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4화 (4/82)

4.

“알려 달라?”

은서의 말뜻을 가늠하듯 정혁의 눈이 갸름해졌다. 그의 긴 손가락이 천천히 턱을 문지르다 내려갔다.

“내가 뭘 가르칠 줄 알고 겁도 없이. 안 그래요? 차은서 양.”

그의 눈동자가 재미있는 걸 발견한 듯 반짝였다고 느꼈다면 미친 걸까.

은서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빤하지 않나요? 앞으로 우리가 뭘 할지.”

은서는 부러 눈에 힘을 줬다.

이 남자와 자겠다고 마음을 먹은 이상, 그와의 기 싸움에서 밀리고 싶지 않았다.

“아까 나눈 대화로, 충분히 확인했다고 생각하는데요.”

“…….”

“아닌가요?”

“…….”

생각보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응? 두 사람 왜 그러고 있어?”

뒤늦게 문을 열고 등장한 현우가 의아해하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잘못 짚었나.

어린 애의 허세라고 생각했는지도.

몸을 돌리려는 찰나, 커다란 손이 은서의 손목을 지그시 감싸왔다.

“간다.”

몸을 일으킨 그가 현우에게 작별을 고했다.

“응? 갑자기?”

“나중에 보자.”

“아아, 그래, 그래. 가라.”

눈을 동그랗게 뜬 현우가 두 사람의 이어진 부위를 보며 수긍했다.

은서는 순순히 정혁의 뒤를 따라 룸을 나섰다.

어쩐지, 잡힌 손목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뜨거웠다.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누른 정혁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룸을 벗어나자마자 그는 미련없이 은서의 손목을 놓아버렸다.

괜히 허전해진 기분에 은서는 그의 손이 닿았던 부근을 몰래 어루만졌다.

시원하게 자리를 뜨는 정혁의 뒤로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던 현우가 생각났다.

현주의 말이 사실이었던 걸까. 현우는 꼭 꿈이라도 꾸는 사람처럼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내가 아무리 자유로운 영혼이라지만 너한테 이상한 남자 붙여주겠니? 내 체면이 있는데? 그리고 나 의외로 눈 높아서 깔끔한 사람들 아니면 안 놀아.”

“…….”

“저 오빠 노리는 여자들 엄청 많아. 본인은 정작 별 관심도 없는 모양이지만. 진짜 여자관계 깔끔한 건 내가 보장할 수 있어. 그러니까 안심해.”

이 남자를 선택하는데 현주의 말이 조금의 영향도 없었다고는 못 하겠다.

은서는 이런 미친 일탈을 저지르면서도 안전망을 설치해두는 제가 조금은 우스웠다.

앞뒤 재지 않고 질러놓긴 했지만, 막상 낯선 남자와 단둘이 나오니 두려움이 일기도 했고.

“!”

지잉 울리는 휴대폰 진동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옆에 선 남자를 슬쩍 살핀 은서가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이야, 차은서 다시 봤다? 그 얼음 왕자를! 대박 사건! 확 자빠트려, 알았지? 나중에 후기 알려줘야 한다?]

불끈 주먹을 쥔 이모티콘까지 봐 버린 은서는 행여나 정혁이 볼까 싶어 급히 휴대폰 화면을 껐다.

다행히 그는 이쪽에 별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은서는 정혁의 긴 손가락이 뒤늦게 로비 층의 버튼을 누르는 걸 지켜봤다.

‘잘까? 자게 되겠지?’

그러려고 불러낸 거니까.

솔직히 경험이 없으니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처음인 거 티 날까?’

혹시나 비웃으면 어쩌지…….

눈을 꾹 감았다 뜬 은서의 얼굴에 비장함이 피어났다.

괜찮다. 그런 자식이라면 이쪽에서도 사양이다.

묘하게 끌린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반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연애는 사절이고, 사랑은 더더욱 싫다. 열렬하고 뜨겁던 사랑의 끝이 얼마나 지저분한 막장이 될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건 단지…… 그래, 일탈을 위한 하룻밤일 뿐이다.

