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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148화 (148/151)

<148화>

파라돈의 성문을 나서자마자 전서구가 들어 있는 주머니부터 확인했다.

라파일을 만나면 알려 달라고 해 놨었는데 포넨트에게서도, 소피아에게서도 연락이 없었다.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불안한 마음에 자꾸 뒤를 확인하게 된다.

행렬이 생각보다 길어 선두에 있는 나에게는 맨 끝에 있는 페라포네 황태자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경사진 곳을 지날 때 언뜻 보이는 게 다였다.

그게 신경 쓰여 계속 뒤를 돌아보자 펠리온이 내 옆으로 바짝 붙었다.

“왜 그래?”

“그냥. 감이 안 좋아.”

펠리온이 나를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불안하면 속도를 더 높일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마법진을 준비해 놓은 곳까진 얼마나 남았어?”

“3시간 정도.”

그 안에 라파일이 나타나면 준비한 군사와 마법사를 이용해 몰이를 하든 펠리온이 순간 이동을 사용하든지 해서 마법진 위로 라파일을 보낼 계획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공터에 도착했을 때에도 라파일은 나타나지 않았다.

말에서 내리는데 다른 마차들도 공터로 들어와 멈춰 섰다. 그 안에서 내린 대신관이 나에게 다가왔다.

“레그레시오의 교주는 오지 않았습니까?”

“아직까지는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성력을 흡수당하면 안 되기에 레바나의 대신관은 라파일이 나타나자마자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라파일이 오지 않으니 떠나야 할지 기다려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진 것이다.

‘정말 내 뜻대로 안 움직여 주네.’

나는 하는 수 없이 차선책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했어요. 성수는 거둬주시고, 그대로 북서 대륙으로 떠나셔도 돼요.”

레바나의 대신관은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무력이 없는 자신들이 남아 있으면 폐가 될 거라면서 내 말에 수긍했다.

“공주님께 레바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대신관은 내게 인사하고 마법 협회장에게로 갔다.

나는 옆에 바짝 붙어 있는 펠리온의 손을 잡았다.

“펠. 만약 봉인이 잘 풀리지 않으면…….”

그에게 말을 꺼내려는데 마법 협회장이 우리에게 달려왔다.

“공주님! 파라돈의 군대가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말을 멈추고 공터의 입구를 보았다.

마법사들이 탄 마차를 끝으로 행렬이 끊겼다. 그 뒤를 따라오고 있던 파라돈의 군대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공터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따라오고 있었는데, 혹시 매복을 부탁하셨습니까?”

“아니요. 그런 적 없어요.”

내가 대답하자마자 펠리온을 중심으로 은빛의 띠가 생겨났다. 그것이 원형으로 퍼지며 주변을 훑었다.

“탐지 마법을 썼는데, 반경 3km 안에는 없어.”

라파일이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것도 골치 아픈데 페라포네마저 사라졌다.

그것도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쫓을까?”

“아니. 라파일이 먼저야.”

나는 한숨을 내쉬고 펠리온의 양손을 잡고 눈을 맞췄다.

“그래서 말인데, 네가 허락해 줘야 할 게 있어, 펠.”

***

“성녀님. 여깁니다.”

미론이 거대한 구덩이 앞에 멈춰 섰다. 새까만 안을 들여다보며 플로레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 안으로 어떻게 들어가죠?”

긴 사다리가 연결 늘어져 있었지만 차마 그것을 밟고 내려갈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녀가 우물쭈물하자 미론이 한쪽 무릎을 굽혀 앉으며 물었다.

“업어 드릴까요?”

그 말에 플로레타가 얼굴을 붉히며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에요! 제가 내려가 볼게요.”

플로레타는 냉큼 사다리를 붙잡아 놓고도 발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미론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먼저 내려가실래요?”

미론이 플로레타의 치마를 한 번 보고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주변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매듭이 묶여 있는 밧줄 하나를 찾아 끌어 왔다. 줄 사다리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이었다.

“무서우시면 동시에 내려갈까요? 말 걸어 드릴게요.”

그제야 플로레타의 표정이 환해졌다. 미론이 먼저 줄을 타고 내려가자 플로레타도 사다리에 올랐다.

미론이 이런저런 말을 걸어 준 덕인지 그다지 무섭진 않았다.

무사히 아래에 도착한 플로레타가 두리번거렸지만 주변이 어두워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자 불안해졌다.

“미론 경?”

플로레타가 조심스럽게 부르자 미론이 위에서 뚝 떨어졌다.

“줄이 중간에 끊어져 있더라고요.”

“다치진 않으셨어요?”

“네.”

그가 멋쩍게 웃으며 빛을 내뿜는 마정석을 꺼냈다.

주변이 환해지자마자 플로레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이 부신 탓이 아니라, 주변에 미라 같은 몰골의 시체가 즐비해 있던 탓이었다.

미론이 재빨리 다가와 플로레타의 손을 잡았다.

