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왜 저렇게 봐?’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남자의 묘한 시선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은서는 남자가 있는 쪽을 보지 않으려 최대한 애썼다.
“그래서, 도훈 오빠는 어디 있는데? 응?”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그 자식 고용주한테 물어야지.”
현주의 재촉에 현우가 짜증을 내며 정혁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그 말에 눈이 세모꼴이 된 현주가 정혁을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오빠! 우리 도훈 오빠 작작 좀 부려 먹으랬지? 오빠가 대표면 다야? 돈 많고 잘생기면 우리 도훈 오빠 그렇게 부려 먹어도 되는 거야?”
“하아, 이게 무슨 개 같은 논리야. 미안하다, 정혁아. 바쁜데 불러내 놓고 이 혹 덩어리를 만나게 해서. 넌 좀 적당히 해. 쪽팔려 죽겠어.”
한숨을 쉰 현우가 창피하니 그만하라며 현주를 말렸다.
“도훈 오빠 보고 싶은데. 우리 오빠, 저녁은 먹고 일하는 걸까.”
그러거나 말거나 현주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제 할 말만 해댔다.
변한 것 없이 여전한 현주를 보며 빙긋 웃던 은서는 계속해서 느껴지는 시선에 입가를 굳혔다.
이 난리 통에도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현주와 현우를 힐긋 보기만 했을 뿐, 노골적으로 저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 화장실 좀.”
결국 남자의 시선을 견디지 못한 은서는 현주에게 귀엣말하고 룸을 빠져나왔다.
“도대체 왜 저렇게 보는 거야? ……옷 때문인가?”
화장실 거울 앞에 선 은서는 몸을 좌우로 틀며 제 옷매무새를 살폈다.
청바지에 체크무늬 재킷. 확실히 갖춰 입은 다른 손님들에 비해 튀는 옷차림이긴 했다.
그렇다고 이런 장소에 못 올 만큼 무례한 복장도 아니었다.
혹시 아는 사람인가? 아버지와 연관된?
“!”
몸이 순식간에 경직됐다. 기억을 되짚어 보던 은서는 곧 고개를 내저었다.
저렇게 존재감이 강한 남자를 기억 못 할 리 없었다. 굳어버린 자신을 보며 현주가 잘생겨서 놀랐냐며 놀려댔을 정도였으니까.
그렇다고 중훈이 은서에 대해 외부에 알렸을 리는 더더욱 없었다.
어렸을 때라면 모를까. 그 사건이 있고 나서부터 중훈은 외부에 은서를 드러내길 싫어했다.
“……내 알 바는 아니지.”
잠시 고민하던 은서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하룻밤 일탈을 위해 현주를 따라나섰을 뿐이다.
오늘 밤은 술을 진탕 마시든, 아니면 또 다른 방법을 찾든 중훈과 그 갑갑한 집구석을 잠시라도 잊게 해 줄 수단을 찾을 생각이었다.
금방 정혁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린 은서가 바 입구로 향할 때였다.
“저기요.”
“?”
소리가 난 쪽을 보자 머리를 뾰족하게 세운 남자가 빙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왜 혼자 나와 있어요? 아까 친구랑 들어가는 거 봤는데.”
다음에 나올 말을 예상한 은서가 미간을 좁혔다.
“마침 나도 친구랑 둘인데, 같이 안 놀래요?”
깔끔한 곳이라고 하더니, 이런 식으로 집적대는 남자는 어딜 가나 있는 모양이었다.
“아뇨, 괜찮아요.”
“에이, 저도 원래 이렇게 막 들이대는 사람 아니에요. 그냥 그쪽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래요.”
“네. 어쨌든 거절할게요.”
“우리 진짜 이상한 사람 아닌데? 제대로 쏠 테니까 우리랑 조인해요.”
“안에 일행 있어요.”
"이름이 뭐예요?”
은서가 튕기는 거라 여겼는지 남자의 질척거림은 쉬이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아, 진짜 말귀 못 알아듣네.”
은근슬쩍 팔을 붙잡으려는 남자의 손을 쳐낸 은서가 코웃음을 치며 읊조렸다.
“……뭐라고?”
“귀 멀쩡하시네. 하도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 어디다 떨어뜨리고 왔나 했더니.”
은서의 입에서 나온 말이 믿기지 않는 듯 남자가 눈을 끔뻑였다.
“그냥 갈 길 가시라고요. 그 쪽한테 관심 없으니까.”
치켜뜬 눈으로 노려보며 차갑게 뱉자 남자의 입꼬리가 잘게 경련했다.
