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정혁의 얼굴에 희미한 균열이 생겼다.
내내 평온하던 남자의 표정을 무너트렸다는 생각에 은서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제 와서 발 빼는 건, 자신이 없다는 뜻으로 봐도 되는 거죠?”
은서를 아는 지인이 본다면 기겁할 만큼, 제법 공격적인 언사였다.
그래, 왜 하필 충동적으로 이 남자를 선택했는지 알 것 같다.
오랜만이었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지 않고 뱉어낸 것은.
그간 억지로 꾹꾹 눌러놔야 했던 본성을 끄집어내는 남자라서. 갈 곳 잃은 분노를 쉽게 토해내게 만드는 남자라서, 그래서 그랬나 보다.
은서는 거의 멱살을 잡듯이 쥐고 있던 정혁의 재킷을 탁 놓았다.
살짝 구겨진 옷이 그의 퇴폐적인 얼굴과 어울리면서도 절제된 몸짓과는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정혁을 보며 한 번 더 조소한 은서가 수영장 밖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젖은 몸을 따라 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하.”
기막힌 상황에 헛숨을 뱉은 은서가 얇은 셔츠를 손으로 꾹꾹 쥐어짰다.
초가을의 서늘한 공기에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춥고, 짜증나고.
그냥 이 자리를 빨리 뜨고만 싶었다.
“……어딜 가려고요?”
“그쪽하고는 텄으니 다른 남자 찾으려고요.”
차갑게 답한 은서가 정혁을 지나쳤다.
그러자 뒤에서 작게 한숨 소리가 들린 듯도 했다.
“보내준다고는 안 했는데.”
성큼 다가온 정혁이 은서의 앞을 가로막았다. 은서가 걸어온 뒤로 물 자국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딱히 다른 남자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도 아니고.”
정혁의 시선을 따라 은서가 제 몸을 빠르게 훑었다.
몸매의 굴곡이 드러나는 건 물론, 하얀 셔츠가 몸에 달라붙어 속옷의 디자인까지 알 수 있을 만큼 적나라하게 비치고 있었다.
갑자기 추운 것도 같고, 더워진 것도 같아 은서는 양팔을 감싸 안았다.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은 몰골이 아닌 건 맞지만, 그게 저 남자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밀당이라고 해두죠.”
“뭐라고요?”
황당한 대답에 은서가 눈살을 찌푸렸다.
“확인하고 싶은 것도 있었고.”
마지막은 흘리듯이 말한 그가 은서의 어깨 위에 제가 벗겨냈던 재킷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자신이 입고 있던 재킷도 벗어 은서의 머리까지 가리도록 덮어씌웠다.
“이게 뭐 하는…….”
“얼굴 팔리는 거 싫잖아요.”
“…….”
은서가 숨을 들이켰다.
신경 쓰고 있었단 걸 어떻게 알았을까.
라운지 바에서도, 그를 따라 내려오는 동안에도 혹시나 중훈의 지인을 마주칠까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대놓고 티를 낸 건 아니었다.
“같이 올라가요. 내가 저지른 일, 수습도 내가 할 거니까.”
퇴로를 막듯 정혁이 가볍게 은서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
밀쳐내면 되는데, 이상하게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은서는 겹쳐진 두 장의 재킷을 꼭 쥐며 입술을 감쳐물었다.
·“씻고 나와요.”
정혁이 은서의 어깨에 걸쳐두었던 재킷들을 걷어내며 담백하게 말했다.
그새 물을 먹어 축 늘어진 재킷 두 장이 엉겨 붙은 채 그의 손에 딸려갔다.
“…….”
은서는 넓은 룸 안을 빠르게 훑은 뒤 조심스레 발을 뻗었다.
정혁이 자신을 데려온 곳은 호텔 최상층에 있는 스위트룸이었다.
“욕실은 안쪽 걸 써요.”
거실 소파로 간 정혁이 은서를 보지도 않은 채 침실 쪽을 손짓했다.
