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널 안고, 울리고-1화 (1/82)

1.

"……우는 건가."

느긋하게 몰아붙이던 정혁이 허리를 멈추고 물었다.

느끼는 지점만 골라 정확히 짓치던 그의 움직임이 멈추자 흔들거리던 시야가 또렷해졌다.

은서는 제 위에 군림하듯 자리 잡은 남자를 힐긋 본 뒤 곧장 시선을 떨어트렸다.

눅진하게 젖어 들려던 뇌가 점차 이성을 찾았다.

"……아뇨."

대답을 뱉어놓고 은서는 괜히 제 목 언저리를 감쌌다.

애써 괜찮은 척 힘을 줬는데도 떨리는 목소리가 나와 버렸다.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린 건 딱 한 방울이었는데, 그는 그 찰나의 미세한 반응도 놓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치 그녀가 울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던 사람처럼.

뜨거운 정염에 휩싸여 밀착되어있는 몸 사이로 어색한 침묵이 들어찼지만 은서는 입을 앙다문 채 버텼다.

솔직히 이 눈물의 의미를 그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저 자신도 왜 눈물이 나는지 알지 못했으니까.

"……."

고집스레 입을 다문 그녀를 내려 보던 정혁은 더 이상 묻는 대신 조용히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이쯤에서 관심을 끄려는 걸까? 은서가 안도하려던 찰나.

“……아! 으응.”

천천히 속도를 내기 시작하는 그의 움직임에 허리가 들리며 저절로 비음이 샜다.

그가 갑자기 멈췄던 탓에 희미해졌던 감각들이 되살아나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은서는 흐릿해져 가는 의식을 붙들기 위해 애썼다.

가장 깊은 곳까지 단단하게 들어선 걸 여유롭게 놀리면서도, 그의 짙어진 눈은 은서의 얼굴을 끈질기게 훑어댔다.

정혁과 눈이 마주친 은서는 손을 들어 축축해진 눈을 가렸다.

그가 저렇게 볼 때면 어쩐지 견딜 수가 없었다. 감정 없는 까만 눈동자가 집요하게 속을 파고드는 것만 같아서.

"안, 흣, 울어요."

시트 자락을 움켜쥐며 은서는 목소리를 쥐어짰다.

"……."

눈을 덮은 손 위로 정혁의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정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좀 보지 말아요.

"그래?"

이대로 그가 모르는 체 해줬으면. 그냥 넘어가 줬으면.

쾌감에 취해 흘리는 의미 모를 눈물 같은 거,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하지만 은서의 바람과는 달리 기다란 손가락이 수갑처럼 손목을 감아왔다.

어느새 그의 입술까지 끌려간 새하얀 손바닥 위로, 정혁이 낙인을 찍듯 입술을 눌렀다.

짙어진 눈동자는 여전히 그녀에게 박아놓은 채였다.

"……아쉽네."

정성 들여 주문을 새기듯, 정혁은 느리고 무겁게 입술을 놀리며 속삭였다.

"우는 게 더 예쁜데 말이야."

그의 낮은 목소리와 젖은 숨결이 더 가까워졌다.

“그 예쁜 얼굴이 일그러지고 엉망으로 울면…… 더 흥분되거든.”

그의 노골적인 말에 몸이 움찔하며 아래가 바짝 조여들었다. 적나라한 반응에 미간을 찌푸린 그가 낮게 침음했다.

“몸은 솔직하지. 안 그래?”

그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늘어졌다. 네 마음 따윈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말하는 듯 나른한 미소였다.

은서의 얼굴에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묘한 줄다리기 끝에 매달리고야 마는 이는 항상 정해져 있었다.

은서는 모든 걸 체념한 사람처럼 눈을 감았다.

처음부터 그는 정복자였고, 침입자였다.

그는 매사에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그녀를 취하고 쾌락의 늪에 빠뜨려 허우적대게 하는 순간조차도, 그는 늘 여유로웠다.

포식자처럼 상위의 저 높은 곳에서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내려다보는, 그런 남자였다.

하정혁은.

