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차은서. 25세. 한국대 회화과 4학년 재학 중.”
“…….”
“보고하기 전에 리마인드 한 거니까 그렇게 재수 없는 눈으로 보지 마.”
유능한 비서이자 동료인 도훈은 채 24시간이 지나지 않아 정혁이 지시한 걸 들고 왔다.
“네가 뭘 궁금해하는 건지 몰라서 그냥 전부 파 봤는데…….”
평소답지 않게 말끝을 늘인 도훈이 준비한 파일철을 정혁에게 내밀었다.
“뭐, 딱히 별 건 없어. 그때 이후로 고등학교 입학하고, 졸업하면서 바로 미대 진학했고.”
정혁은 도훈의 설명을 들으며 Confidential 이라고 빨간 워터마크가 찍힌 종이를 빠르게 훑었다.
마치 경력 사항을 기록해 놓은 것처럼 은서에게 있었던 일들이 연도별로 주르륵 적혀 있었다.
“특이사항이 있다면, 고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거랑 대학에서 휴학이 유독 많았다는 것 정도?”
“……어머니가?”
종이에서 눈을 뗀 정혁이 한 박자 느리게 되물었다.
“어. 병 때문이었는지 고1 때부터 어머니가 집을 나와 따로 살았던 걸로 보여.”
“병원에 있었던 건가?”
“그게 좀 특이해.”
도훈이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저기 옮겨 다녔던 것 같거든. 기록이 불분명한 걸 보면 의도적으로 숨긴 것도 같고.”
“…….”
정혁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그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어. 고딩때는 학교, 미술학원, 집. 대학에 와서는 학교, 집. 패턴이 똑같아, 그게 다야. 그 흔한 아르바이트 한번 한 적 없고 말이야. 부잣집 모범생 아가씨의 전형적인 예랄…… 아차!”
“?”
“제일 중요한 걸 잊고 있었네.”
도훈이 제 손바닥 위를 주먹으로 내려치며 눈을 찌푸렸다.
“한우리당 차중훈 의원 알지?”
“어.”
대기업 비리와 고위공무원 뇌물 사건을 파헤쳐 스타 검사가 된 후 국회의원의 길로 들어선 이였다.
당 원내대표까지 했었을 만큼 초고속으로 정치권에서 자리 잡은 사람이기도 했고.
“딸이던데?”
“…….”
“몰랐어?”
“……알았을 리가.”
아는 거라곤 이름 석 자와 얼굴이 전부였는데.
“하.”
정혁이 코웃음 쳤다.
“차중훈의 딸이라고.”
파일철을 툭 내려놓은 정혁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들겼다.
생각보다 일이 재미있게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중요한 시기에 가족을 잃은 그녀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알 수 없었기에.
현주의 뒤를 따라 들어오던 은서를 봤을 때, 기억 속 그 아이라는 걸 곧장 알아봤다. 그녀는 저를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녀를 마주한 놀라움은 이내 의아함으로 바뀌었다.
커다란 눈망울에 도톰하고 붉은 입술은 여전했지만, 아무것도 바르지 않아도 뽀얀 얼굴 위에는 그때와 달리 표정이 없었다.
생기 없는 새하얀 도자기 인형이 떠올랐다.
마음 한편에 묻어두었던 기억이 건드려져서였을까.
어쩐지 씁쓸해지는 기분에 흡연실로 향하다 남자와 시비가 붙은 은서를 보았다.
도자기 인형은 온몸에 뾰족한 가시를 두르고 있었다.
그 까칠함을 본 순간, 의아함은 곧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자극해 봤다.
사춘기 소녀처럼 반항적으로 구는 그녀가 어떻게 반응해 올지 궁금해서.
현주의 친구니까, 그녀도 어쩌면 자유로운 삶을 사는 건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외로 순진해 빠진 그녀는 정혁의 도발에 손쉽게 넘어왔다.
그래, 처음은 그랬다.
유혹할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이, 그저 궁금해서.
그런데 은서는 토끼처럼 겁을 집어먹은 눈을 하면서도 사뭇 비장하기까지 한 태도로 유혹해왔다.
당돌하게 입을 맞춰올 때 보았던 열기를 가득 품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촉촉하게 닿은 입술에서는 물 냄새가 났었다.
순간 고민했던 것도 같다.
이대로 모르는 척, 원하는 대로 넘어가 줄까 하는.
그녀에게 진 빚만 아니었다면, 은서가 내주겠다고 하는 그녀의 처음을 가졌을지도 몰랐다.
그때의 감정은, 정혁이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기이한 충동이었다.
*은서는 사람이 거의 없는 식당 안을 슥 둘러보았다.
정혁이 그녀를 데려온 곳은 학교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프랑스 가정식집이었다.
아기자기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레스토랑은 SNS에서 인기가 많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몸에 착 감기는 슈트를 입은 그는 이 공간에서 다분히 이질적인 존재처럼 보였다.
은서는 어쩐지 정혁이 자신을 고려해 이 식당을 골랐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문하는 모습에서 그가 자주 찾는 곳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날 일은 죄송했어요.”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은서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와 차를 타고 오는 내내 생각했던 말이었다.
“뭐가요?”
은서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꿈틀거리는 정혁의 짙은 눈썹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깊게 팬 그의 날카로운 눈으로 시선을 옮겼다.
다시 만난 그는 여전히 위압감이 넘쳤고 퇴폐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지만, 그날과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고급스러운 까만 종이에 박힌 대표라는 직함이 그와 더없이 잘 어울린다 싶을 만큼, 그의 몸짓엔 절제와 매너가 배어 있었다.
