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6화 (6/82)

6.

"……."

은서는 멍하니 빈 캔버스를 바라봤다.

무언가 그리긴 그려야 할 텐데, 무얼 그려야 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싶은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튀어 올라 잠을 이룰 수 없었던 적도 많았는데, 그때의 기억이 거짓이었나 싶을 만큼 지금은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얗기만 했다.

"왜 그렇게 멍하니 있어?"

"아."

누군가 어깨를 툭 치는 힘에 손에 들고 있던 붓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윽, 미안."

"아냐, 괜찮아."

붓을 주워 건네는 이는 민정이었다. 고등학교 때 미술학원에서 만난 후 같은 대학에 진학할 정도로 가장 친한 친구였다.

“언니!”

민정의 뒤로 과 후배 몇 명이 우르르 몰려왔다.

"상태가 왜 이래? 어제도 잘 못 잤어?"

"아냐, 그냥 뭘 그려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어."

"한 학기 쉬었다고 벌써 손이 굳었을 리는 없고. 어차피 집에서도 그렸을 거잖아. 하루라도 안 그리면 입에서 가시가 돋는 네가."

팔꿈치로 툭툭 옆구리를 찌르는 민정에 은서는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가장 친한 친구여도, 털어놓을 수 없는 속사정이 있었다.

“그림이고 뭐고 다 때려치워! 그만두라고!”

빈 캔버스를 난도질하며 제 작업공간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중훈의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대외 이미지를 가장 중요시하는 잘나가는 3선 국회의원이었다.

"어쨌든 나가자. 맥주나 한잔하자."

"술? 나 안 되는……"

"알지, 우리 신데렐라 차은서님은 7시까지 집에 가야 하는 거. 그러니까 지금 먹자고."

한쪽 눈을 찡긋하는 민정에 은서가 무심코 시계로 눈을 옮겼다.

겨우 오후 12시 반. 다음 수업까지는 꽤 넉넉한 여유가 있었다.

"너랑 나 복학 기념이야, 너 개강 파티도 못 갔잖아."

"그래요, 언니. 지금 마셔도 집에 갈 때쯤이면 냄새도 안 나."

후배 하나가 키드득거리며 설득에 나섰다.

"알았어, 가자."

은서가 짧은 고민을 마치고 앞치마를 풀었다.

쉽게 물러나지 않을 그녀들인 데다, 민정의 말마따나 빈 캔버스를 노려보는 건 꽤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오예, 앞에 숯가마 가서 치맥! 콜?"

"치맥!"

벌써 신이 난 발걸음들이 우르르 작업실 밖으로 몰려나갔다. 은서는 민정과 함께 느긋하게 그 뒤를 따랐다.

"같이 복학하니까 좋다, 그치?"

"응, 그러네."

팔짱을 껴 온 민정이 제 볼을 은서의 어깨에 부볐다.

은서가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강제로 휴학할 때마다, 민정은 학비를 벌어야 한다는 핑계로 함께 휴학하고는 했다.

집안 사정이라고만 말했는데도 민정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지금껏 휴학과 복학을 함께 했다. 동기들은 눈물 나는 우정이라며 놀려댔지만 은서는 그녀에게 미안할 수밖에 없었다.

민정은 지금까지 제 곁을 떠나지 않은 소중한 친구였다.

“고마워, 민정아.”

“알면 나한테 잘해.”

민정이 천사처럼 환하게 웃었다.

·"한국대 여신님의 복학을 환영하며, 건배!"

"야야, 나는 왜 빼먹어?"

건배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민정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이른 시간이라지만, 은서는 잔을 들어 마시는 시늉만 하고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한때는 현실이 갑갑해 술로 도피하던 때도 있었다.

답답함에 평소보다 더 술을 마셨던 날.

“학교에 보내는 게 아니었다. 자퇴해.”

그녀에게서 술 냄새를 맡은 중훈의 한 마디에 강제 휴학이 쉽게 결정됐었다.

"언니, 이제 휴학 안하고 졸업까지 스트레이트로 가는 거죠?"

"그러려고 생각은 하는데."

"어으, 언니네 집 너무 엄격해요.”

"맞아요, 요즘 같은 세상에 7시 통금이라뇨."

은서를 짠하게 보던 아이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주제를 바꿨다.