"그냥 빨리……."

은서는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이미 쾌감에 절여질 대로 절인 몸은 끝을 원하고 있었다. 예정된 순서였다.

은서는 정혁의 입술이 닿아있던 손바닥을 미모사처럼 오므렸다.

"우리 공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웃음기가 조금 섞인, 놀리는 기색이 가득한 말투였지만 따질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얼른요.”

그의 단단한 허벅지를 다리로 감아 당기며 재촉하자 정혁은 기꺼이 응하며 착실하게 은서의 가느다란 다리를 힘주어 잡았다.

빨라진 그의 움직임을 따라 미묘하게 멈춰있던 열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소리, 참지 말라고 했을 텐데."

흐드러진 쾌락 속에서 그의 명령 같은 말이 또렷이 들렸다.

"흐읏."

착실한 학생이라도 된 것처럼 은서는 깨물었던 입술을 열고 목 언저리에서 맴돌던 소리를 터트렸다.

맺혀있던 응어리를 떨치듯이 억눌려 있던 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다시 시작된 쾌감은 빠르게 몸과 이성을 잠식해서, 은서는 제가 다시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조차 인지할 수 없었다.

“하으, 흑…….”

신음인지 흐느낌인지 모를 소리를 흘리며 은서는 그저 정혁이 이끄는 대로 몸을 떨었다.

“그래, 잘하고 있어.”

정혁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넌 지금처럼 그냥 울면서 나한테 매달리면 돼.”

그의 커다란 몸 아래에 갇힌 이 순간만큼은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 없어.”

그저 태풍에 휩쓸리는 작은 돛단배처럼, 그가 움직이는 대로 철썩이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오늘 대설주의보가 발효되면서 간밤에 폭설이 내렸습니다. 10cm 가까이 눈이 쌓이면서 퇴근길 혼잡이 예상됩니다…….]

"……."

귓가에 선명히 들리는 낭랑한 목소리에 은서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을 몇 번 깜빡이니 암막 커튼 사이로 희끄무레한 빛이 보였다.

'아침?'

아무래도 어젯밤에 또 기절한 모양이었다.

“하아, 또?”

흐렸던 정신이 조금씩 맑아지자 은서는 노곤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이쯤 되면 제가 아니라, 그의 체력이 비정상적인 거라고 봐야 할 것 같았다.

흘러내리는 이불을 부여잡고 가슴팍을 가린 채 웅크려 앉은 은서는 조심스레 침실 밖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날씨를 알리는 TV 속 기상캐스터의 목소리 외에는 아무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갔나…….'

잠에서 깨어났을 때 옆에 그가 없는 건 꽤 드문 일이었다.

"누가 보면 서운해 하는 줄 알겠네."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그를 찾는 스스로가 우스워져 은서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움직여 침대를 벗어나자 이불이 흘러내리며 새하얀 나신이 흐릿한 어둠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몸 여기저기에 붉게 핀 열꽃은 아직 또렷했지만, 곳곳에 말라붙어있던 하얀 얼룩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깨끗해진 몸을 보자 은서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깨워서 샤워하도록 시키는 대신, 그는 꼭 이런 식으로 뒤처리를 했다.

언젠가, 물에 적신 수건을 들고 제 몸을 정성스레 닦는 정혁의 모습을 본 기억이 있다.

꽤나 시달리고 난 후였던지라 손 하나 깜짝할 수 없어 계속 잠이 든 척했다. 사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였던 것이 더 크긴 했지만.

다시 떠올려 봐도 믿기지 않는, 현실감 없는 광경이었다.

무심하고 서늘한 얼굴을 하고서 유리 다루듯 소중하게 어루만지는 손길이라니.

지칠 줄 모르는 성욕에 속죄라도 하는 건가.

가볍게 코웃음을 친 은서는 바닥에 나동그라진 가운을 주워 입었다.

허리끈을 대충 묶고 커튼을 걷어내자 생각보다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은서는 한강이 시원하게 펼쳐진 전경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침실 문을 열고 나갔다.

