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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149화 (149/151)

<149화>

***

이라네리아의 뒤를 따르던 페라포네는 목적지에 가까워질 때부터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그 당시 페라포네의 뒤에 남은 군사의 수는 고작 2만 명뿐이었다. 나머지 군사들은 시간 차를 두고 전부 빠져나갔다.

10만 명이 한꺼번에 움직이면 아무리 조심해도 티가 나니 쪼개서 흩어진 것이었다.

행렬의 선두에 선 이라네리아는 페라포네의 예상대로 군사가 빠져나가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 군대의 목적지가 에피파네스라는 것은 더더욱 몰랐을 것이다.

페라포네는 코웃음을 치며 거리가 적당히 벌어졌을 때 말 머리를 돌렸다.

‘다 꿰뚫어 보는 척하더니, 별거 없군.’

페라포네는 애당초 이라네리아를 끝까지 도울 생각이 없었다.

황족이 몰살당한 뒤, 레튜니아는 내전에 휩싸였다. 승자가 누구든 병력 소모가 심할 것이고, 전쟁으로 원한이 생긴 뒤이니 침입자가 생긴다 한들 레튜니아의 귀족들은 쉽게 뭉쳐지지 않을 것이다.

에피파네스는 레튜니아가 없으면 그다지 위협적인 나라가 아니었다.

최근 급부상했다고는 하나 아직 혼자서는 파라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거기다 국왕이 죽어 나라가 혼란스러웠고, 가장 중요한 전력인 마법사는 레그레시오의 교주를 잡기 위해 파라돈에 있었다.

노리던 땅이 무방비하게 비어 있는데 멀리서 손가락만 빨고 있을 멍청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녀의 결단에는 망설임이 없었지만 따르는 사람들은 불안했다.

에피파네스가 드래곤의 비호를 받는다는 소문이 벌써 파다했기 때문이었다.

“전하. 지금 에피파네스를 치면 드래곤의 분노를 살 것입니다.”

페라포네를 따라오던 총지휘관이 조심스럽게 말을 올렸다. 그러나 페라포네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총관은 내가 마법사 10명을 단순한 호의로 이라네리아 공주에게 맡기고 온 줄 아나?”

페라포네는 더 설명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총지휘관은 뒷말을 듣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드래곤이 레그레시오 교주의 봉인을 마치고 힘이 빠진 순간, 페라포네가 심어 둔 파라돈의 마법사 10명은 드래곤을 공격해 살해할 것이다.

지금 페라포네가 국왕이 죽고 전력이 빈 에피파네스를 침공하듯이 말이다.

***

플로레타는 라파일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미론이 라파일에게 몇 번 더 달려들었다가 내쳐졌다. 플로레타를 감싼 보호 마법은 차가운 유리잔에 뜨거운 물을 부은 것처럼 갈라진 상태였다.

‘이대로 가면……!’

플로레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까만 눈꺼풀 아래로 신성력과 이라네 황제의 유골을 빼앗기는 모습이 스쳐지나 가는 듯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물만 삼키고 있을 때, 쩌저적 하고 유리가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이제 정말 끝이라고 생각하며 플로레타가 주머니를 끌어안은 순간,

-쾅!

굉음이 들리며 머리에 가해지던 힘이 사라졌다.

플로레타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녀의 앞에는 익숙한 뒷모습이 서 있었다.

“리, 리아!”

이라네리아가 플로레타에게 다가가 그녀의 몸을 살폈다.

“다쳤어?”

플로레타가 울먹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 사이 미론이 달려와 플로레타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미론. 플로레타를 데리고 도망쳐.”

“성 플로레타. 가시죠.”

플로레타는 연신 이라네리아를 뒤돌아보며 걸음을 옮겼다.

펠리온의 공격에 비틀거리며 일어나던 라파일의 시선이 플로레타의 무방비한 등 위로 꽂혔다.

검보라색 기운이 플로레타를 꿰뚫을 듯 쇄도했다.

그러나 그 공격은 플로레타에게 닿지 못하고 펠리온이 만든 방어막에 박혀 들었다.

라파일이 오랜 연적의 이름을 짓씹었다.

“펠리온……!”

이라네리아는 플로레타가 미론과 함께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펠리온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라파일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날카롭게 벼려진 기운은 이라네가 막아선 곳만 교묘하게 피해 방어막을 계속 내리쳤다.

방어막이 뚫려도 이라네리아가 다치지 않을 만한 곳이었다.

계속되는 공격에 방어막에 금이 가기 시작하자 펠리온은 마력을 더 써야 할지 말지 망설였다.

그 사실을 눈치챈 이라네리아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라파일!”

거대한 검보라색 송곳이 허공에서 멈췄다. 청보라색 눈동자가 느리게 흘러 이라네리아에게 닿았다.

이라네리아가 방어막을 벗어나려 하자 펠리온이 반사적으로 그녀를 붙잡았다. 이라네리아는 그의 손을 부드럽게 떨치고 라파일에게로 다가갔다.

“내 시신은 불태웠어. 이번 생의 기억도 다 떠올라서 황제일 때의 몸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없고.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

“…….”

분노할까? 아니면 슬퍼할까? 이라네리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라파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가만히 이라네리아를 응시했다. 이라네리아는 라파일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여기까지만 하자, 라파일. 더는 누구도 헤치지 않는다고 맹약을 맺으면 우리도 널 쫓지 않을게.”

“……폐하.”

“그래.”

“몸은 다시 만들면 됩니다. 이 세상을 다 뒤지다 보면 폐하와 닮은 사람 한 명 정도는 있겠죠. 그러니 괜찮아요.”