“이런 싸가지를 봤나. 이게 오냐오냐해주니까…….”
입만 뻐끔거리던 남자의 눈이 사납게 올라갈 때였다.
“실례.”
낮은 목소리가 은서의 옆으로 파고들었다.
남자의 험상궂은 눈이 제 위로 향하는 걸 느낀 은서가 덩달아 고개를 뒤로 돌렸다.
“…….”
하정혁, 그 남자였다.
은서를 힐끔 본 정혁이 미끄러지듯 은서의 앞으로 나섰다.
옆을 스쳐 지나가는 그에게서 좋은 향기가 났다.
온몸을 에워싸듯 강렬하게 사로잡는 향기에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안 됐지만 내 일행이라서.”
은서의 시야를 가린 정혁이 여유로운 태도로 저보다 한 뼘은 작은 남자를 내려다봤다.
정혁이 풍기는 위험한 분위기를 감지한 건지, 우물쭈물하던 남자는 혀를 차며 한발 물러섰다.
뭘 어쩌지 못하고 자리를 뜨면서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남자는 은서를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남자가 떠나는 걸 본 정혁이 은서 쪽으로 다시 몸을 틀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혼자 해결할 수 있었지만. 뒷말을 삼킨 은서는 떨떠름하게 감사를 표했다.
대답 없이 은서를 빤히 보던 정혁이 갑자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웃어?’
나름대로 정중한 인사였는데.
뜻 모를 웃음에 은서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정혁을 올려다봤다.
“인형 같이 앉아 있길래 잘못 본 줄 알았더니.”
“……네?”
“기억 못 하는 건가, 역시.”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정혁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인형?
기억을 못 하다니?
알 수 없는 말만 하고 가버리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는데 설명하기 어려운 불쾌하고 찝찝한 감정이 치고 올라왔다.
“저기요.”
은서는 떠나려는 남자 앞을 막아 세웠다.
“절, 아세요?”
“……그만 들어가 봐요. 아까 같은 놈들을 또 마주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정혁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며 고개를 까딱였다. 흡연실로 가려다 실랑이하는 모습을 보고 끼어든 모양이었다.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는 그의 긴 손가락이 유려하게 움직이며 은서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처음부터 묘하게 사람의 눈길을 잡아채는 남자였다.
은서는 움직일 생각조차 없이 남자를 빤히 쳐다봤다.
남자는 어느새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즈려 물고 있었다. 흡연실이 바로 옆이었으니 곧장 그리로 가 불을 붙이겠지.
은서와 눈을 맞부딪치던 정혁의 붉은 입술이 길게 늘어졌다.
그 모습을 보는데 어쩐지 타는 갈증이 일었다.
“왜, 필요해요?”
정혁이 물고 있던 필터 끝을 혀로 핥으며 물었다.
“맛있나요, 그거?”
의외의 질문이라고 생각했는지 가만히 은서를 보던 그가 픽 웃었다.
얼핏 그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사라진 것 같았다.
“그게 왜 궁금하실까.”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미미하게 끌어올린 그가 텅 빈 흡연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커다란 손이 문을 잡아주는 걸 보니 따라 들어오라는 것 같았다.
“…….”
잠시 주춤하던 은서는 그의 뒤를 따랐다.
은서의 머뭇거림을 못 본 척해 준 정혁이 재킷 안에서 지포 라이터를 꺼내 들고 불을 붙였다.
깊게 빨아들이는 정혁의 볼이 움푹 패였다 제자리를 찾았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은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던 정혁이 담배케이스를 은서에게 내밀었다.
하얀 막대기에 이어 굵은 핏줄이 돋은 그의 손을 보던 은서가 호기롭게 한 개비를 빼 입술에 물었다.
“빨아요.”
딸깍 소리와 함께 열린 라이터가 작은 얼굴 앞으로 들이 밀어졌다.
“!”
노랗고 빨간 불꽃을 보며 깊게 숨을 들이마신 은서의 얼굴이 이내 터질 듯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예상했다는 듯, 정혁은 콜록대는 은서의 손에서 담배를 가져가 비벼 껐다.
“실연? 아니면, 뒤늦은 사춘기?”
찔끔 눈물이 맺힌 눈가를 보며 정혁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갸웃거렸다.
“……네?”
겨우 잔기침이 멎은 은서가 무슨 소리냐는 듯 정혁을 올려다봤다.
“꼭 그런 느낌이라서.”
“…….”
