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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150화 (150/151)

<150화>

***

막을 넘어 들어가자마자 검보라색 바람이 날카롭게 휘몰아치며 온몸을 할퀴었다.

옷이 찢어지고 살이 갈라졌다. 살을 에는 통증에 눈살이 찌푸려졌으나 나는 멈추지 않고 더 안으로 들어갔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 허공에 반쯤 떠 있는 라파일이 보였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그가 고개를 들었다. 드러난 청보라색 눈동자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동시에 여전한 애정과 미약한 원망이 깃들어 있었다.

“여긴 왜 들어오셨습니까?”

말투는 날이 서 있었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슬픔에서 비롯된 분노는 너무 오래되어 빛이 바래, 체념과 비슷한 색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기운은 저항을 멈출 생각이 없다는 듯 여전히 사방을 내리치고 찌르며 날뛰었다.

“봉인이 깨지면 이 일대가 전부 휘말릴 거야. 그럼 어떻게 될지 너도 잘 알잖아.”

“…….”

“대륙 전체가 황무지로 변하고 살아 있는 건 전부 사라지겠지. 너도, 나도.”

“고작 그런 말을 하려고 들어오신 건 아니시겠죠.”

신경 쓰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으나 라파일의 기운은 막을 밀어 내기만 할 뿐 아까처럼 흉포하게 날뛰지 않았다.

라파일은 어느새 바닥에 주저앉아 손으로 땅을 짚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 그의 앞에 앉았다.

“라파일. 흐른 시간은 되돌릴 수 없어.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나는 네가 원하는 이라네 황제로 돌아갈 수 없을 거야.”

“네. 압니다. 너무 잘 알아요.”

울분을 억누르는 목소리로, 라파일이 대답했다. 그의 길고 수려한 손끝이 땅을 거칠게 긁으며 오므라들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어떻게 멈출 수 있겠어요. 폐하께서 승하하시고 120년입니다. 폐하와 함께 한 시간의 10배가 되는 시간을 오직 폐하를 살리기 위해서 살았어요!”

“…….”

“그런데 지금 포기하면 그 긴 시간은 뭐가 됩니까? 내게 남은 게 뭐가 있어요?”

그가 엎드리듯 웅크린 채 제 머리를 감쌌다.

“이렇게는 못 끝냅니다. 이렇게는……. 이미 너무 많이 와 버렸어요. 너무 많은 생명을 희생했고, 너무 많은 시간을 들였어요. 그런데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이렇게 끝낼 수는 없습니다.”

라파일이 횡설수설 중얼거렸다. 그의 모습은 마치 천둥이 무서워 침대 아래에 숨은 아이 같았다.

나는 그대로 팔을 뻗어 라파일을 끌어안았다.

“알아. 그러니까 내가 곁에 있어 줄게.”

눈물로 흥건해진 얼굴을 들어 라파일이 나를 보았다.

죄책감으로 좀먹은 영혼이 청보라색 눈동자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나는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대로 손을 내려 양손을 맞잡았다. 그 위로 라파일의 눈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펠리온을 밖에 내버려 두고 저와 함께 봉인 당하겠다는 겁니까? 저를 위해 정말 다 포기하실 건가요? 가족도, 연인도, 당신의 삶마저도?”

“그래. 네가 내 마지막을 지켜봐 주었듯이, 이번에는 내가 네 마지막을 지켜볼게.”

“흐으……,”

라파일이 흐느끼듯 웃으며 내 손을 끌어올려 그 위에 제 이마를 기댔다.

“그럼 폐하를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건 저밖에 없겠네요. 제가 사라질 때까지, 저는 폐하를 온전히 소유하게 되는 거예요.”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내 침묵이 긍정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라파일의 기운이 점점 사그라들었다. 봉인을 위한 막이 두꺼워지며 서서히 좁혀 들었다.

라파일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마치 고해성사하듯 맞잡아 모은 손에 이마를 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긴 정적이 흘렀다.

봉인을 위한 막은 부풀 대로 부풀어 나와 라파일의 몸을 꽉 감쌌다. 서서히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때, 라파일이 입을 열었다.

“……이상하죠. 당신이 온전히 내 것이 되는 순간을 그토록 바랐는데, 왜 생각만큼 기쁘지가 않을까요.”

고개를 든 라파일은 젖은 얼굴을 일그러트려 미소와 비슷한 표정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나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으며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라파일의 눈물이 내 피부를 타고 흘렀다.

그는 한참이나 말없이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견고해진 봉인이 우리를 하나로 만들려는 듯 꽉 짓눌렀다.

봉인의 과정이 너무 고통스럽지 않길 바라며 눈을 감았을 때였다.

라파일이 작게 속삭였다.

“사랑했어요, 이라네.”

눈을 뜨자 평온해 보이는 라파일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고, 강한 힘이 나를 던지듯 밀어 냈다.

나는 몸이 뒤로 날아가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

궁전에 남아 정무를 대신하고 있던 포넨트에게 소피아가 다급한 걸음으로 찾아왔다.

“각하. 지금 파라돈의 군사가 아래로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3일 후면 국경에 닿을 것 같습니다.”

