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2화 (2/82)

2.

한적한 골목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는 이 층짜리 주택.

담벼락을 올려다본 은서는 한숨을 삼켰다.

담 너머의 풍경은 눈 감고도 그릴 수 있을 만큼 선연했다.

잘 관리된 잔디 위에 박힌 돌길을 따라 들어가면 드라마에서 툭 튀어나온 것처럼 소담하고 예쁜 집이 나온다.

하지만 집이 예쁘다고 들어가기 싫은 마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하아.”

가방끈을 꽉 쥔 은서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무거운 발을 안으로 들였다.

“다녀왔습니다.”

“은서 왔니?”

앞치마에 손을 쓱쓱 닦으며 나온 경미가 은서를 맞았다. 마치 화목한 집안의 표상처럼 그녀의 뒤로 구수한 된장찌개의 냄새가 났다.

“배고프겠다, 저녁 먹어야지?”

“왜 이리 늦어?”

경미의 말에 대답하기도 전, 중훈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거실에서 들려왔다.

“어서 들어가 봐.”

경미가 속닥이며 안을 향해 고갯짓했다.

경미의 초조한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오늘 저녁을 평온하게 보내긴 틀린 모양이었다.

“일찍 다니라고 했을 텐데.”

소파에 앉은 중훈이 읽던 신문을 턱 내려놓으며 까칠한 시선을 던졌다.

은서는 거실 벽에 걸린 시계를 흘낏 봤다.

“수업이 늦게 끝나는 게 있어서요.”

고작 저녁 7시였다.

중학생도 이 시간엔 자유롭겠다. 은서는 속으로 삼킨 대꾸 대신 단정하게 답했다.

“식사 준비 다 됐어요. 식기 전에 어서 드세요.”

중훈의 잔소리가 시작될 걸 눈치챘는지 두 사람 곁으로 다가온 경미가 재촉했다.

“크흠.”

은서를 못마땅한 눈으로 노려보던 중훈이 부엌으로 향하자 경미가 조용히 은서의 등을 쓸어내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경미가 눈을 끔뻑이며 위로를 건네왔다.

‘괜찮아요.’

작게 미소 지어 보인 은서는 경미를 따라 식탁으로 향했다.

은서가 앉는 걸 빤히 보던 중훈이 은서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빠.”

그 행동의 의미를 파악한 은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내놔.”

“아빠.”

“그럼, 사람 붙일까?”

거부감에 은서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중훈이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라는 듯 눈에 힘을 줬다.

단순한 협박일 뿐 그는 사람을 붙이지 못할 거다. 하지만 은서는 반항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잘 알았다.

은서는 입술 안쪽을 깨물며 재킷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중훈에게 건넸다.

빠르게 낚아챈 중훈은 통화 목록을 확인하고 메신저 앱을 실행해 제법 꼼꼼하게 훑었다.

은서가 누군가와 연락을 주고받았을 거라 믿는 태도였다.

중훈이 누구의 흔적을 찾는 건지 알고 있지만, 은서는 입을 다무는 걸 선택했다.

당신이 걱정하는 그런 일은 없다고 말해주면 될 일이지만, 그랬다가는 중훈의 분노가 더욱 솟구칠지도 몰랐다.

“행동거지 조심하고.”

별다른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 중훈이 휴대폰을 다시 은서에게 돌려주며 경고했다.

“명심해라. 넌 내 하나뿐인 딸이야.”

하나뿐인 딸. 중훈의 덤덤한 목소리에 은서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네게 많이 양보한 거 알고 있지? 학교도 결국 다니게 해줬고.”

“…….”

“졸업하면 얌전히 집에 있다가 결혼해, 착실한 사람으로 찾고 있으니까. 괜히 밖으로 나돌다가 내 얼굴에 먹칠하지 말고.”

“…….”

“어허.”

“……네.”

끝끝내 은서에게서 대답을 듣고야 만 중훈이 그제야 식사를 시작했다.