‘인심 쓰는 것도 아니고.’
그의 덤덤한 태도는 마치 길 가다 발견한 비에 쫄딱 젖은 강아지를 도와주는 모양새였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정혁을 잠자코 노려보던 은서는 짙은 갈색 바닥 위에 깔린 카펫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걸음을 옮겼다.
짜증과는 별개로 얼른 젖은 몸을 녹이고 싶었다.
어느새 파랗게 변한 입술 사이로 이가 딱딱거리며 부딪치는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몸이 추워지니 정혁에 화가 났던 것도,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됐는지도 생각하기 귀찮아졌다.
욕실에 들어선 은서가 뻣뻣하게 굳어있던 어깨의 힘을 풀고 단추에 손을 가져갔을 때였다.
똑똑.
밖에서 정혁이 짧게 문을 두들겼다.
‘설마?’
이제 와서 마음이라도 바뀐 걸까.
단추를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네.”
“실례.”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성큼 안으로 들어온 그가 침실 쪽으로 난 창의 블라인드를 빠르게 내렸다.
“밖에서 보이거든.”
“아.”
“그럼.”
그는 볼일을 다 봤다는 듯 깔끔하게 욕실 문을 닫고 나갔다.
‘뭘 긴장한 거야.’
저 남자가 그럴 마음이었으면 아까 유혹했을 때 진작 넘어왔겠지.
순간 긴장한 자신이 어이없어 실소한 은서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샤워기를 틀었다.
·“바지는 너무 커서…….”
하얗게 드러난 맨다리에 내려앉는 정혁의 시선에 은서가 어색하게 중얼거렸다.
속옷은 찝찝하긴 해도 드라이기로 어느 정도 말려 입었지만, 쫄딱 젖어버린 겉옷은 되살릴 방법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가 내준 옷을 입은 참이었다.
셔츠는 소매를 몇 번이나 걷어 올려 대충 입었는데 바지는 허리가 커 흘러내리는 통에 도저히 입을 수가 없었다.
귀 끝이 붉어진 은서는 허벅지 반을 아슬아슬하게 가린 흰 셔츠 끝을 잡고 아래로 끌어내렸다.
“앉아요.”
다행히 은서의 행동을 오해하지 않았는지 금방 시선을 돌린 남자가 제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저기요.”
은서는 앉는 대신 정혁의 시선을 다시 제게로 이끌었다.
“그쪽은…… 나랑 대체 뭘 하고 싶었던 거예요?”
질문을 들은 남자의 눈썹 끝이 올라갔다.
은서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씻는 내내 생각한 질문이었다.
궁금했다. 정혁의 속내가.
흡연실에서의 대화는 분명, 정혁이 먼저 유혹해 오는 거라고 느꼈었다.
그랬는데 경험이 없다는 걸 눈치채고 중간에 마음이 바뀐 걸까? 어이없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꼬여드는 여자를 피곤해하는 남자라고 하니, 처음인 여자랑 잤다가 제게 매달릴까 봐 걱정이 됐나 싶었다.
“그러는 차은서 양은 나랑 뭘 하고 싶었던 건데?”
“…….”
“정말 나랑 잘 생각이었나?”
그랬다.
위험해 보이는 남자와 안전한 일탈을 해 볼 생각이었다. 우습게도.
은서는 정혁의 송곳 같은 시선에 눈을 내리깔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얼굴을 붉히게 하는 이토록 노골적인 질문은, 쉽게 정혁의 도발에 응해버린 대가였다.
“무슨 허세인지 모르겠지만, 차은서 양이 원하는 하룻밤 일탈. 그런 거 내 취향이 아니거든. 흥미도 없고.”
“……그래요, 처음부터 내가 착각한 모양이네요.”
여자는 돌 같이 보는 남자라던 현주의 말이 생각났다.
아무리 경험이 없어도 그렇지, 남자가 보내는 신호를 오해하다니.
창피함에 얼굴이 다 후끈거렸다.
“그래도 한번 넘어가 줄까 고민은 했지.”
