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10화 (10/82)

10.

“언니, 여기서 뭐 해요?”

“……어?”

시야에 불쑥 들어온 얼굴에 민정이 몸을 뒤로 젖혔다.

“왜 혼자 있어요? 은서 언니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과 후배에 민정은 뒤늦게 시간을 확인했다.

지석이 떠나고 힘이 빠져 눈에 바로 보이는 벤치에 앉았는데, 그 뒤로 20분이나 지나 있었다.

“은서는 잠깐 일이 있어서.”

“그렇구나. 그런데 언니 어디 아파요? 안색이 별로 안 좋은데?”

“응? 아니야.”

민정이 애써 눈꼬리를 접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넌 어디 가는데?”

“나 교수님이 찾으셔서 가는 길. 점심도 먹다 말고 나왔잖아. 내가 다시는 근로 하나 봐라.”

“안 됐다. 얼른 가 봐, 급하신 일일 수도 있잖아.”

투덜거리는 후배를 달래 보내고 난 뒤 민정은 목덜미를 문질렀다.

단발로 짧게 자른 탓에 드러난 목덜미가 서늘했다.

‘다시…… 안 오겠지?’

은서가 자리를 뜨자 지석은 망설임 없이 저를 내버려 두고 가버렸다.

그 미련 없는 뒷모습이 왜 이리 원망스러운지, 서글퍼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지경이었다.

“너 정말 미련하다.”

저 자신에게 쓴소리를 뱉은 민정이 가방을 둘러매고 일어서던 때였다.

“아.”

저 멀리 지석이 보였다.

새끼손톱만큼 작은 크기였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민정의 얼굴에 해사한 미소가 피었다.

민정은 급히 팩트를 꺼내 얼굴을 점검하고 머리를 정돈했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방을 고쳐 매고 지석이 오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야, 서지석.”

“……아.”

앞을 가로막는 이를 확인한 지석의 턱에서 힘이 풀렸다.

“민정아.”

“어디 갔다 와?”

“그냥.”

지석이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며 얼버무렸다.

“표정이 왜 이래? 무슨 일 있었어?”

민정이 덤덤한 척, 걱정을 숨기며 물었다.

은서를 따라갔던 걸까?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호기심과 질투가 뒤범벅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내 표정이 왜? 아무 일도 없었어.”

지석이 커다란 손으로 제 얼굴을 문지르며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이제 민정도 알 수 있었다.

은서만큼은 아니지만, 지석을 지켜본 시간이 벌써 몇 년이었으니까.

“진짜 밥 안 먹을 거야?”

민정은 질척대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 장난스레 물었다.

“아, 밥.”

민정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지석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먹자. 밥.”

·“은서 말이야.”

몇 입 뜨는 둥 마는 둥 하던 지석이 흘리듯 말을 꺼냈다.

민정은 입안이 까끌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은서가 왜?”

하지만 지석에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지석이 얼마나 은서를 아끼는지, 바로 옆에서 지켜봐 왔으니까.

“요즘, 만나는 사람 있어?”

한참을 뜸 들이며 머뭇거리던 지석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만나는 사람? 그럴 리가 있겠어? 걔네 집, 어떤지 너도 잘 알잖아.”

민정이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누굴 만나고 싶어도 저렇게 엄격해서야 데이트할 시간조차 없을걸?”

“……그렇……지?”

말은 동의하면서도 지석의 표정은 꽤 혼란스러워 보였다.

민정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만나는 사람 있대?”

오늘 옷차림이 유달리 평소와 다르긴 했지.

“아니야, 그냥. 생전 안 입던 치마를 다 입었길래.”

지석이 말을 돌리듯 가볍게 웃으며 부정했다.

“그러게. 나도 깜짝 놀랐어.”

마음 한구석에 묘한 의심이 들면서도 민정은 모르는 체 수긍했다.

아무래도 확인이 필요할 것 같았다.

만약…….

만약에 은서에게 다른 남자가 생긴다면…….

그럼 넌 어떻게 나올까?

내게도, 눈길을 줄까?

갑자기 갈증이 일어 민정은 물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은서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짙은 한숨을 뱉었다.

“난 또 봐야겠는데. 차은서 양을.”

또 봐야겠다고 했으면서, 그에게선 며칠째 별다른 연락이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학교 근처에 내려주는 순간까지도, 그는 언제 다시 보자는 말 같은 것도 꺼내지 않았다.

“그냥 한 말인가?”

침대에 모로 누우며 은서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첫 만남 때는 그의 발언을 오해했다 치지만, 이 정도면 무작정 오해라고 치부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아무리 연애 경험이 없어도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이건 누가 봐도 그 남자가 제게 접근하는 모양새였다.

아니, 은서더러 자기에게 접근해보라 곁을 내주는 꼴이었다.

“일단…… 저장이라도 해둘까?”

연락할 일은 없겠지만.

은서가 망설이다 말고 머릿속에 나열되는 그의 번호를 휴대폰에 입력했다.

“뭐라고 저장하지.”

입술을 질근거리며 고민하던 은서가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수영장]

저장된 이름을 본다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혼자 키득거리던 은서는 다시 몸을 바로 하고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하얀 천장 위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 표정이 없을 때는 서늘했다가, 가끔 짓궂게 입술 끝이 올라가는 게 꽤 색정적이었다.

나이 차이가 여섯이라고 했던가.

어른 남자 같으면서도 농담을 던질 때는 꼭 유치한 말장난을 하는 어린 애 같았다.

남자를 생각하다 보니 그의 이미지가 자연스레 다양한 색채로 그려졌다.

까맣고 붉은……

“아.”