누가 봐도 그는 정상적인 ‘어른 남자’였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실수했어.’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은서의 바람대로 안전한 남자였을지는 몰라도, 자신의 어쭙잖은 유혹에 넘어갈 만한 남자는 아니었던 거다.
그날 밤의 일이 후회스러웠다.
“……이래저래 실례가 많았어요.”
그날 그가 자신에게 한 미친 짓은 어쩌면 말도 안 되는 도발에 대한 응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정신 차리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애 주제에 까불지 말라고.
“사과받을 줄은 몰랐는데.”
“…….”
속내를 간파하려는 듯, 가늘어진 눈이 은서를 응시해왔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은서는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사과할 필요 없다는 뜻이에요. 그럴 일도 없었고.”
이어 나온 그의 대답은 덤덤했다.
“이거, 돌려드릴게요.”
테이블 아래 숨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은서가 잊고 있었다는 듯, 가져온 종이가방을 서둘러 그에게 건넸다.
받아든 정혁은 내용물도 확인하지 않고 옆의 의자에 내려놓았다. 처음부터 옷은 관심 밖이었던 것 같은 태도였다.
어색한 침묵이 길어지려던 차에 다행히도 음식이 서빙되었다.
하지만 먹는 내내 정혁의 시선이 제 정수리에 꽂혀 있는 기분이었다.
의식이 되니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 건지 입으로 들어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결국 고개를 든 은서가 정혁에게 물었다.
“그냥, 그날하고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아서?”
그리 말하는 정혁의 말에는 희미하지만,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뒤늦은 창피함이 몰려왔다.
“……그날은, 제가 미쳤었나 봐요.”
“미쳤다?”
정혁이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왜 그런 날 있잖아요, 가끔. 하루 정도,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은 날. 제정신이 아닌 그런 날.”
“그래서, 뭐였는데요? 사춘기? 아니면 실연?”
정혁이 그날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뒤늦은 사춘기 정도로 할게요.”
은서가 눈썹을 찌푸렸다 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수긍했다.
“흐응. 스물다섯의 사춘기는 꽤 위험하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것 같았다.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으니 전부 잊어주세요. 어쩌다 보니 이상한 애와 스쳤다 생각하셔도 되고요.”
그에게 화풀이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서투른 유혹도, 이상한 방향으로 튄 반항심도 그가 잊어주었으면 했다.
“현주 친구라고 애써 배려해주시지 않아도 돼요.”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물잔을 집어 든 정혁이 입술을 축이고 다시 내려놓았다.
“어쩐지 다시는 안 볼 것처럼 들리네.”
“……다시 볼 일이 있을까요? 셔츠도 돌려드렸고요.”
은서가 정혁의 곁에 둔 종이가방을 눈짓했다.
“이런. 난 차은서 양과 또 만날 의향이 있는데.”
은서의 포크가 그릇 위에서 멈췄다.
“……왜요?”
“내가 제안했으니까.”
제안이라고?
“……설마, 유혹해보라던. 그거 말씀하시는 건가요?”
은서의 입가가 서서히 굳었다.
“유혹해볼 생각 같은 거 없어요.”
단호한 대답이 튀어 나갔다.
“그래요? 아쉽네요.”
어깨를 으쓱하는 그는 그날 밤의 짓궂었던 이상한 남자로 돌아간 것도 같았다.
“……저한테 관심 있으세요?”
망설이던 은서가 직구를 던졌다.
당연히 아니라는 것도 알지만, 그의 장난을 멈추게 하고 싶었다.
“그러는 차은서 양은, 나한테 마음 있어서 자자고 했나.”
“…….”
돌아오는 대답에 정작 은서의 말문이 막혔다.
저도 마음이 있어서 그랬던 건 아니었으니까.
“난 진심이었는데. 유혹해보라는 것도, 그다음의 말도.”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재미있을 것 같아서.”
“……재미……라고요?”
“말했잖아요, 세상엔 재미있는 게 많다고. 중독될 만큼.”
중저음의 목소리가 은근하게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차은서 양, 꽤 재미있거든.”
“…….”
“재미있을 거예요, 우리의 게임.”
……게임.
“차은서 양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짙고 까만 눈동자에 복잡해진 은서의 표정이 담겼다.
또다시 유혹하는 걸까.
이 도발에 넘어가야 할까, 말아야 할까.
그러니까, 이러는 게 게임이라고.
“아뇨.”
생각보다 대답은 쉽게 나왔다.
이 남자는 은서에게 정답이 아니었으니까.
“그날은 정말 실수였어요.”
은서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두 번 다시 하정혁 씨를 만날 일은 없을 거예요.”
“…….”
말없이 듣고만 있던 정혁이 손을 들어 올렸다.
은서는 제게로 뻗어 오는 그의 손을 의아하게 바라봤다.
서늘한 손끝이 입술에 닿는 게 느껴졌다.
입술 끝을 은근하게 문지르는 그의 손길에 저절로 몸이 움찔했다.
멍해진 은서에게서 손을 뗀 정혁이 가볍게 눈꼬리를 접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은 제 엄지를 느리게 핥은 정혁이 픽 웃으며 말했다.
“난 또 봐야겠는데. 차은서 양을.”
왜…… 어째서?
은서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달싹였다.
은서의 질문을 읽었는지 정혁이 손깍지를 끼며 야살스레 웃었다.
“글쎄, 차은서 양이 웃는 걸 보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
왜인지 얼굴이 뜨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