“당신이 잘 지켜봐.”

“은서가 워낙 잘 알아서…….”

“크흠.”

“……네, 그럴게요.”

은서의 편을 들려다 눈칫밥을 먹게 된 경미가 다급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은서는 자신을 짠하게 보는 경미의 눈빛을 애써 외면하며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식욕을 불러일으킬 만큼 식탁 위는 화려했지만, 입안에 든 음식들이 전부 모래알처럼 까끌거렸다.

.끔찍한 식사 시간을 버틴 은서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급히 소화제를 찾아 물도 없이 삼켰다.

“괜찮아, 괜찮아…….”

지금까지 잘 버텨 왔잖아.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달래는데 작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이 집에 은서의 방문을 저렇게 조심스레 두들길 사람은 경미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은서의 대답이 끝나자 살짝 열린 방문 틈으로 경미의 얼굴이 쏙 들어왔다.

“은서, 뭐 좀 더 먹어야지 않겠어?”

“괜찮아요.”

“아버지 지금 막 나가셨어. 오늘 밤엔 안 들어오신다니까, 혹시 친구들 만나러 가고 싶으면 다녀와.”

중훈의 일과에 따라 이따금 은서에게 자유를 주는 게 그녀가 해줄 수 있는 배려의 전부였다.

경미는 은서를 안타깝다는 듯 보다가 자리를 떴다.

“……그래, 나가자.”

숨이 점점 막혀오는 기분에 벌떡 일어난 은서는 벗다 만 옷을 다시 주워 입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은서, 나가니?”

“네, 학교 작업실에 가 있을게요.”

“왜 집에서 그리지 않, 아…….”

말을 하다 말고 경미는 제가 멍청한 소리를 했다는 듯 입을 틀어막았다.

중훈은 은서가 그림 그리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미술 전공인 탓에 대학도 강제로 자퇴할 뻔했던 은서였다.

그런 상황에, 이 집에 은서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공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다녀오겠습니다.”

씁쓸하게 웃으며 은서는 집을 나섰다.

가을이 시작되려는 건지, 저녁 공기가 서늘했다.

*“술이라도 마셔볼까.”

민정에게 연락할까 고민하던 은서는 곧 고개를 내저었다.

보나 마나 걱정 가득한 얼굴로 뛰쳐나올 것 같으니 오늘은 그냥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마음을 정한 은서가 학교 정문을 지나 미대 건물로 향할 때였다.

“차은서?”

높은 톤의 목소리가 은서의 발을 붙잡았다.

“……현주?”

부른 이를 확인한 은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1년 전에 졸업한 과 동기였다.

“오랜만이다? 넌 더 예뻐졌네?”

현주가 환하게 웃으며 은서에게 다가왔다.

“그러게, 진짜 오랜만이네. 학교는 어쩐 일이야?”

“아, 전시회 때문에 잠깐 교수님 좀 뵈러 왔지.”

“전시회…… 그렇구나.”

은서는 졸업과 동시에 개인전을 열며 화가로서 차근차근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는 현주에게 부러운 시선을 보냈다.

“그런데. 은서 네가 웬일이야? 이 시간에 학교엘 다 있다?”

“어쩌다 보니.”

삐딱하게 서서 은서를 아래위로 살핀 현주가 씩 웃으며 은서에게 팔짱을 껴왔다.

“보아하니 방황하는 어린 양 같은데, 내가 구제 좀 해줄까?”

“응?”

“아니, 네 얼굴에 딱 술이 필요하다고 쓰여 있는 것 같아서.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기도 하고, 내가 좋은 데 데려가 줄게. 어때?”

“…….”

그렇게 티가 났나. 머쓱해진 은서가 손등으로 제 볼을 쓸어내렸다.

“그냥 아버지한테 개기라니까?”

과에서 가장 자유분방한 삶을 살던 현주는 엄격한 통제 아래 사는 은서를 보며 늘 답답해했었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놀고 싶으면 논다.

