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가 나보고 폭군이래?-151화 (완결) (151/151)

<151화>

포넨트는 양쪽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적군인가?’

긴장하며 눈을 가늘게 뜨자 가장 선두에서 달려오는 사람이 보였다.

“키네시아?”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페라포네가 아군쪽으로 돌아가며 소리쳤다.

“진격해!”

포넨트가 바로 검을 뽑아 들며 한 손으로 전차의 고삐를 잡았다.

그는 전차를 옆으로 틀어 키네시아에게 달려갔다. 적군의 창을 피하려던 키네시아가 말에서 떨어지는 게 보였다.

파라돈의 기사가 그녀를 찌르기 위해 다시 창을 높게 들었다.

포넨트는 그 사이를 끼어들며 기사의 공격을 걷어 내고 기사가 탄 말의 다리를 베었다. 말이 앞으로 쓰러지며 기사가 떨어졌다.

바닥을 구르는 기사를 지나친 포넨트는 키네시아를 끌어 전차에 태웠다. 그리고 곧장 고삐를 휘둘러 아군 쪽으로 넘어가며 물었다.

“너,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온 거야? 반대편에 저 군사는 뭐고?”

“리아가 나 먼저 돌아가라고 하는 게 심상치 않아서 국경에서 헤어질 때 타솔라 경을 아미르 공작가로 보내 군사를 불러왔어. 나도 렘록에 도착하자마자 군사를 끌고 왔고.”

멀리서 군대를 지휘하고 있는 반겔레스 셰피오 백작이 보였다. 반대쪽에서는 아미르 공작이 끌고 온 군사와 타솔라가 파라돈의 군사와 맞서고 있었다.

양옆과 정면에서 압박하니 10만의 군사도 점점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포넨트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덕분에 살았어. 안 그래도 막막했는데. 다친 곳은 없어?”

키네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 너머를 바라봤다.

페라포네 역시 그녀의 아군들 뒤에 서서 키네시아를 보고 있었다. 키네시아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포넨트에게 말했다.

“페라포네 황태자를 없애야 해.”

지금 몰아낸다 하더라도 페라포네 황태자를 죽이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그녀는 돌아가면 황제가 되어 손실된 전력을 쉽게 회복하고 다시 에피파네스를 노릴 것이다.

한 번 당하고 나면 에피파네스를 우습게 여기지 않을 테니 더 교묘하게 판을 짜고, 성격상 더 확실하게 짓밟으려 하겠지.

그런 위협스러운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페라포네를 이 전쟁터에서 처리해야 한다.

고개를 돌려 포넨트를 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포넨트는 전차에 묶여 있는 말 하나를 풀어 곧장 달려 나갔다.

키네시아는 걱정을 애써 눌러 내리고 자신도 검을 뽑았다. 간간이 날아오는 화살을 쳐내며 그녀가 목소리를 높였다.

“기사단장!”

멀지 않은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기사단장이 키네시아에게 다가왔다. 키네시아는 포넨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궁수들을 데리고 포넨트를 엄호하며 페라포네 황태자를 공격해주세요. 반드시 페라포네 황태자를 죽여야 해요.”

“예, 저하.”

기사단장이 포넨트의 뒤로 따라붙으며 포넨트에게로 향하는 공격을 어느 정도 막아냈다. 포넨트는 한결 수월하게 적진의 중앙을 뚫고 들어갔다.

한결 가까워진 페라포네의 볼에 화살이 스쳤다.

압도적으로 찍어 내릴 수 있었을 것 같았던 에피파네스를 상대로 고전하게 되자 페라포네는 신경질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총관. 봉인 쪽에서는 연락이 없나?”

“예.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페라포네는 키네시아가 끌고 온 기사들을 보았다.

오랫동안 공들여 키운 느낌이 든다. 저런 짓을 키네시아나 포넨트가 생각해 냈을 리 없었다. 국왕 부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라네리아 공주.’

만약 일이 잘 풀리지 않아 파라돈의 마법사들이 드래곤을 죽이지 못하면 그들은 반드시 이곳으로 올 것이다.

“총관. 궁전에 마법사가 몇 명이나 남았지?”

“10명 남짓 남았습니다.”

“전부 오라고 해. 군사도 더 끌어와.”

“하지만 그렇게 되면 레튜니아의 전투에서 병력이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생각이 바뀌었어. 에피파네스부터 완전히 점령할 거야. 일단은 드래곤과 이라네리아 공주부터 죽여야겠어.”

