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7화 (7/82)

7.

“너 왜 예전에…….”

도훈이 조심스러운 듯 머뭇거렸다.

딱 한 번, 정혁이 술김에 입에 올렸던 여자아이.

“맞아.”

정혁이 도훈을 보지도 않은 채 순순히 수긍했다.

“와, 이렇게 가까이에 있었다고?”

도훈이 신기하다는 듯 헛숨을 내뱉었다.

“인연은 인연이구나. 어떻게 이렇게 만나냐.”

도훈이 중얼거리는 걸 들으며 정혁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높은 고층 빌딩 아래, 성냥갑처럼 작은 자동차들이 대로를 오가는 게 보였다.

글쎄, 인연이라고 보는 게 맞는 건가.

갑자기 제 앞에 통째로 굴러들어왔다고 하는 게 더 맞는 것 같기도 했다.

한 번씩 드문드문 떠올리며, 그렇게 살아가겠거니 했는데.

“그러니까…… 10년 만인가?”

손가락을 꼽아보던 도훈이 되물었다.

“정확히는 9년.”

“그래서, 회포는 풀었냐?”

잊은 적도 없는 사람처럼 곧장 대답하는 정혁에 도훈이 키득거렸다.

“기억조차 못 하던데.”

“……너를?”

도훈이 그럴 리 없다는 듯 우물거렸다.

한번 보면 쉬이 잊힐 존재감은 아니었다. 그의 친구 하정혁은.

“그래, 나를.”

“말도 안 돼.”

“그 정도의 존재였나 보지.”

흔적조차 없이 기억에서 지워버릴 만큼, 스쳐 지나가는 그런.

네게는 고작 그 정도의 만남이었었나.

정혁이 비웃듯 입술을 삐뚜름하게 비틀었다.

“그래서 알아보라고 하는 거야? 심술이 나서?”

도훈이 놀리듯 말끝을 늘이며 물었다.

“그냥,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하지만 조금은 어두운 대답에 도훈은 더 이상 묻지 못하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찾아온 침묵 속에 정혁은 반짝거리던 은서를 떠올렸다.

그리고 빛을 잃어버린 스물다섯의 차은서를.

순수하고 해맑던 미소를 잃고 여기저기 상처투성이가 되어버린 듯한 그녀를.

예전의 모습을 다시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부채 의식 때문일까.

“복잡해 보이네.”

어쩐지 쓸쓸해 보이는 정혁의 뒷모습을 보며 도훈이 머리를 긁적였다.

“어쩔 생각인데? 아니, 뭘 어떻게 하고 싶은데?”

가만히 창밖을 지켜보던 정혁이 책상 위의 휴대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글쎄.”

“?”

“일단은 유인부터 해 볼까.”

정혁의 입꼬리가 천천히 말려 올라갔다.

*“은서 왔구나.”

현관에서 실내화로 갈아 신자마자 경미가 나와 반갑게 맞았다.

“네. ……아버지는요?”

“서재에 계셔.”

“네.”

“은서야.”

“?”

경미가 서재로 향하려던 은서의 팔을 급히 붙잡았다.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냥 바로 올라가.”

아, 저기압이라고 했었지.

괜히 얼굴을 마주했다가 은서에게 또 쓸데없는 불똥이 튈까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얼른 씻고 내려와. 저녁 먹어야지?”

“네.”

경미의 배려가 고마워 은서는 작게 미소 지었다.

열아홉 살 겨울, 중훈이 재혼하겠다며 갑자기 그녀를 데려왔을 때는 깜짝 놀랐다.

솔직히 중훈이 다른 여자와 살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처음에는 경미를 경계했지만, 함께 지내다 보니 왜 중훈이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은서가 보기에도 경미는 중훈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녀는 재혼으로 생긴 딸까지도 너그럽게 포용했다.

혼인신고를 하지 않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경미에게 일말의 동정심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관계이지만 은서는 경미를 진심으로 아꼈고, 존중했다.

그녀가 있기에 그나마 살얼음판 같은 이 집구석에서도 온기라는 게 존재할 수 있는 거였다.

물론 경미가 온 후에도 중훈의 집착과 통제는 심해지면 심해졌지, 결코 덜해지진 않았지만.

어쩌다 경미 같은 따스한 사람이 중훈 같은 사람을 사랑하게 됐을까. 사람의 감정은 참 모를 일이었다.

벗은 재킷을 넣어두려 무심코 옷장을 연 은서는 옷걸이를 꺼내다 말고 멈칫했다.

오른쪽 끝, 구석에 걸어두었던 하얀 셔츠가 눈에 띈 탓이었다.

그 남자의 것이었다.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또 봅시다?”

멍하니 셔츠를 보는데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당연히 은서가 연락할 거라 믿는, 확신에 찬 말투였다.

‘일단 챙겨둘까?’

버려도 된다곤 안 했으니까.

이대로 입을 씻을까 생각도 했지만, 브랜드를 보니 은서가 가진 돈으로는 어림도 없는 금액이었다.

중훈이 돈이 많다고 은서에게도 돈을 많이 주는 건 아니었다.

아르바이트는 금지였고, 학비는 장학금으로 충당했다. 생활비도 일부 장학금과 경미가 한 번씩 몰래 챙겨주는 용돈으로 버티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엄마가 모아줬던 돈이 제법 있긴 했지만, 아직 그 돈을 건드릴 생각은 없었다.

언젠가 이 집을 떠날 수 있게 된다면 그때 사용할 독립자금이었으니까.

‘내가 이렇게 걸어놨던가?’

정혁의 셔츠를 집으려던 은서는 문득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경미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며 드라이를 맡겼다가 찾아와 그대로 걸어뒀다.

