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언니!”
“와, 오늘 여신 강림했네?”
교실에 앉아 수다를 떨던 아이들의 이목이 삽시간에 한곳으로 쏠렸다.
호들갑 떠는 그녀들에게 다가가며 은서는 어색하게 웃었다.
“언니 오늘 무슨 날이에요? 힘 너무 줬는데? 와, 화장도 했어?”
“나 너무 꾸민 것 같아?”
쑥스러운 기색을 내비친 은서가 제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물었다.
결국 고민 끝에 평소보다 차려입고 말았다.
가진 것 중에선 제법 어른스러운 베이지색의 원피스를 입고 화장까지 했다.
적당히 신경 썼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들의 반응을 보니 좀 과했나 싶어 걱정됐다.
어쩐지 정혁이 비웃는 모습이 상상되기도 하고.
“아니, 아뇨. 딱 예뻐. 엄청 예뻐. 원래도 예쁘지만.”
아이들의 호들갑은 교수님이 들어오고 나서야 끝이 났다.
“오늘 진짜 무슨 일 있어?”
출석 체크를 하는 틈을 타, 옆에 앉은 민정이 슬그머니 귀엣말을 해왔다. 동그란 눈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냥, 기분전환 삼아?”
은서는 적당히 둘러댔다.
민정은 현주의 방탕한 사생활을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런 민정에게 원나잇해보려다 까인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됐는데, 기죽고 싶지 않아 꾸몄다고 말할 순 없었다.
제 속이 이렇게 시꺼멓고 음흉하다는 걸 알면 민정은 실망할지도 모른다.
고마운 친구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
민정이 의심 섞인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지만 은서는 애써 무시하며 수업에 집중했다.
사실, 수업에도 집중할 수는 없었다.
정혁에게서 연락이 올까 봐 몇 번이고 휴대폰을 확인했으니까.
·수업이 끝나고 강의동을 빠져나갈 때였다.
“차은서.”
또렷이 들리는 목소리에 은서와 민정이 동시에 돌아봤다. 다가오는 남자를 본 두 사람의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어?”
“지석아.”
지석은 중훈의 사법연수원 동기의 아들로, 은서와는 어릴 때부터 가족끼리 알고 지낸 소꿉친구였다.
덕분에 중훈이 은서가 만나도록 허락하는 유일한 이성 친구가 된 그는 은서에게 단 하나뿐인 남자사람 친구였다.
“너희 지금 점심 먹으러 갈 거지? 나랑 같이 먹어. 복학했더니 아주 왕따가 따로 없다.”
눈 위를 살짝 덮은 부드러운 머리가 지석의 미소를 따라 나부꼈다.
“거짓말하지 마.”
민정이 그럴 리가 있겠냐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은서를 사이에 두고 마주치다 보니 자연스럽게 두 사람도 친한 친구가 되었다.
“서지석이 왕따라니,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같은 학교의 경영학과에 재학 중인 지석은 입학 때부터 한국대 훈남의 자리를 꿰찼다.
하루걸러 고백받는 게 일상이었던 그의 인기는 복학 후에도 식기는커녕 더 치솟았다.
“아니야, 진짠데.”
지석이 민정의 타박에 우는소리를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어쨌든 같이 먹자. 내가 후식까지 쏠게.”
“와, 진짜?”
“물론 학식에서.”
“하?”
“어쨌든 둘 다 콜하는 거지?”
“아, 저기.”
자연스레 함께 가는 걸로 흘러가는 상황에 은서가 태클을 걸었다.
“미안, 나는 오늘 점심 약속이 있어.”
의아하게 보는 두 사람에게 은서가 미안한 표정을 보였다.
“점심 약속?”
되묻는 두 사람 모두, 네가 약속이 있을 상대가 누구냐는 듯 믿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누구랑?”
“그냥…….”
얼버무리던 은서가 마침 울리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저장되어있지 않은 번호였지만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명함을 몇 번이고 들여다본 탓에 외워버리고 말았으니까.