“그 나이에는 모든 게 재미있고 그럴 때 아닌가. 저기, 쟤처럼.”
흡연실 입구를 눈짓하는 정혁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현주가 손을 휘휘 흔드는 게 보였다.
그의 말마따나 활짝 웃는 그녀는 참 순수하고 해맑아 보였다.
저 사람은 스물다섯 살은 다 현주와 같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거, 상당히 꼰대 같은 발언이네요.”
헛웃음을 터트린 은서가 나지막이 조소했다.
“지금 그 표정.”
정혁이 한 박자 느리게 말을 꺼냈다.
“훨씬 낫네요, 아까보다.”
“…….”
“내 눈에는 꼭 울고 싶은데 못 우는 사람처럼 보여서 말이지.”
정혁이 지나가듯 흘리는 말에 정곡을 찔린 것처럼 눈가가 움찔 떨렸다.
우스웠다. 오늘 처음 만났을 뿐인, 낯선 사람인 당신이 뭘 안다고.
그런데…… 속내를 들킨 것 같은 기분은 왜일까.
“……그냥, 웃을 일이 없는 것뿐이거든요. 즐거울 일도.”
은서가 긴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쓸어 넘기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런가. 의외로 해보면 재미있는 것들이 많은데. 이것처럼.”
정혁이 은서의 입술에 닿았다 버려지고 만 장초를 눈짓했다.
“별로던데요.”
“맛을 알게 되면 다를걸요.”
“그쪽은 재미있는 게 많은가 보네요.”
은서가 도발적으로 되묻자 정혁의 눈동자가 위로 향했다 다시 은서에게 돌아왔다.
“글쎄, 중독될 만큼 재미있는, 그런 게 몇 개 있죠.”
“…….”
“예를 들면, 몸을 쓰는 거라든가.”
위험하게 느껴지는 그의 발언에 은서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그가 마치 날카로운 바늘로 제 피부를 찔러대는 것 같았다.
“뭐야, 둘이 무슨 이야기 해?”
호기심 가득한 눈을 한 현주가 결국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 곤란한 일이 있었는데. 도와주셨어.”
“그새 날파리가 꼬였었어?”
알만하다는 듯 현주가 혀를 끌끌 찼다.
“예쁜 것도 피곤해. 그렇지?”
머쓱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는데 몸을 돌린 정혁이 두 사람을 뒤로하고 흡연실을 떠났다.
“뭐야, 뭐였어?”
정혁이 떠난 걸 확인한 현주가 호들갑을 떨며 눈을 빛냈다.
“뭐가?”
“두 사람, 불꽃이 파바박. 이런 거 아니야?”
“전혀.”
“나 촉 되게 좋아. 너는 아니어도 저 오빠는 맞을걸? 계속 너 쳐다보는 거 못 느꼈어? 어찌나 빤히 보던지 네 얼굴에 구멍 나는 줄 알았잖아.”
“됐어, 그만 들어가자.”
흡연실의 매캐한 공기가 뒤늦게 느껴져, 은서는 현주의 팔을 잡아끌었다.
“꼭 잡아, 저 오빠 놓치면 너 꽤나 아쉬울 거다.”
파우더룸으로 향하던 현주는 끝까지 당부를 잊지 않았다.
그녀와 헤어져 혼자 룸으로 향하던 은서는 정혁과의 기묘했던 대화를 곱씹었다.
이토록 긴장시키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던가?
결단코, 처음이었다.
사람 속을 꿰뚫는 듯한 그의 눈빛도, 나른한 목소리도.
금욕적으로 보일 만큼 깔끔한 움직임 뒤에 무언가 은밀한 부분이 있을 것 같은 느낌도.
전부가 이상한 남자였다.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나지 않을 만큼 강렬한 사람.
은서가 우뚝 멈춰 섰다.
“…….”
문득 저 남자가 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위험해 보이는 남자가 해소할 길 없는 이 답답함을 잊게 해 줄지도 모르겠다는 예감.
주먹을 꽉 쥔 은서가 두터운 문을 밀고 룸으로 들어섰다.
혼자 앉아 있는 정혁을 보며 은서는 진땀이 난 손바닥을 바지에 슥 문질렀다.
오늘이 지나면 만날 일 없는 낯선 이.
모험해 보는 거다. 모 아니면 도니까.
숨을 크게 들이쉰 은서가 그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저기요.”
느른하게 앉아 있던 정혁이 눈동자만 올려 은서를 바라봤다.
“알려주세요, 그게 뭔지.”
“…….”
“하정혁 씨가 말한 재미있는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