자신의 욕망을 충실하게 이행하기로 유명한 현주였다.

그래서였을까.

“그래, 좋아.”

다른 때라면 거절했을 그녀의 호의에 응한 것은, 은서 자신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현주가 은서를 데려간 곳은 도심에 있는 호텔의 라운지 바였다.

“그렇게 긴장할 거 없어. 너 잡아먹는 그런 곳 아니야.”

키득거리며 은서의 옆구리를 쿡쿡 찌른 현주는 이미 여러 번 와 봤는지 망설임 없이 홀을 가로질렀다.

그 뒤를 따르며 은서는 서울 야경을 배경으로 한 공간을 슬쩍 살폈다.

잔잔한 음악이 깔린 곳에서,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곳곳에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은서는 괜한 안도감을 느꼈다.

솔직히 현주의 사생활을 익히 들어 알고 있는지라 걱정이 된 건 사실이었다.

“짜잔!”

가장 안쪽의 룸에 이른 현주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등장 한번 시끄럽다.”

“내가 오늘 귀한 손님을 모시고 왔거든.”

타박하는 남자의 말에 대꾸한 현주가 몸을 옆으로 틀고는 은서의 팔을 잡아 안으로 끌어당겼다.

룸 안에 앉아 있던 남자 둘의 시선이 은서에게 날아와 꽂혔다.

“……누구?”

현주에게 묻는 남자는 호기심과 경계심이 반반 섞인 표정이었다.

“내 친구야, 차은서라고. 우리 과에서 여러모로 제일 유명하지.”

은서가 도망갈까 걱정됐는지 현주는 은서의 손목을 잡아당긴 뒤 시원하게 문을 닫았다.

“은서야, 여기 있는 사람들 잘 봐 둬. 우리 물주가 되어 줄 사람들이니까.”

노골적인 단어에 아연실색해진 은서가 현주를 황급히 쳐다봤다.

“얘는? 그런 쪽 아니거든?”

저를 둘러싼 소문을 모르진 않는지, 현주가 깔깔대며 웃어댔다.

“미래의 네 고객님이셔. 돈이 많다고, 돈이. 그림 팔아야 할 거 아냐, 안 그래?”

눈을 가늘게 뜬 현주가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말아 흔들었다.

“이 사람이 우리 사촌 오빠야. 이번 내 개인 전시회 여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지.”

“하여간, 넌 말을 해도.”

“내가 뭘?”

“이현우예요.”

현주에게 가볍게 눈을 흘긴 남자가 살갑게 눈웃음을 쳤다. 그러고 보니 웃는 모습이 현주와 많이 닮아 있었다.

“그리고 이쪽은 내 친구인데, 하정혁이라고 해요.”

현우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긴 은서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안녕하세요.”

본능적으로 침을 삼킨 은서가 고개를 까딱였다.

짙은 눈썹에 움푹 팬 눈매가 날카로운 느낌을 주는 남자였다.

“차은서도 잘생긴 사람 보면 놀라?”

어느새 현우의 옆을 차지하고 앉은 현주가 재미있다는 듯 물으며 은서를 제 옆에 앉혔다.

잘생긴…… 그래, 확실히 조각 같은 남자였다. 보기 드문 미남이었고.

그런데 외모보다는,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눈빛에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시선이 잠깐 마주쳤을 뿐인데도 느껴지는 위압감이 상당했다.

“그런데 도훈 오빠는? 왜 안 보여? 같이 있는 거 아니었어?”

일행을 둘러보던 현주가 은서의 귓가에 대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야.’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어쩌냐. 오늘 안 왔는데.”

“뭐? 왜 그걸 이제 말해?”

“말했는데 네가 안 믿고 찾아온 거잖아.”

“거짓말인 줄 알았지! 일부러 나 못 오게 하려고!”

투덜거리는 현주를 지켜보던 은서는 볼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대각선 맞은편.

정혁이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차가운 표정과는 달리 기묘한 열기가 담긴 눈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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