“나 먼저 갈게, 이따 봐.”
전화가 끊어질까 싶어 은서는 서둘러 작별 인사를 건넸다.
“뭔가 의심스러운데…….”
인사도 제대로 마무리 짓지 않고 바쁘게 사라지는 은서에 민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냄새가 나, 냄새가. 쟤가 저럴 애가 아닌데. 오늘 바짝 꾸민 것도 그렇고.”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세상 모든 일에 초연한 애처럼 무심하게 굴던 애가 설레하는 게 다 보일 정도였으니까.
“…….”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지석이 은서의 뒷모습을 망연히 쳐다봤다.
전화를 받으며 걸음을 서두르는 은서는 이미 이쪽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해? 둘이라도 먹을까?”
민정은 기대감이 역력한 얼굴로 지석을 올려다 봤다.
“……미안, 나중에 보자.”
잠시 무언갈 생각하는 듯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던 지석이 민정의 어깨를 툭 치고는 은서가 사라진 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
두 사람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민정은 지석의 손이 닿았던 제 어깨를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
밝았던 민정의 얼굴에 어느새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네.”
은서는 친구들에게서 어느 정도 멀어지자 급히 전화를 받았다.
기다렸다는 티가 나지 않게 하려 숨을 고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디에요?
“그러는 그쪽은요?”
정문 쪽으로 걷던 은서가 되물었다.
만나기로 해놓고 지금까지 연락조차 없더니. 괜히 심통이 났다.
-음.
애매한 정혁의 반응에 은서는 점점 걸음을 늦췄다.
혹시 약속을 깨려는 걸까?
은서는 그의 셔츠가 들어있는 종이가방 끈을 꾹 움켜쥐었다.
……아쉬워? 뭐가 아쉬워?
밀려든 감정의 결을 확인한 은서가 고개를 휙휙 내저으며 부정했다.
-은행나무가 많네요, 여긴.
“?”
은행나무?
엉뚱한 발언에 휴대폰을 귀에서 뗐다 다시 붙이는데 바닥에 떨어진 은행나무잎이 눈에 들어왔다. 때가 아닌데도 샛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그 원피스, 잘 어울리네.
“!”
은서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정문 앞 진입로에 비상 깜빡이를 켠 채 서 있는 차 한 대가 보였다.
그 옆에 그림처럼 서 있는 그 남자도.
“아…….”
그를 보는 순간,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일정 거리를 두고 은서의 뒤를 따르던 지석은 갑자기 속도를 늦추는 은서에 덩달아 보폭을 좁혔다.
걸음을 멈춘 은서가 두리번거리는 게 보였다.
‘누굴 만나려고 저렇게.’
조급한 고갯짓을 보는 지석의 마음은 더없이 불안해졌다.
은서의 시선을 따라 같이 살피다, 은서의 시선이 향한 곳을 쳐다봤다.
진입로에 보이는 몇 되지 않는 행인들을 훑던 지석이 턱에 힘을 줬다.
고급 세단에 기대어 선 슈트를 입은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봐도 눈에 확 띄는 남자였다. 커다란 키에, 비율 좋은 몸.
지나가는 학생들의 시선이 남자를 힐끔대는 게 보였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듯, 휴대폰을 귀에 댄 남자의 입가엔 미미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지석은 밀려오는 불길함을 느끼며 그의 시선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남자의 시선 끝에는 은서가 있었다.
지금껏 제가 항상 눈으로 좇았던 차은서가, 그의 시선에도 걸려 있었다.
지석이 무의식에 주먹을 말아 쥐었다.
“…….”
서로를 응시한 채, 휴대폰을 귀에 대고.
두 사람은 그렇게 서 있었다.
마치 서로만 보인다는 듯이.
·-놀란 얼굴이네.
수화기 너머에서 쿡쿡대는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퍼뜩 정신을 차린 은서가 휴대폰을 고쳐 쥐었다.
“여기에 계실 줄은 몰랐어요.”