은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당장 캔버스에 옮기고 싶어졌다.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싶은 것이 생긴 것은.

은서는 다급히 옷장을 열어 갈아입을 옷을 꺼냈다.

옛날 같았으면 곧장 집 안에 있던 작업실로 향했을 테지만, 지금은 학교에 가는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급했다.

이미지가 사라지기 전에, 어서 그려내고 싶었다.

은서가 후다닥 옷을 갈아입고 뛰듯이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였다.

“어딜 가는 거냐.”

무거운 목소리가 막 현관으로 향하던 은서의 발걸음을 낚아챘다.

“…….”

어깨를 흠칫 굳힌 은서가 거실 쪽으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거실 소파에 앉은 중훈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고 그의 옆에는 경미가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아.’

은서는 입술 안쪽을 지그시 깨물었다.

마음이 급해 거실에 누가 있는지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그간은 늘 아래층에 내려올 때마다 누가 있는지 경계했었는데.

“……학교에 다녀오려고요.”

은서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보내줘. 날 그냥 보내줘.

이렇게 그리고 싶은 강렬한 충동은 오랜만이란 말이야.

은서는 소리치고 싶은 욕구를 애써 내리눌렀다.

“중요한 과제가 있었는데, 잊고 있었거든요.”

“시간이 늦었다.”

중훈은 고려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단호했다.

“중요한 과제에요.”

중훈의 눈길이 매서워졌다.

은서가 버티는 것이 못마땅해진 탓이었다.

“올라가.”

중훈의 목소리가 한결 더 낮아졌다.

그건 은서에게 하는 경고였다.

지금 이 말을 듣지 않으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마지막 학기인데, 성적 잘 받아야죠.”

경미가 눈치를 보다 슬쩍 말을 얹었다.

“그깟 그림, 때려치우는 게 나아.”

“의원님.”

“예술은 무슨. 미치광이들이 하는 장난질이지. 예술한답시고, 도덕도 없는 몰상식한 것들.”

중훈이 저열하게 비꼬았다.

“지금 네가 나가서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

“올라가. 두 번 말하지 않겠다.”

은서는 또 한 번 절망을 느꼈다.

그리고 수영이 원망스러워졌다.

중훈을 외면할 수 없게 만들어 놓고 제 곁을 떠나버린, 엄마가.

이 모든 지옥의 시작은 그녀가 이 집을 떠난 후였으니까.

“…….”

하릴없이 방으로 돌아온 은서는 힘없이 재킷을 벗어 의자 위로 툭 던져두었다.

머릿속이 다시 점멸됐다.

선명하게 떠오르던 이미지는 전부 흑백이 되어 버렸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깊은 물 속에 잠긴 기분이었다.

커다란 가시가 걸린 것 같아 목 언저리를 쥐어뜯듯이 움켜쥐었다.

이대로 조른다면 편안해질까?

점점 더 갑갑해 오는 숨에 호흡이 가빠졌다.

벗어날 수 없는 진흙탕 속에서 몸부림치는 것만 같았다.

은서가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았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연락해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 남자였다.

내가 웃는 게 보고 싶은 것 같다던, 하정혁, 그 남자.

문자를 확인한 순간 온몸의 힘이 탁 풀렸다.

갑자기 졸음이 미친 듯이 쏟아졌다.

은서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나 지금 좀 과해?”

“아니, 진짜 웃겨.”

무리 속에 섞인 은서는 조용히 웃었다.

주말, 중훈이 외부 일정으로 바쁜 틈을 타 경미의 허락하에 과 친구들과 현주의 개인 전시회를 찾은 참이었다.

과 후배 중 하나가 인간 화환이 되겠다며 커다란 리본을 가슴팍에 매달고 있는 탓에 동기들은 깔깔대느라 여념이 없었다.

[화가 이현주가 그리는]

[자유와 방종의 사이]

리본의 양쪽에는 후배가 현주를 위해 골랐다는 문장이 크게 쓰여 있었다.

“현주 언니가 진짜 좋아할 것 같아.”

“맞아, 언니 취향에 맞춘 거야.”

은서는 리본 문구를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자유면 어떻고 방종이면 어떨까 싶었다.

현주는 그녀의 의지대로 살고 있는데.

“얼른 들어가자.”

현주가 즐거워할 모습을 상상하며 들뜬 후배들이 우르르 갤러리 안으로 들어섰다.

인사동의 한 갤러리 입구에는 현주의 인맥을 보여주듯 다양한 사람들이 보낸 화환이 있었다.

“이거 그 배우 아니야?”

“와, 현주 언니 장난 아니네.”

후배들이 화환에 적힌 이름들을 보며 감탄하며 걷는 동안, 은서는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내가 이런 전시회를 하는 날이 올까?’

졸업 전시회는 의무니 어찌어찌 가능하다지만, 앞으로 이런 개인 전시회는 어려울 터였다.

그림을 쭉 그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한때는 촉망받는 인재로 관심을 받던 때도 있었지만.

“집에 돈이 많은 건 알았지만…….”

은서는 옆에서 중얼거리는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응? 방금 뭐라고 했어?”

“어? 아니야, 아무 말도 안 했어.”

고개를 내젓는 민정을 보며 은서가 갸우뚱했다.

얼핏 민정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던 것도 같았다.

“아, 현주 언니!”

갤러리 안으로 들어선 후배들이 현주를 발견하고 달려간 탓에 은서의 관심도 곧 그리로 옮겨졌다.

“!”

그리고, 은서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현주의 옆에 그가 있었다.

하정혁.

처음부터 주시하고 있었던 듯, 그의 시선은 흔들림 없이 제게 꽂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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