“알겠습니다.”

총관이 사람을 시켜 가장 가까이에 있는 도시로 군사를 요청하고 마법 도구로 궁전에 연락을 넣었다.

연락을 받은 마법사들이 바로 순간이동을 사용해 전쟁터로 왔다.

마법사들이 나타나자 전쟁터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기세를 얻은 파라돈의 군사들 뒤로 지원군까지 도착했다.

키네시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마법사가 있으니 뚫리는 건 시간문제다.

‘후퇴를 해야 하나? 아니면 항복?’

하지만 마법사들은 자리만 지킬 뿐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키네시아가 그 광경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사이 땅에 거대한 그림자가 졌다. 돌풍이 불어오고, 전쟁터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움직임을 멈췄다.

키네시아도 고개를 들었다.

집채만 한 크기의 무언가가 하늘을 배회하고 있었다. 태양 빛에 괴생물의 몸체가 은빛으로 반짝이자마자 키네시아는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이 펠리온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난생처음 보는 생물체에 페라포네의 얼굴에도 언뜻 두려움이 깃들었다.

“하늘! 궁수들은 하늘을 조준해라!”

페라포네가 소리치자 궁수들이 하늘을 향해 화살을 쏘아 댔다.

“전하! 화살이 닿지 않습니다!”

“화살이 다 떨어졌습니다!”

궁수들의 외침에 몇몇 병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페라포네와 총관이 병사들을 통솔하려 해 봤으나 이미 두려움에 질린 사람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키네시아가 기사단장에게 말했다.

“아군을 뒤로 물리세요.”

파라돈의 군사는 도망치고 에피파네스의 군사는 후퇴하니 중간에 커다란 빈 공간이 생겼다.

그 자리에 드래곤이 내려앉자 페라포네가 마법사들을 내보냈다.

그들이 힘을 합쳐 거대한 불기둥을 만들었으나 펠리온이 꼬리를 휘두르니 그대고 사라지고 말았다. 갑자기 파훼된 마법은 그대로 충격이 되어 시전자에게 돌아갔다.

휘청거리는 마법사들을 보며 페라포네가 이를 갈며 활과 화살을 주워 들었다.

그녀가 펠리온의 눈을 노리는 사이, 적진에 파고든 포넨트가 그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총관이 그 공격을 막아 냈다. 포넨트가 총관을 밀어 내자 기사단장이 끼어들어 포넨트를 대신했다.

“각하는 황태자에게 가십시오!”

포넨트가 고개를 끄덕이고 페라포네에게 달려들며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페라포네가 본능적으로 활을 들었다. 포넨트가 휘두른 검이 활대에 부딪혔다.

양손으로 활대의 양 끝을 붙잡았지만 훈련받은 남성의 힘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팔이 밀려나자 칼날이 목에 닿았다.

다른 병사들은 펠리온의 공격에 다가오지 못하는 상태였다.

상황이 궁지에 몰린 것을 깨닫자 페라포네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팔에 온 힘을 쏟았다.

“에피파네스는 양심도 없나? 제국의 황제를 죽게 해 놓고 반성하는 기색이 없군.”

방심하게 해서 도망칠 생각이었으나 포넨트는 꿈쩍도 하지 않고 검에 제 무게를 실었다.

“어차피 요르고스 따위 신경도 안 썼지 않습니까?”

검날이 페라포네의 목을 깊게 베어 냈다.

페라포네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졌다. 당황한 파라돈의 총관이 기사단장의 검을 막으며 소리를 질렀다.

“퇴각하라! 당장!”

펠리온이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며 마법으로 아군을 끌어들였다.

그 모습을 본 키네시아가 제 옆까지 온 셰피오 백작에게 말했다.

“적군을 진압하세요.”

“예, 저하.”

셰피오 백작이 사기가 떨어진 적군을 완전히 제압했다.

키네시아에게 펠리온이 날아왔다. 그 주변으로 포넨트를 비롯한 아군들이 내려앉았다.

펠리온의 등장으로 전투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 마무리되고 있었으나 정작 그의 표정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키네시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너 괜찮아? 리아는?”

“……궁전에 있어. 너희도 이라네의 상황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데리러 왔어.”

포넨트가 펠리온의 팔뚝을 붙잡았다.

“리아한테 무슨 일 생긴 거야?”

“일단 궁전으로.”

펠리온의 말에 키네시아가 기사단장에게 말했다.