생각이 정리됨과 동시에, 엘리베이터가 경쾌한 알림 소리를 내며 로비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손을 뺀 정혁이 은서를 힐끗 보고는 먼저 발을 내디뎠다.

느릿하게 걷는데도 긴 다리 때문인지 몇 걸음 가지 않아 그는 금방 데스크에 다다라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지배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나와 정혁을 응대하는 게 보였다.

정혁이 무언가를 이야기하자 중년의 남자가 과할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오빠 허우대만 잘난 사람 아니야. 대학 다니면서 투자회사 차렸는데, 몇 년 만에 엄청나게 키웠거든. 집안도 빵빵하고, 본인 스펙도 빵빵하고 아주 빵빵한 남자라고.”

흡연실에서 엄청난 비밀을 공유하듯 속닥이던 현주의 말이 생각이 났다. 아무래도 현주가 과장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혹시 중훈과도 연이 있는 사람이면 어쩌지.

덜컥 걱정이 샘솟았다. 정계에 몸담은 중훈의 인맥은 여기저기에 있으니까.

저 사람과 엮인 게 잘못돼 중훈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는 날엔 머리털이 통째로 밀려 집에 감금될 것이다.

‘마지막 학기…….’

어깨를 움츠린 은서가 입술을 즈려 물었다.

중훈의 등쌀에 휴학과 복학을 번갈아 하며 겨우 맞이한 학기였다. 하룻밤의 실수로 그간 참아왔던 시간을 버릴 수는 없었다.

흔들리는 결심에 망설이는 찰나, 정혁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춰왔다.

은서를 아래위로 가볍게 훑은 그가 고개를 옆으로 까딱하며 가야 할 방향을 일러주었다.

그의 차분한 몸짓에 날뛰던 불안함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래. 괜찮을 거다.

오늘 밤의 일이 내게 일탈이듯, 그에게도 눈 뜨면 잊게 될 일탈이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손을 말아 쥐고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걷자 정혁이 금방 은서의 곁으로 따라붙었다.

엘리베이터에 다시 오르자 정혁의 손가락이 3층을 눌렀다.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3층은 객실이 아닐 텐데?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을 한 은서를 보던 정혁이 한쪽 입꼬리를 슥 끌어올렸다.

“수영은 할 줄 알아요?”

“네?”

그가 미간을 찌푸린 은서를 데려간 곳은 야외 수영장이었다.

“……뭐예요, 이게?”

상황 판단이 안 된 은서가 정혁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표정 볼 만한데.”

한 걸음 은서 앞으로 다가선 정혁의 긴 손가락이 은서의 재킷 깃을 쓸어내리다 그 안으로 살짝 파고들었다.

“무슨……!”

정혁이 물 흐르듯 벗겨낸 은서의 재킷을 근처 선베드 위로 휙 던졌다.

“화는 한꺼번에 내도 안 늦어요.”

“뭐, 뭐 하는 거예요?”

느닷없는 그의 행동에 잔뜩 경계하던 은서는 갑자기 허리를 안아 올리는 정혁에 빽 소리를 질렀다.

순식간에 허공으로 몸이 붕 떠오른 탓에 은서는 본능적으로 정혁의 어깨를 부여잡아야 했다.

“내려놔요, 얼른!”

그의 걸음을 따라 몸이 덩달아 흔들거렸다.

당혹스러움에 몸부림이 더 커질 때쯤, 갑자기 몸을 단단히 잡고 있던 힘이 훅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

풍덩.

귀를 때리는 커다란 소리가 이내 먹먹해져 멀어졌다. 그제야 은서는 제가 물속에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

“푸하.”

놀란 마음에 허우적대던 은서는 발이 바닥에 닿는다는 걸 인지하고서야 몸을 바로 세웠다.

물을 먹진 않았지만 놀란 나머지 심장이 미친 듯이 방망이질했다.

금방 물을 먹은 셔츠와 청바지가 질척하게 온몸에 달라붙었다.

“……하.”