"처음에 입학하고 은서 언니 봤을 때 나 안심했잖아. 저런 선배가 있으면 미팅 엄청 들어오지 않을까 하고."

"야, 너도?"

"우리 과에 여신이 있으면 뭐 하냐고. 완전히 탑에 갇힌 라푼젤이야. 나올 수가 없어."

"언니, 이러다가 연애도 못 해보고 집안에서 정해주는 남자랑 결혼하는 건 아니죠?"

"에이, 설마."

다들 헛소리 취급하며 야유했지만, 은서는 웃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전부 사실이었으니까.

친구들의 놀림에 씁쓸히 웃던 은서가 진동 소리에 휴대폰을 집었다.

[은서야, 오늘은 집에 일찍 들어오는 게 좋겠다. 네 아버지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문자를 확인한 은서의 한숨이 짙어졌다.

누가 목을 틀어쥔 듯 숨이 차올라 갑갑해지는데 문득, 그 남자가 생각이 났다.

“유혹, 기대하죠.”

속을 알 수 없던 그 남자.

그러고 보니, 옷…… 돌려줘야 하는데.

그를 만나고 벌써 며칠이 지났다.

꿈이 아니었나 싶을 만큼 현실감 없었던 사건이었다. 버리지도 못해 가방 깊숙이에 넣어둔 그의 명함만이 그날 일이 꿈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은서는 조용히 손가락을 놀렸다.

010…

앞자리만 찍어놓고 손가락이 움직임을 멈췄다.

“원하잖아, 도망칠 곳.”

그날의 일을 되짚으며 은서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회사 대표라더니 통찰력이 남들보다 발달해 있는 모양이지.

정확한 지적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도망칠 ‘곳’이 필요한 게 아니라 잠시 도망칠 ‘행위’가 필요했던 거지만.

쥐 죽은 듯이 중훈에게 맞춰주고 있지만, 늘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사람을 옴짝달싹 못 하도록 압박해대는 중훈때문에 스트레스는 마일리지처럼 차곡차곡 쌓였다.

한계까지 부풀어 오른 풍선이 터지기 전에 한 번씩 바람을 빼 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중훈의 눈을 피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

생각을 이어가던 은서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스트레스로 폭발하기 직전이었던 그날, 하필 우연히 마주친 사람이 현주였다.

“자고 싶으면 자는 거지. 난 섹스로 다이어트하는데?”

자유롭게 사는 그녀처럼 느슨해져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차에 처음으로 자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남자를 만났다.

그날은 이 모든 삼박자가 우연히 맞아떨어졌을 뿐이고, 이제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뭐야?”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던 민정이 은서의 휴대폰 위로 훅 얼굴을 들이밀었다.

생각에서 빠져나온 은서가 움찔하며 본능적으로 전원 버튼을 빠르게 눌렀다.

민정의 시선이 어둡게 암전된 화면 위에 닿는 게 느껴졌다.

“그냥, 아무것도 아냐.”

은서는 휴대폰을 슬그머니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어쩐지, 그의 존재에 대해서 털어놓기가 꺼려졌다.

*“정혁아.”

불투명한 유리문을 몸으로 밀고 들어오는 도훈에 정혁이 모니터에서 눈을 뗐다.

“네 예상대로야. 작전 세력 배후에 재유가 있었어.”

“…….”

미간을 좁힌 정혁이 이마를 문질렀다.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차린 투자 회사는 이제 운용하는 자금 규모 면에서는 따라올 곳이 없을 만큼 커졌다.

최근, 투자금을 요청한 회사를 검토하다 이상한 점이 있어 도훈에게 알아보라 시킨 참이었다.

특허 낸 기술 자체는 평범한데 갑자기 주식 매수자가 늘어 주가가 폭등한 곳이었다.

그 뒤에 대한민국 재계 1, 2위를 다투는 재유가 있었다는 말이다.

분명 김성갑 대표의 자금 세탁이 목적이겠지.

비열한 족제비처럼 생긴 김 대표의 얼굴을 떠올린 정혁이 픽 비웃음을 흘렸다.

“이거 그냥 둘 거냐? 응?”

재미난 꼬리를 잡아낸 도훈은 신이 났는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지금 건드려서 뭐 하려고. 빠져나갈 구멍 없게끔 자료나 잘 만들어 놔.”