“우리는 먼저 돌아가 있을 테니 상황 정리하고 귀환해 주세요.”

“예, 저하.”

키네시아를 데리고 펠리온이 순간 이동을 사용했다.

공간이 궁전으로 변하자마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침대에 누워 있는 이라네리아였다. 그 옆에는 언제 온 것인지 플로레타가 앉아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봉인에 이라네가 들어갔어. 중간에 튕겨져 나오긴 했는데 영혼은 같이 봉인되었을 수도 있어.”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

키네시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펠리온이 고개를 숙였다. 그 대신 플로레타가 대답했다.

“봉인 마법진을 통과할 때 영혼에 손상이 있었던 것 같아. 어쩌면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어.”

멍하니 그 말을 듣고 있던 포넨트가 몸을 돌려 펠리온의 멱살을 잡아챘다.

“너 이 새끼! 안 말리고 뭐 했어? 같이 있었을 거 아니야!!”

펠리온은 입을 다문 채 이라네리아를 바라보다가 눈물을 흘렸다.

“막을 수가 없었어.”

봉인 마법진이 준비된 곳에 막 도착했을 때, 이라네리아가 펠리온의 양손을 잡고 부탁했었다.

“만약, 아주 만약에 라파일이 봉인을 깨트리려고 하면 내가 들어가서 설득할게.”

“……허락받겠다는 게 그거야?”

“응. 봉인이 깨지면 내가 죽는 건 물론이고 가족들과 죄 없는 사람들도 무사하지 못할 거야.”

“…….”

“봉인되면 라파일은 사라지겠지만 나는 아니잖아. 그가 사라지고 봉인이 풀리면 나는 돌아올 수 있을 거야.”

펠리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제 연인의 손을 잡고 부탁했다.

“기다려 줘, 펠.”

펠리온은 그 잔인한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라파일의 폭주에 이라네가 휘말려 죽으면 펠리온은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만일 봉인이 깨져 자신이 라파일을 막다가 죽으면 이번엔 이라네가 그를 기다려야 한다.

아주 긴 시간을. 그녀에게 그렇게 외로운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알겠어. 걱정하지 마. 나, 잘 기다리는 거 알잖아.”

이라네리아는 겨우 웃어 보이는 펠리온의 볼을 다정하게 쓸었다.

펠리온은 아무렇지 않은 척 그 손에 입을 맞췄다.

그는 내심 약해진 라파일이 마력을 이기지 못하고 쉽게 봉인당하길 바랐다. 그러나 그는 기어이 봉인을 깨트리려고 했고, 펠리온이 무리하는 것 같자 이라네는 망설임 없이 봉인 안으로 들어갔다.

사실 들어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결심을 막지 않기 위해 눈을 감고 입을 닫았다. 속으로 수도 없이 ‘기다리면 된다 그러면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라고 되뇌었다.

그리고 그녀가 들어가자마자 거짓말처럼 저항이 줄었다. 펠리온은 봉인을 견고하게 만들고 내리눌렀다. 조금만 더 하면 라파일을 완벽하게 봉인할 수 있었지만 아주 잠시 망설였다.

이라네의 몸이 밖으로 내던져진 건 그때였다.

라파일의 저항도 완전히 멎었다. 펠리온은 당장 봉인을 마무리하고 이라네리아에게로 달려갔다.

“이라네! 정신 좀 차려봐, 이라네!”

몸에서 영혼이 느껴지긴 했으나 어딘가 뜯겨 나갔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른 상처를 입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당장 성녀인 플로레타에게 데려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순간 이동을 하려는데 파라돈의 마법사들이 공격을 해 왔다.

10명이지만 이미 마법사들은 마력을 어느 정도 쓴 상태였기에 마력량이 드래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죽이고 싶었으나 제 분노보다 이라네가 우선이었다. 펠리온은 그들을 내버려 둔 채 바로 궁전으로 돌아가 이라네리아를 눕혀 놓고 플로레타를 데려왔다.

그리고 플로레타의 부탁으로 전쟁터에 있는 키네시아와 포넨트를 데리러 간 것이었다.

설명을 들은 포넨트가 펠리온의 멱살을 놓고 머리를 헤집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키네시아에게는 가족이니까 상의하자 어쩌자 하더니…….”

말은 그렇게 해도 알고 있었다. 말했다고 한들 뾰족한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키네시아는 포넨트의 어깨에 손을 얹고 플로레타를 보았다.

“죽은 건 아니지?”

“응.”