그랬는데 누가 꺼냈다 다시 넣은 것처럼 옷이 살짝 흐트러져 있었다.

‘기분 탓인가.’

이 방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자신 외엔 없었다.

집안일을 도와주시던 분은 경미가 온 이후 전부 내보냈고, 경미는 은서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청소도 세탁물을 넣는 것도 전부 은서 스스로 하고 있으니까.

‘설마.’

중훈이 제 방을 뒤지는 상상을 한 은서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아니다, 중훈이 비정상적이라 해도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피곤해서 예민해진 모양이었다.

“그냥 빨리 돌려주자.”

계속 여기에 둬봐야 신경만 쓰일 뿐이지. 괜히 그 남자 생각만 자꾸 나고.

은서는 셔츠가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작은 종이가방에 넣은 뒤 제 가방에 쑥 넣어버렸다.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차은서라고 해요. 통화 가능하세요?]

몇 번이고 지웠다 다시 쓴 끝에 문자를 보내놓고 은서는 쿵덕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문자 하나가 뭐라고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혹시 기억 못 하는 거 아닐까? 잊은 거 아닐까?

그냥 한 말인데 진짜로 연락했냐고 하면 어쩌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두 손으로 휴대폰을 잡고 노려보기만 하는데 갑자기 전화가 왔다.

그였다.

하정혁.

은서의 손가락 끝이 조심스레 통화 버튼을 건드렸다.

“연락이 늦었네요.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혁은 수화기 너머의 침묵을 기꺼이 즐기며 책상 위에 놓인 탁상 달력을 힐끗 쳐다봤다.

그날 이후 일주일이 지났다.

짧다면 짧고, 길다고 한다면 긴 시간이었다.

정혁의 짓궂은 미소를 본 도훈은 통화 상대를 짐작하고는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갔다.

“일부러 그런 거라면 성공적이었고요.”

도훈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뗀 정혁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안 그래도 내가 먼저 찾아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거든.”

웃음기 묻은 말에 은서가 손가락으로 휴대폰을 긁어내렸다.

중저음의 목소리.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면서도 듣는 이를 홀리는 매력적인 톤이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옷, 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 연락했어요.”

-아, 옷.

“네, 옷이요.”

-입혀 보내길 잘했네. 유리구두 역할을 제대로 했으니.

유리구두라니.

자기가 신데렐라라도 된다는 말인가?

계속 느낀 거지만, 남자의 대화법은 어딘가 좀 이상했다.

“언제가 편하세요? 제가 저녁 시간은 좀 곤란해서요, 최대한 낮에…….”

말하다 말고 은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 보니 상대는 저와 같은 학생이 아니었다.

바쁜 사람인데 별것도 아닌 일에 시간을 뺏을 수는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은서가 마음을 정하고 말을 이었다.

“제가 계신 곳 근처로 갈 테니, 잠깐 나와 주실래요?”

-그럴 필요 없어요. 퇴근길에 잠깐 들르면……

“아뇨!”

은서가 깜짝 놀라 그의 말을 끊었다.

그날, 정혁이 데려다주던 새벽에만 해도 혹 중훈과 마주칠까 조마조마했었다.

또 그때의 불안을 경험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 집이 엄격해서요.”

서둘러 변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

너무 과하게 반응했나.

정혁의 침묵에 은서는 어색하게 입술을 말아 물었다.

분명 이상하다고 생각할 거야.

첫 만남에 그를 따라 호텔 방까지 갔던 걸 생각했을 때 더더욱 이상한 핑계였다. 그날 정혁이 근처까지 데려다주기도 했고.

“바쁘실 테니 제가 회사 근처로……”

-아뇨.

이번엔 정혁이 은서의 말을 잘랐다.

-나도 회사 근처는 곤란해서. 지켜보는 눈이 많거든.

아, 대표라고 했지.

납득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에둘러 거절하는 것 같은 말에 괜히 심장이 서늘했다.

하긴, 먼저 이상한 핑계를 댄 건 이쪽이니까.

처음부터 그는 그냥 거절하려 했던 건지도 몰랐다.

“그럼…… 주소 알려주시면 그냥 택배로 보낼게요.”

-…….

“여보세요?”

-너무 쉽게 물러서네. 재미없게.

“네?”

-점심때. 수업 없는 날이 언제예요?

“……월요일 빼고는 전부요.”

-그럼 금요일에 봐요.

“…….”

-연락할 테니 전화 잘 받고.

“…….”

-대답은?

“아…… 네.”

-그때 보죠.

낮은 웃음소리를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저질렀다.

은서는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남자와 마주했을 때 느꼈던 팽팽한 긴장감이 다시 피부 위를 맴도는 기분이었다.

그를 다시 만나도 그럴까 궁금해졌다.

다른 생각할 여유조차 주지 않고, 모든 감각을 자신에게 집중시켜버리던 남자.

‘지난번처럼 말리긴 싫은데.’

골똘히 생각하던 은서는 옷장 문을 벌컥 열었다.

그날, 정혁이 자신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애 취급한 건 외모 때문이 아닐까 싶어졌다.

화장기 없는 민낯에 청바지 차림의 캐쥬얼한 복장이었으니, 아무래도 더 어려 보이지 않았을까.

“좀, 어른스러워 보이는 거 없을까.”

중얼거리며 옷을 훑어보던 은서는 고개를 휘휘 내젓고 옷장 문을 닫았다.

“뭐 하냐, 차은서.”

이래서야 꼭 데이트 앞둔 사람 같잖아.

옷만 돌려주려는 거야, 옷만.

그러고 나면 끝이야.

은서는 의식적으로 정혁과의 약속을 기억에서 지워버리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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