“알았어.”

“재유가 그쪽에 접근한 게 우리한테 투자금 요청하러 오기 전인지 그 후인지도 알아보고.”

돈을 주무르는 위치가 되다 보니 싫든 좋든 정•재계의 더러운 일면들을 많이 알 수밖에 없었다.

회사 수뇌부에선 정보력으로만 본다면 검찰 못지않을 거라는 자평도 있었다. 언제 쓰일지 몰라 대부분 비밀 금고에 보관하고 있지만.

“…….”

“……뭔데?”

정혁은 용건이 끝났는데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 도훈을 올려다봤다.

“그래서, 뭐였어?”

정혁의 책상 위에 슬쩍 걸터앉은 도훈이 은근히 물어왔다.

정혁은 무슨 소리냐는 듯 한쪽 눈을 치켜올렸다.

“뭘 아무것도 모르는 척이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정혁이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런 표정 지어도 소용없어. 현우한테 다 들었으니까.”

“아.”

정혁이 의자에 살짝 몸을 묻으며 이제야 알겠다는 반응을 했다.

“뭐지, 이 심심한 반응은?”

도훈은 평소와 다름없이 무심하기만 한 정혁의 얼굴을 보며 입술을 씰룩였다.

“뭐가 궁금한데.”

“몰라서 물어? 생전 여자에는 관심도 안 보이던 하정혁이, 술자리에서 여자랑 사라졌다는데? 그것도 대학생이랑?”

“…….”

대학생이란 단어에 정혁의 표정이 살풋 일그러졌다 제자리를 찾았다.

“스파크가 아주 장난 아니었다며? 현우가 통구이 될 뻔했다고 하더라.”

“…….”

정혁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했다.

스파크?

아, 스파크가 튀기는 했지. 전혀 엉뚱한 쪽으로.

정혁이 반응을 보이자 도훈이 책상을 톡톡 두들기며 눈을 빛냈다.

본격적으로 캐물어 볼 생각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일이 또 있을까 싶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같은 반에, 서로 군대에 있을 때 빼고는 20대의 전부를 함께 보냈다.

도훈은 정혁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하정혁에게 여자라니.

“어마어마한 미인이라던데, 진짜냐?”

“……뭐, 예쁘긴 하지.”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삐딱하게 턱을 괸 정혁은 물에 젖은 채 파르르 떨면서 분노를 표출하던 은서를 떠올렸다.

커다란 눈에 힘을 주고 붉은 입술을 잘근 깨물면서 노려보던 얼굴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웃었어? 방금 내가 못 볼 걸 본 것 같은데.”

도훈이 와이퍼로 차창을 닦듯이 손으로 제 눈을 벅벅 문질렀다가 깜빡거렸다.

“진짜 만나는 거야? 그것도 대학생하고?”

집안 좋다는 결혼 적령기의 여자들도 다 마다하고, 접근해 오는 대단한 여자들도 다 무시하던 정혁이 아직 대학 졸업도 못 한 학생에게 꽂힐 줄은 몰랐다.

“불필요한 관심이라는 생각은 안 들어?”

“원래 남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는 법이거든.”

“…….”

헛숨을 뱉어낸 정혁이 혀를 찼다.

“이쯤 되니 어떤 여자인지 궁금한데? 현주 과 동기라고 하던데.”

“궁금해?”

“당연하지.”

“그럼 직접 좀 알아봐.”

“뭐?”

“차은서, 25세, 한국대학 회화과 4학년.”

“뭐, 뭐냐? 진짜 알아보라고?”

“그래, 특히 최근 10년 위주로.”

자리에서 일어난 정혁이 도훈의 어깨를 툭 쳤다.

“뭐야, 일 시키는 거였어?”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도훈이 인상을 팍 썼다.

“불필요한 호기심의 대가라고 생각해.”

“야!”

“빠른 결과 기대하지.”

여자가 생겼나 싶었는데 바로 뒷조사라니. 그냥 업무와 관련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훈의 호기심이 짜게 식었다.

“이런 게 어디 있…… 아.”

정혁에게 따지려던 도훈은 뒤늦게 무언가를 깨우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

“혹시, 그때 걔야?”

벌떡 몸을 일으킨 도훈의 목소리가 저절로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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