“우리가 뭘 어떻게 해야 해?”

“……기다리는 수밖에, 별다른 방법이 없어.”

***

전쟁이 마무리된 후, 안전하다는 판단을 내린 키네시아는 부모님을 모셔 왔다.

룩소르와 오틸리에는 이라네리아를 보자마자 한동안 눈물을 쏟아 냈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간호했다.

플로레타는 틈틈이 찾아와 신성력을 쏟아 주고 갔다.

한편 드래곤이 있다는 말에 레튜니아의 일부 귀족들은 영지를 바치며 에피파네스로 귀화하였다.

파라돈에는 새로운 황제가 즉위했다. 새 황제는 나이가 어렸기에 황후가 섭정하기로 했다. 그러자마자 키네시아는 침략에 관한 보상을 받기 위해 회담을 요청했다.

황후는 페라포네의 독단적인 선택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병장기와 말, 금화, 보석, 옷감 등 100여 가지가 넘는 물품과 옛 에피파네스의 영토를 돌려주겠다고 했다.

드래곤이 두려워 과한 보상을 제안한 것 같았으나 키네시아는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가지를 더 덧붙였다.

“파라돈의 역사고를 외부에 공개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건 좀 민감한 사항인데요.”

“전부 공개하는 게 안 되면 에피파네스와 연관된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특히 이라네 황제에 관한 것을요.”

“그 정도면 어렵지 않겠네요. 정리해서 보내드릴 테니 몇 개월만 기다려 주세요.”

키네시아는 에피파네스가 나온 부분만 정리한 역사서를 받기로 하고 돌아왔다.

“아직 깨어나지 않았어?”

“응. 전혀.”

“펠리온은?”

“몰라. 또 어디 돌아다니고 있겠지.”

포넨트가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이라네리아를 본 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검이나 휘두를래.”

“그래. 내가 있을게.”

포넨트가 방으로 나가는 것을 배웅하고, 키네시아는 이라네리아 옆에 앉았다.

“폭군 누명 벗길 준비 다 되었으니까 빨리 일어나, 리아.”

그녀는 멍하니 허공을 보다가 유난히 비어 보이는 이라네의 옆자리를 보았다.

펠리온은 다른 일을 하고 있어야 기다리는 게 수월하다며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아미르 공작에게 정체를 밝혔지만 정식으로 입양된 것이니 작위를 이어 달라는 말에 펠리온은 흔쾌히 후계자가 될 준비를 했다.

어떨 때는 전쟁터로 나가 에피파네스를 도왔고, 간혹 말없이 사라져서는 며칠간 어디 처박혀 있다가 돌아올 때도 있었다.

낮 시간에는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나 펠리온이 밤만 되면 이라네를 찾아온다는 것을 키네시아는 알고 있었다.

그는 이라네의 옆에 누워 이것저것 말을 걸다가 아침이 오면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남기며 사라졌다.

이라네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혼자 있는 게 익숙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 더 견디기 힘들 것 같았던 탓이었다.

“펠리온도 많이 힘들어하니까, 빨리 깨어나.”

그렇게 두 번의 겨울이 가고, 또 봄이 찾아왔다.

달빛이 가랑비처럼 내리는 날 밤, 모두가 떠난 이라네의 방에서 작은 기척이 느껴졌다.

이라네는 눈을 깜빡이며 몇 번 숨을 내쉬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마법석으로 불을 켜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아볼 방법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다 탁자 옆에 키네시아가 두고 간 책을 발견했다.

파라돈에서 받은, 이라네 황제의 일화와 업적이 담긴 책이었다.

이라네는 책을 몇 장 넘겨 보더니 픽 웃었다.

“그래. 이렇게 훌륭한 일을 많이 했는데, 누가 나보고 폭군이래?”

만족스럽게 웃으며 침대 밑으로 발을 내리는 찰나, 발코니 쪽 창문에서 ‘달칵’하고 작은 소음이 들렸다.

이라네는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닿은 곳에는 펠리온이 쏟아지는 달빛을 맞으며 서 있었다. 따뜻해진 바람에 긴 은발이 부드럽게 나부꼈다.

이라네는 책을 내려놓고 미소 지으며 처음으로 먼저 인사했다.

“안녕, 펠리온. 오랜만이야.”

펠리온이 이라네를 따라 입꼬리를 부드럽게 끌어올렸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고 반짝였다.

“응. 오랜만이야, 공주님.”

[누가 나보고 폭군이래, 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