“군사 규모는?”

“약 10만 명입니다.”

포넨트가 눈을 내리감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애당초 페라포네를 상대로 원만히 협상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이라네리아의 말처럼, 페라포네가 진실을 안 믿고 요르고스의 죽음을 에피파네스의 탓으로 넘기면 그만이기 때문이었다.

만일 페라포네와 독대한 상태에서 요르고스의 죽음을 알렸다면 페라포네는 바로 에피파네스를 침공했을 터였다.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라네리아는 일부러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만찬장으로 갔다.

국가의 수장과 그 대리인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페라포네도 억지를 쓸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포넨트는 당연히 침략이 있을 거로 생각해 군사를 재정비하고 전쟁에 대비했다.

마음의 준비까지 마쳐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10만 명이라니…….’

에피파네스의 수도 인구가 약 13만 명이었다. 노인과 어린이를 제외하면 10만 명도 안 된다.

군사들은 훈련이 잘되어 있으나 그 수는 턱없이 모자랐다.

전국에 있는 병력과 귀족들의 사병을 다 모아도 10만 명이 될까 말까이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모든 병력을 단시간에 끌어모으는 건 불가능하다.

내전 중인 레튜니아에서도 자꾸만 에피파네스의 국경을 침범했기에 국경 쪽의 병력은 파라돈과의 전쟁에 동원할 수가 없었다.

반면에 파라돈은 어떤가? 10만 명이 다가 아닐 것이다. 에피파네스를 격파한 뒤 레튜니아까지 진격하기 위해 더 많은 군사를 숨겨 두었을 게 분명했다.

그냥 에피파네스를 상대하는 데에는 그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해 10만 명만 추려서 내려온 것이겠지.

포넨트는 머리를 싸매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렘록 산맥에 있는 병력을 써야겠어. 당장 키네시아에게 연락해 줘.”

“지금 연락을 넣어서 당장 출발해도 지원군보다 파라돈의 군사가 먼저 도착할 겁니다.”

“어쩔 수 없어. 그때까지 버텨야지.”

소피아의 보고를 같이 듣던 재상이 입을 열었다.

“얼마 되지 않지만 귀족들에게 사병을 달라고 요청해 두겠습니다. 그리고 용병단을 고용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가장 규모가 큰 용병단이 어디지?”

재상이 알아보겠다고 말하려 할 때 시종장의 옆에 서 있던 아르만이 대답했다.

“팔렘블입니다, 각하.”

포넨트가 고개를 돌리자 아르만이 공손한 어투로 말을 덧붙였다.

“제가 속해 있던 용병단이기도 합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연락을 넣어 다른 용병단의 용병들까지 모아 보겠습니다.”

“아르만. 부탁할게. 그리고 한 사람이라도 아쉬운 상태이니까, 가능하면 너도 전투에 참여해 줘.”

아르만이 허리를 깊게 숙이고 허락을 구한 뒤 밖으로 나갔다.

“재상은 사람을 보내서 국경 인근 민가의 백성들을 대피시켜 주세요.”

“네, 각하.”

재상이 나가자마자 포넨트는 갑옷을 입은 뒤 기사와 병사, 전차를 이끌고 바로 길을 떠났다.

며칠을 꼬박 달려 국경 지대에 도착하자 이미 포진하고 파라돈의 군사가 보였다.

중간에 군사를 더 끌어온 것인지 보고 받은 10만 명보다 규모가 더 커 보였다.

포넨트는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전차를 타고 앞으로 나갔다.

페라포네 역시 말을 타고 앞으로 나왔다. 시종이 군사 중앙에 의자 두 개를 설치했으나 페라포네는 앉지 않았다.

“요르고스 황자가 죽은 것은 에피파네스의 탓이 아니라고는 하나 결혼 동맹을 두 번이나 거절한 것은 간과할 수 없지. 지금 항복하고 길을 연다면 전투는 피할 수 있게 해 주마.”

“에피파네스는 파라돈과 전쟁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게 에피파네스가 원한다고 될 일인가?”

“……이라네리아와 함께 레그레시오의 교주를 막기로 한 것 아닙니까?”

“그건 대의를 위해 협조하는 것이고, 나라 간의 은원 관계는 또 다른 일이지.”

페라포네는 제 검 자루를 매만지며 포넨트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에피파네스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뿐이야. 항복하고 순순히 길을 열든가, 파라돈의 군대에 짓밟히든가.”

포넨트가 입술을 깨물었다.

용병까지 끌어모은 군사는 고작 4만. 버텨서 렘록 산맥에 있는 군사까지 합류한다고 해도 버티는 시간에 손실될 병력까지 감안하면 5만을 넘기기 힘들 것이다.

“혼자 결정할 수 없습니다.”

결정권을 위임받은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었다.

페라포네도 그 사실을 알기에 코웃음을 치고 손을 들었다.

진격 명령이 떨어지려는 순간,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포넨트가 소리의 방향을 확인했다.

양쪽 멀리에서 거대한 흙먼지를 일으키며 무언가가 에피파네스의 군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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