“……네?”
민망함에 애꿎은 옷자락만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이 딱딱하게 굳었다.
“섹스할 생각이었다고. 차은서 양과.”
“…….”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고.”
“어째서요?”
은서의 눈동자에 복잡한 의구심이 떠올랐다.
“원하는 걸 쉽게 내주고 싶지 않아졌거든.”
정혁의 한쪽 입꼬리가 삐딱하게 올라섰다.
정확히는 은서의 속내를 읽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게 맞았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위태위태한 그녀의 마음속이.
“그러니 유혹해 봐요.”
“!”
“내가 차은서 양을 안지 않고서는 못 배길 수 없게끔 만들어 보라고.”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요?”
황당함에 실소가 저절로 나왔다.
“원하잖아, 도망칠 곳.”
“…….”
“내가 도피처가 되어 주겠다고. 차은서 양의.”
*은서는 차창에 비치는 정혁의 옆얼굴을 힐긋 살폈다.
머릿속에는 조금 전 그와 나눈 대화가 재생되고 있었다.
도피처라…….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속내를 꿰뚫은 정혁의 말에 굳은 입술을 가까스로 열어 답했다.
“말이 이랬다가 저랬다가, 그 나이 때의 남자는 다 하정혁 씨 같은가 봐요?”
그가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자 그는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었다.
“거절의 뜻으로 수영장에 냅다 집어 던지고 말이죠.”
“안 그랬으면, 그냥 얌전히 물러섰을 거잖아.”
“……이만 갈게요. 우리 볼 일은 여기서 끝난 것 같으니까.”
쉽게 정곡을 찌르는 그에게 반박할 수 없었다. 은서는 빤히 보는 그의 시선을 외면한 채 젖은 옷을 집어 들었다.
“옷, 맡기려고 했는데.”
“맡겨놓고 기다리는 동안 대화라도 나누시게요?”
톡 쏘아붙이자 그 꼴을 하고 갈 거냐고 묻는 대신, 정혁은 긴 다리를 매끄럽게 일으켜 세우고 은서의 뒤를 따라왔다.
“왜요?”
“데려다주려고.”
“됐거든요?”
앙칼진 대답에도 어깨만 으쓱한 그는 다른 재킷을 꺼내와 은서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말없이 앞서는 그는 무심한 표정이었지만, 은서를 절대 혼자 보내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태도였다.
도대체가,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였다.
“여기서 내려주세요.”
익숙한 풍경에 생각을 멈춘 은서가 몸을 바로 했다.
정혁은 군말 없이 부드럽게 차를 세웠다.
은서가 컴컴한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정확히는 걸어서 5분 정도 되는 거리였지만, 혹시 모를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옷은…….”
손잡이를 잡고 열려던 은서가 머뭇거리며 정혁을 돌아다봤다.
어떻게 해야 하지?
돌려준다고 해야 하나?
고민하느라 다음 말을 하지 못하는데 커다란 손이 불쑥 은서의 가슴팍으로 다가왔다.
“?”
움찔한 은서의 눈에 포켓에 미끄러져 들어가는 명함이 느리게 들어왔다.
“연락해요.”
정혁의 긴 손가락이 다시 핸들 위에 내려앉았다.
“또 봅시다?”
“…….”
결국 정혁의 인사에 답하지 못하고 차에서 내린 은서가 언덕길을 올랐다.
슬쩍 돌아보니 그의 차는 아직 떠나지 않고 제자리에 있었다.
은서는 포켓에 손가락을 넣어 그가 꽂아둔 빳빳한 종이를 꺼냈다.
고급스러운 까만색 종이에 이름과 연락처가 새겨져 있었다.
[대표, 하정혁.]
깔끔한 회사 로고 아래에 박힌 그의 직함과 이름이 낯설게 다가왔다.
‘다시 볼 일이 있을까.’
은서는 괜히 명함을 문질러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이 쿵덕거리는 게 누군가에게 들킬까 불안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