기가 막힌 상황에 헛웃음이 나왔다.

뭐, 일탈? 하룻밤을 보내?

미쳤어, 차은서.

밑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열기가 혼자 김칫국을 사발로 마신 거에 대한 허탈함인지, 아니면 이런 폭력을 행사한 저 또라이 같은 남자에 대한 분노인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하하.”

그저 어이없는 웃음만 나와서, 은서는 젖어버려 축 늘어진 머리칼을 힘겹게 쓸어 넘겼다.

“미쳤어요?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은서는 저 높이 홀로 조각상처럼 서 있는 남자를 향해 눈을 치켜떴다.

“이제 좀 깔끔해졌나?”

몸을 낮춘 정혁이 수영장 끝에 아슬아슬하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여기 말이야.”

그가 여유롭게 웃으며 검지로 관자놀이 부근을 톡톡 두들겼다.

“여기까지 나 따라오는 동안 복잡했잖아요. 안 그래?”

“……그렇다고 사람을 물속에 집어 던져요?”

“수영할 줄 안다면서.”

“하.”

“이제 차은서 양이 생각할 건 딱 두 가지네요. 그 흠뻑 젖은 옷으로 어떻게 집에 갈까. 그리고 이 미친 또라이를 어떻게 할까.”

미친 또라이라는 걸 알긴 아는 모양이지? 적나라하게 자신을 지칭하는 그가 우스웠다.

묵묵히 물살을 가르고 정혁의 앞으로 다가간 은서는 그의 재킷 끝을 낚아채 힘껏 끌어당겼다.

하지만 슈트 천이 팽팽하게 당겨질 정도로 그의 허벅지 근육에 힘이 들어갔을 뿐, 그가 수영장에 빠지는 드라마틱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은서의 손길에 당해준다는 듯 정혁은 상체만 조금 더 숙였을 뿐이었다.

“하정혁 씨.”

은서는 짓씹듯 그의 이름을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눌러 뱉었다.

“내가, 지금, 어딜 갈 수 있을까요? 이렇게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못 갈 곳도 없죠.”

태연한 대꾸에 저절로 열이 끓어올랐다.

그래, 그의 말마따나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지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중훈에 대한 걱정도, 답답해서 뛰쳐나왔던 그 감옥 같은 집구석도.

“우리가 뭘 할지, 암묵적인 합의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요?”

은서가 따지듯 묻자 정혁이 재킷을 꽉 쥐고 있는 은서의 손을 천천히 감싸 안았다.

축축하게 젖은 손등 위로 뜨거운 열기가 내려앉았다.

은서의 손가락을 떼어낸 정혁이 손가락을 얽어 왔다. 깍지 낀 손에서 남자의 굵은 마디마디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정혁이 손을 제 쪽으로 당기자 은서의 몸이 덩달아 딸려왔다.

“……왜 자꾸 선을 넘으려 하지?”

정혁이 은서의 얼굴 위로 고개를 숙였다.

조금만 더 내려오면 입술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의 입술이 마치 훑고 올라가듯 은서의 귓가로 미끄러졌다.

“……남자랑 잔다는 게 어떤 건지, 알지도 못하면서.”

은서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옷을 벗기도 전인데 남자는 전부 알았던 모양이다. 아니, 객실까지 갈 필요도 없었던 거다.

“내가 볼 때는, 저 오빠 백 퍼센트 너한테 꽂혔어. 아니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현주야, 틀렸어. 네가 잘못 짚은 거야. 은서가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그만 올라와요.”

정혁이 수영장 구석의 계단을 눈짓하며 손을 놓으려 하자 은서는 양손으로 정혁의 재킷을 잡아 끌어당겼다.

쪽.

물기 섞인 소리가 고요한 수면 위에서 울렸다.

입술이 엉키듯 닿았다 떨어졌다.

“그러니까 주겠다잖아요.”

정혁의 서늘한 입술 위에 대고 은서가 읊조리듯 속삭였다.

“내 처음을. 그쪽, 하정혁 씨한테.”

“…….”

“못 알아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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