 관심 두지 마.”

“뭐야, 재미없어.”

현주가 입을 비죽이며 투덜거렸다.

“쟤 진짜 괜찮은 앤데. 아주 얌전하고, 오빠같이 재미없는 남자한테 찰떡인데.”

현주의 말에 정혁은 답하지 않았다.

얌전하다고?

현주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다.

차은서가 얼마나 강한 불꽃을 품고 있는지, 얼마나 생기가 넘치는 아이였는지.

“오빠, 오늘 뭐 해?”

어느새 정혁과 은서에게서 관심을 끈 현주가 도훈에게 팔짱을 끼며 물었다.

“글쎄?”

도훈이 슬쩍 현주의 팔을 떼어내며 답을 피했다.

“나랑 저녁 먹고 가. 응? 오랜만에 봤잖아.”

“어, 그게…….”

도훈이 곤란한 눈빛으로 현우에게 SOS를 청했다.

현우는 곧 죽일 듯 노려보는 현주의 시선을 보고는 씩 웃으며 답했다.

“그래, 저녁 먹고 가라.”

“…….”

원망스러운 도훈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또 현주에게 들들 볶이기는 싫었으니까.

“쏘는 건 네가 쏘고.”

현우가 정혁에게 턱짓하자 정혁이 거절하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현주야, 네 과 친구들도 같이 먹자. 어때?”

어딜 내빼려고.

현우는 정혁이 거절의 의사를 밝히기 전,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던졌다.

“…….”

아니나 다를까, 도훈의 시선이 곧장 침묵하는 정혁에게 가 닿았다.

번잡스러운 걸 싫어하는 정혁이니, 평소였다면 단칼에 거절했을 제안이었다.

“나야 좋지. 애들한테 이야기해야겠다.”

주변 사람들한테 생색내기 좋아하는 현주가 신이 나서는 도훈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하아.”

“조금만 참아. 대신 재미있는 걸 볼 수도 있잖아.”

현우가 그새 지쳐 보이는 도훈의 어깨를 토닥이며 속삭였다.

*“나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

“같이 갈까?”

“아냐.”

은서는 한창 그림 감상에 빠져 있는 과 친구들을 두고 갤러리 밖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무작정 인적이 드문 곳으로 뛰듯이 걸었다.

현주의 그림은 그녀를 닮아 자유로웠고, 밝았다.

그림을 보는 내내 가슴이 일렁여서 더 버틸 수가 없었다.

부러웠다. 미치도록 부러웠다.

그녀를 질투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림을 보고 있을수록 은서는 제가 처한 현실을 직시하게 돼 괴로웠다.

“하아.”

터질 것 같은 호흡을 가까스로 다스리며 건물 옆의 골목으로 돌았을 때였다.

“힘들어 보이네.”

어느새 낯익어진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

흠칫 놀라 고개를 드니 건물 벽에 다리를 꼬고 기대어 선 정혁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마 따라온 거야?

뒤를 돌아보며 경계하던 은서가 뒤늦게 그의 손에 들린 담배를 보았다.

반쯤 타들어 가 있는 걸 보고서야 정혁이 이 자리에 먼저 와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의식 과잉이구나.

왜 하필 도망쳐 온 곳이 그의 앞이었는지.

은서가 자책하며 가쁜 숨을 들이마시자 매운 박하 향이 함께 폐로 빨려 들어왔다.

눈을 찡그린 은서가 저도 모르게 콜록대자 정혁이 들고 있던 담배를 비벼 껐다.

“허.”

낮게 헛웃음을 흘린 그는 첫 만남을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연기조차 견디기 어려워하면서 그의 것을 탐냈던 게 그의 눈에는 우스웠을 거다.

가빠졌던 호흡이 그의 앞에서 서서히 제 속도를 찾기 시작했다.

“다시 보네요, 우리.”

정혁이 기대어 섰던 몸을 바로 하며 가볍게 입꼬리를 당겼다.

“……그러게요. 안녕하셨어요.”

은서의 기계적인 대답에 그가 쿡쿡 웃음을 흘렸다.

“이런 모습도 나쁘진 않지만.”

“……네?”

정혁이 흘리듯 뱉은 말에 은서가 고개를 들었다.

비스듬하게 내린 정혁의 눈동자가 은서의 얼굴에 닿았다.

갤러리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은서를 보며 그는 강한 충동을 느꼈었다.

저 예쁜 얼굴에 쓰고 있는 단정한 가면을 벗겨버리고 싶다는, 실로 거친 열망.

하지만, 이 순진하고 여린 아이에게 그런 내색을 할 순 없겠지.

“왜 연락 안 했어요? 기다렸는데.”

그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자 결 좋은 머리가 스르륵 흘러내렸다.

살짝 가려진 새까만 눈동자가 반짝 빛을 낸 것도 같았다.

“그냥…….”

은서는 그의 눈을 보다가 슬쩍 눈동자를 아래로 굴렸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의 앞에 있으면 입안이 바짝 마를 만큼 긴장이 되면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된다.

중훈에 대한 것도, 자신을 둘러싼 모든 상황도 어느 순간 잊고 있는 자신이 보였다.

오로지 눈앞에 있는 그에게만 집중하게 되는 것이 오히려 편안해서, 그래서 무서워지는 모순적인 감정을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그냥 현실을 잊기 위한 임시방편의 수단으로 선택했던 그였는데, 마주칠 때마다 이상하게 깊이 얽히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에서 위험하다는 경고등이 자꾸만 울렸다.

그의 곁에 있으면 지금까지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며 버텨 온 것들이 무너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눈동자만 도르르 굴려대는 은서를 본 정혁이 그녀의 앞으로 미끄러지듯 한 걸음 다가섰다.

커다란 몸이 덮치듯 그녀의 위로 쏟아졌다. 감각을 틀어쥐는 정혁 특유의 향기가 은서를 에워쌌다.

고개를 숙여 정면으로 은서를 보던 정혁이 비스듬히 고개를 옆으로 틀며 은서의 귓가로 입술을 가져갔다.

“무서워?”

낮은 목소리가 속삭이며 귓가에 달라붙었다.

서늘하고도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에 스쳐 소름이 돋았다.

무섭냐고?

맞아, 나는…… 무서워.

은서는 딱딱하게 굳은 채 눈앞에 놓인 그의 어깨를 노려보다시피 했다.

“넌 이 게임이, 그냥 재미있는 게임으로 끝나지 않을까 봐 겁나는 거야. 그렇지?”

“…….”

보지 않아도 그가 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도망치지 마.”

은서는 손목을 휘감아오는 서늘한 감각에 흠칫 몸을 떨었다.

“먼저 시작했으면, 당연히 책임을 져야지.”

“…….”

“안 그래요, 차은서 양?”

그의 긴 손가락이 천천히 손바닥 안을 파고들어 여린 살을 문질렀다.

“……숨은 쉬고.”

그의 지시에 참았던 숨을 토해낸 은서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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