만날 장소도 정하지 않고 만날 때쯤 연락하겠다고 통보만 해온 그였다.
그랬는데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매너 정도로 생각해요.
“불필요한 매너 같은데요.”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거리를 둔 채, 무의미한 입씨름이 이어졌다.
-그런데, 차은서 양.
“…….”
-계속 그렇게 서 있기만 할 건가?
차체에 기대어 서 있던 정혁이 몸을 바로 하며 물었다.
은서는 본능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혁은 당연하다는 듯 주변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지금 그의 차에 올라탔다가는 모든 시선이 쏠릴 게 뻔했다.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마주친다면…….
“일단 밖으로 나가서요. 여기서는 좀…… 그래서요.”
-…….
이해가 되지 않는지 그의 고개가 기울어지는 게 보였다.
“그쪽, 지금 눈에 너무 띄거든요. 일단 밖으로 나갈게요.”
뭐라 설명을 덧붙이기도 애매해 은서는 통화를 끝냈다.
다시 걸음을 옮기자 그가 점점 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긴장한 허리가 저절로 곧추세워졌다.
그가 지켜보는 데서 걸으려니 다리가 어색하게 삐걱거리는 것 같았다.
또각또각, 울리는 구두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은서는 여전히 의아한 얼굴인 그의 옆을 슥 지나쳤다.
기억 속에 애매하게 남아있던 그의 향기가 살랑살랑 바람을 타고 불어왔다.
빠르게 스치는 그의 시선이 온몸을 관통하는 것 같았지만, 은서는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앞만 보고 걸었다.
그를 지나쳐 몇 걸음 더 걷자, 차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엔진소리가 무겁게 울리며 멀어졌다.
“후.”
정문 앞에 다다른 은서는 걸음을 서둘렀다.
“술래잡기라도 하고 싶은 건가.”
계획대로 정문에서 조금 더 벗어나 정혁의 차에 오르자, 그가 어이없다는 듯 툭 한마디를 던졌다.
무심한 표정이었지만 그가 황당해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안전벨트를 매다가 손을 멈춘 은서가 정혁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이건 대체 무슨 플레이지?”
정혁의 손이 다가와 허공에 떠 있던 은서의 손을 지그시 눌렀다.
벨트가 맞물리며 딸깍,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말했잖아요. 그쪽, 눈에 너무 띈다고.”
은서는 정혁의 손이 닿았던 손등을 문지르고 싶은 본능을 억누르며 양손을 무릎 위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기분이 묘하네.”
“뭐가요?”
“날 만나는 게 부끄러운 건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정혁도 안다.
지금껏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용도의 트로피처럼, 혹은 액세서리처럼 생각하고 갖고 싶어 하는 여자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말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은서를 보는 게 재미있었다.
“……그런 거 아니라고요.”
정말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저희 어디 가나요?”
“밥 먹으러 가야죠. 점심 약속이니까.”
눈가를 구긴 은서가 슬쩍 말을 돌리자, 정혁이 잘게 웃으며 장단을 맞춰줬다.
“못 먹는 건?”
“딱히 없어요.”
차를 출발시킨 그가 부드럽게 핸들을 돌렸다.
“그럼 좋아하는 건?”
“그것도 딱히 없어요.”
“…….”
“왜요?”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신호에 걸려 멈춘 틈을 타 정혁이 은서를 빤히 보고 있었다.
아무 표정 없는 은서를 보던 정혁은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학교 앞까지 은서를 데리러 온 건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궁금했다.
자신을 다시 만났을 때 차은서가 어떤 표정을 할지.
하지만 그녀는 바에서 마주쳤던 그때처럼, 다시 도자기 인형이 되어 있었다.
“……그냥, 웃을 일이 없는 것뿐이거든요. 즐거울 일도.”
덤덤하게 뱉던 말이 마음에 턱 걸렸다.
도훈을 통해 들은 이야기가 있어 더 그런 지도 몰랐다.
어쩌다 네가 이렇게 됐을까.
응? 차은서.
정혁의 눈빛이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