그에게 다가가던 이라네리아는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다른 몸을 비슷하게 만든다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말도 안 되는 고집이라는 것은 라파일도 알 것이다.

속이 답답해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 감정을 애써 삼키고 있을 때, 펠리온이 라파일에게 물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이라네 황제에게 집착하는 거야?”

라파일은 이라네를 떠올렸다.

필요하다면 신이 내린 천륜마저 끊어 내고 사랑마저 단념할 수 있는, 운명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

괴로워할지언정 눈물을 보이지 않는 사람. 잔혹하리만치 강인한 사람.

성자라는 이름을 받은 뒤부터 목줄이 매인 개처럼 신의 의지에 끌려다니던 자신과는 달랐다.

동경은 사랑이 되었고 그 감정은 비이성적인 형태로 변했다.

솔직히 이라네가 다시 태어났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그녀를 다시 만난 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리고 관계를 다시 쌓으면 그녀를 완벽하게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라네리아가 된 이라네는 그가 생각하던 사람과 전혀 달랐다.

가족의 일이면 꼼짝을 못 하고 툭하면 눈물을 쏟아 내고 응석을 부렸다.

‘이런 건 내 폐하가 아니야.’

그는 인정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더욱 이라네를 완벽하게 부활시키는 것에 집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그녀를 저 껍데기에서 빼내어 줘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라파일이 손을 뻗어 이라네리아의 얼굴을 감쌌다.

그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이라네의 영혼을 몸에서 빼내기 위해 그대로 얼굴을 제 쪽으로 당겼다.

그러나 영혼은 뜯겨 나오지 않았다.

잠시 분리되는가 싶더니 은색 실에 칭칭 감겨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라파일의 눈동자에 핏줄이 서기 시작했다.

인간의 것보다 더 상위 존재의 영혼이 이라네의 영혼을 붙잡고 있었다.

라파일은 그대로 굳은 채 펠리온을 노려보며 이라네리아에게 물었다.

“영혼에 펠리온의 이름을 새긴 겁니까?”

“그래.”

이라네리아는 라파일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뒤로 물러났다. 이라네리아의 얼굴이 손바닥을 스치며 빠져나갔으나 라파일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그녀의 육신은 불타 사라지고 영혼은 다른 이에게 묶였다.

라파일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팔이 서서히 아래로 떨어졌다.

이라네리아는 라파일이 자신을 포기했다고 생각해 다시 한번 그를 회유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네가 어떤 상실감과 죄책감을 느꼈을지, 나도 이제 알아. 하지만 라파일, 내 죽음에 네 책임은 없어.”

“제가 폐하를…….”

“아니. 그건 렘브로스가 나에게 지속적으로 소량의 독을 섭취하게 한 탓이야.”

“…….”

“물론 이때까지 네가 한 일은 정당화될 수 없어. 하지만 같이 속죄할 방법을 찾아보자. 라파일.”

이라네리아가 손을 뻗었다. 그러나 라파일은 그 손을 잡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그의 머릿속에는 이제 두 번 다신 자신의 폐하를 되찾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상실. 또 상실뿐이었다. 100년을 부단히 노력했건만, 몸은 묶어 둘 수 없게 되었고 그녀의 마음은 또다시 다른 곳으로 흘렀다.

이건 불공평하다.

‘내 것이 될 수 없을 바엔 차라리…….’

이라네를 바라보는 청보라색 눈동자가 음험하게 빛났다. 눈빛이 마주하자마자 이라네가 라파일을 밀어 내며 뒤로 달렸다.

“펠리온!”

그녀가 소리치기도 전에 세 사람의 몸이 순간 이동되었다.

마력과 신성력의 충돌로 넝마가 된 라파일이 봉인식이 적힌 마법진 위에 떨어졌다.

펠리온은 이라네리아를 안아 뒤로 물러섰다.

“아아악……!”

고통에 몸부림치는 라파일을 보자마자 마법사들이 그 자리에 앉아 양손을 마법진 위에 올려놓고 마력을 흘려보냈다.

펠리온은 이라네를 뒤로 보내고 라파일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법진을 타고 펠리온에게 흘러들어온 마력이 그의 손끝에서 방사되었다.

라파일이 예정대로 둥근 구체에 갇혔다.

이제 마력으로 라파일의 신성력을 진압해야 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타락한 신성력은 마력을 밀어 내지 않고 상쇄시키며 휘몰아쳤다. 막이 점점 얇아지기 시작했다.

“마법사가 더 필요합니다!”

마법 협회장이 소리치자 만일을 대비해 뒤로 물러나 있던 마법사들까지 합세했다.

그러나 효과가 크진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파라돈의 마법사들은 마력을 전부 쏟지 않았고, 다른 마법사들은 힘겨루기가 지속되자 마력을 다 소진해 쓰러졌다.

펠리온 역시 마력을 더 끌어올렸다. 그의 입술 사이로 피가 흘러나오자 이라네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펠리온을 바라보다가 그의 등에 이마를 기댔다.

잠시 그러고 있던 이라네리아가 몸을 바로 세우고 천천히 마법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력을 불어넣는 데에 집중하느라 아무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다 이라네리아가 라파일을 감싼 구체에 닿을 때가 되어서야 누군가 이라네리아를 발견했다.

“공주님! 위험합니다, 물러나십시오!”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주변이 소란스러워지자 펠리온도 눈을 떴다.

푸른 눈동자가 바람에 이는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이라네리아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뒤, 구체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잠시 뒤, 요동치던 신성력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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