거실로 발을 내딛자 주인을 닮아 세련됐지만, 온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공간이 그녀를 맞이했다.

한남동의 펜트하우스. 그간 정혁과 갔던 곳과는 달리 그가 실제로 거주하는 집이었다.

익숙하게 부엌으로 간 은서는 컵에 물을 한가득 받아 한 번에 들이켰다.

밤새 지른 비명 같은 신음에 목이 쓰리다 못해 아렸다.

"하아."

입꼬리를 타고 흐른 물방울을 손등으로 훔치는데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전화한 이가 누구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정혁이 자신과의 연락을 위해 내준 휴대폰이었다. 저장된 번호라고는 하정혁, 그 하나였다.

은서는 서둘러 침실로 돌아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정혁에게 목소리를 들려주는 건 그녀의 의무였다.

그의 전화는 무조건 받는 것이 이 집에 있기 위한 조건 중 하나였다.

"네."

-……일어나 있었네.

길어진 신호에 끊으려 했던 건지, 전화를 받고서도 조금 지난 후에야 정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 일어났어요."

침대에 걸터앉은 은서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대답했다.

-저녁까지는 쓰러져있을 줄 알았는데. 체력이 좀 생긴 건가.

정혁의 말끝에 미묘한 웃음기가 묻어났다.

그의 우아한 외모나 말투와는 어울리지 않는 노골적인 내용이었다.

"덕분에요."

은서는 미간을 찡그렸다 피며 태연한 척 대꾸했다.

-오늘 늦을 거야.

"얼마나요?"

-…….

수화기 너머 침묵에 아차 싶어진 은서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늦어진다는 그의 말에 불안해진 속내가 쏜살같이 튀어 나가고 말았다.

-왜, 벌써 그리운가? 어젯밤에 기절한 걸로는 부족했어?

놀려대는 걸 보니, 다행히도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제 목소리 안 들려요? 완전히 가라앉은 거."

이유 모를 안도감을 느낀 은서가 반항하듯 투정 섞인 짜증을 내자 휴대폰 너머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밥은.

"먹을게요."

-잘 챙겨 먹어. 그럼 예뻐해 줄 테니까.

"두 번 예뻐했다가는 목소리를 잃겠어요."

-말대꾸하는 걸 보니 쌩쌩한데. 어제 많이 봐준 것 같아 후회되네.

봐줬다니.

기절할 때까지 몰아붙이던 남자가 할 말은 아니었다.

"……그만 끊을게요, 목이 아파서요."

-그래.

담백한 그의 말을 끝으로 연결이 끊어졌다.

먼저 끊겠다고 한 건 저였음에도 은서는 이상한 허전함에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봐야 했다.

"밥, 먹기 싫은데."

톡 쏘는 탄산처럼 앙칼지게 굴던 기운은 사라지고 무기력한 우울감이 전신을 에워쌌다.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몸을 웅크리니 서늘한 한기가 가운을 타고 피부에 스며들었다.

은서는 비어있는 옆자리를 가만히 손으로 쓸어보았다.

한 번씩 악몽을 꾸다가 잠에서 깰 때면, 항상 그의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고 있었다.

그럴 때면 근육이 빼곡하게 잡힌 그의 커다란 몸이 주는 약간의 갑갑함과 온기에 묘하게 안심이 되고는 했다.

최근에는 그와 관계를 나누고 지쳐 잠들기 바빠서 악몽을 꾸는 횟수조차 줄어버리긴 했지만.

휴대폰을 다시 집어 든 은서는 달력 앱을 눌러 눈으로 날짜를 셌다.

“한 달……. 한 달이라.”

은서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내일이면 벌써 이곳에 갇힌 지도 한 달이다.

자유로운 감옥이었다.

지난 한 달간 집 밖으로 나간 적은 없었다. 먹고, 자고, 그와 몸을 섞은 게 전부였다.

스스로 이곳에 걸어 들어와 모든 시간을 속박당하고, 그에게 목줄을 내주며 길들여지는 걸 선택했다.

누구의 강요도 아닌 제 선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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