“눈 감고 계세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미론 경.”

“별말씀을요.”

미론은 발로 돌멩이 같은 것을 밀어 치우며 안으로 들어갔다.

라파일을 피해 도망치다가 밖에서 변을 당한 건지, 벽화가 있는 곳은 깨끗했다.

“눈 뜨셔도 돼요.”

뜨자마자 펼쳐진 풍경에 플로레타가 작게 감탄했다.

“와…….”

주변을 쭉 둘러보던 플로레타의 시야에 낯선 사람이 툭 걸렸다.

동굴 중앙, 연못처럼 고인 얕은 물 가운데에는 반쯤 파손되어 난간과 기둥만 남은 사원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난간에 색이 옅은 금발에 청보라색 눈을 가진 남자가 가벼운 옷차림으로 걸터앉아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이상하게도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어딘지 모르게 초연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에게 다가가 말을 걸려던 플로레타는 한 박자 늦게 이곳이 일반적인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미론은 검을 뽑아 든 채 서 있었다.

뒷걸음질 치는 플로레타의 앞으로 미론이 나섰다. 플로레타는 그의 뒤에 서서 낯선 남자에게 물었다.

“누구시죠?”

남자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색이 옅은 입술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플로레타.”

“……저를 아시나요?”

“일전에 뵌 적이 있죠. 아네스 궁에서, 키네시아와 함께. 그때는 이 모습이 아니었으니 못 알아보셔도 서운해하지 않겠습니다.”

플로레타가 눈을 크게 뜨며 미론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물러서는 플로레타를 따라 뒤로 움직이며 미론이 힐끗 플로레타를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가득했다.

“성 라파일……?”

플로레타가 확신 없는 목소리로 질문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라파일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천천히 플로레타에게 다가왔다. 거리가 점점 좁혀지자 미론이 검으로 라파일을 겨누며 경고했다.

“멈추십시오.”

그러나 라파일은 미론은 보이지도 않는 사람처럼 오직 플로레타만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돌려주세요, 플로레타.”

“무, 무엇을요?”

“폐하를 모셔간 것, 이미 알고 있습니다.”

“……돌려드릴 순 없어요. 이라네 황제의 시신은 에피파네스 왕족 묘실에 있어야 해요.”

“시신이라니.”

조용히 읊조리는 목소리는 빛이 들지 않는 동굴의 공기보다 더 서늘했다.

라파일이 다가오던 것을 멈췄다. 그의 입꼬리는 여전히 호선을 띄고 있었으나 눈빛에서는 습한 광기가 느껴졌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플로레타. 폐하는 아직 살아 계시는데 묘실에 두겠다니.”

플로레타는 이라네 황제의 시신을 떠올렸다. 시신은 100년이나 지났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멀끔했다.

마치 잠든 사람처럼 미미하게 혈색도 돌았다. 그래서 두려워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처음에는 진짜 살아 있는 것인 줄 알았으나 가까워지니 알 수 있었다.

“저와 미론 경이 갔을 땐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어요.”

“아……. 그래서 오해했군요. 저와 오래 떨어져 있거나 제 힘이 약해지면 종종 그런 일이 발생합니다.”

라파일이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설명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 이제 저의 폐하를 돌려주세요.”

마른침을 한 번 삼킨 플로레타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이라네 황제의 시신은 리아가 가지고 있어요.”

라파일이 진실을 가늠하는 듯한 눈으로 플로레타를 빤히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다 플로레타가 다시 뒷걸음질 치자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청보라색 눈동자가 다정하게 휘어졌다.

“플로레타.”

“…….”

“생각보다 거짓말을 잘하시는군요.”

라파일이 손을 들자마자 미론이 검을 내질렀다.

그러나 검이 닿기 전에 라파일의 힘이 먼저 튀어나와 송곳처럼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보호 마법 덕에 몸이 꿰뚫리진 않았지만 미론의 몸이 뒤로 심하게 밀려났다.

그의 뒤에 서 있던 플로레타의 몸이 뒤로 기울었다. 그걸 느끼자마자 미론은 몸을 틀어 그녀를 감쌌다.

라파일은 손을 휘저어 미론을 날려 보내고 플로레타에게 다가갔다.

“폐하가 어디 계신지 멀리서도 알 수 있도록 조치해 두지 않았다면 깜빡 속을 뻔했습니다.”

미론이 자리에서 일어나 라파일의 등에 검을 꽂아 넣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검보라색 기운을 채찍처럼 휘둘러 미론을 떨쳐내고 플로레타에게 다시 손을 뻗었다.

“그러니 이제 돌려주세요.”

“아, 안 돼요.”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군요.”

라파일이 플로레타의 머리를 향해 검게 물든 손을 뻗었다.

“강제로라도 돌려받는 수밖에.”

보호 마법이 플로레타를 감쌌다. 그러나 검보라색 기운이 계속해서 파고들자 보호 마법에도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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