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키네시아가 페라포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출발할게.”
“타솔라와 지시스를 데려가.”
“너는?”
“펠리온이 있잖아.”
키네시아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키네시아는 플로레타에게 인사를 하고 바로 떠났다.
펠리온은 봉인법을 다듬느라 자리를 비웠으나 따로 찾아가 인사할 생각은 없는지 나에게 대신 인사를 전해 달라고 했다.
창 너머로 말을 타고 떠나는 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플로레타는 내 옆에 서서 그 모습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리아. 요즘 레바나의 대신관님이 함께 북서 대륙으로 갈 신관들에게 세례를 해 주고 계신대. 말려야 하지 않을까?”
“괜찮아. 내가 부탁한 거야.”
“어? 왜 그런 부탁을…….”
플로레타가 양손으로 제 입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성 라파일이 찾아와서 신성력을 흡수하면 어떡해. 키네시아 다시 손등에 통증이 있는 것 같던데 성 라파일이 힘을 완전히 회복하기라도 하면…….”
나는 플로레타를 안심시키기 위해 설명을 덧붙였다.
“진짜 세례를 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신관 수가 계속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는걸?”
“성수만 목에 걸고 있는 거야. 네가 말했듯이 수가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큰 점 하나를 찍는 것보다는 그걸 10개로 나눠 퍼트려 찍어 놓는 게 더 커 보이기 마련이다.
진짜 세례를 내려 신관의 수를 늘리는 것이면 신성력의 총량이 증가하겠지만, 레바나의 대신관의 힘을 쪼개서 만든 성수를 목에 걸고 있는 것이기에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게다가 대신관에게 신성력을 회복하지 말라고 미리 부탁해놨다.
덕분에 대신관의 신성력은 약해졌으나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성수를 차고 있으니 그 사이에 섞여 있으면 위화감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라파일이 와 봤자 그가 흡수할 수 있는 신성력은 대신관 한 명 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미끼인 셈이지. 찾아오면 마법사들이 봉인을 진행할 거야.”
“……성 라파일이 속을까?”
잘못하면 전부 휩쓸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이미 신성력을 흡수하기 위한 폭발이 몇 차례 더 일어났고, 미처 피하지 못한 신관들이 희생당했다.
황족이 모두 사라지자 레튜니아는 분열돼 버렸다.
수도는 황무지가, 다른 곳들은 땅을 차지하려는 자들로 아비규환이 된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무력을 가진 라파일이 세상을 지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것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고 참여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일을 계획한 나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사실 라파일이 속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
요즘 들어 라파일이 잠잠해졌다.
신전을 습격했다는 소식이 며칠째 들리지 않고 있었다.
아마 곧 내 시신을 찾으러 올 것이다.
나는 유골이 든 항아리를 주머니에서 꺼내 플로레타에게 넘겼다. 그녀가 의아한 표정으로 유리 항아리를 받아 들었다.
나는 어리둥절해하는 그녀의 목에 라파일이 만든 보호 마법이 걸린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유골은 네가 맡아 줘. 라파일에게 뺏겼다간 내 몸을 다시 만들지도 모르잖아.”
“그건 불가능할 것 같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플로레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지 동그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집에 가 있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라파일이 제일 먼저 습격했던 곳으로 가 있어. 그 동굴은 안쪽으로 들어가면 보이지 않는 데다가 물도 있어서 오래 버틸 수 있을 거야. 처음 습격했던 곳이니 두 번 가지는 않을 테고.”
“응. 알겠어.”
플로레타가 유리 항아리를 제 주머니 안에 넣었다.
나는 와락 안겨드는 플로레타를 한번 토닥여 주고 목걸이 하나를 더 꺼냈다.
“이건 미론에게 주고. 너도 레바나 신관이 떠나기 전에 가. 최대한 빨리.”
“응. 몸조심해, 리아.”
고개를 끄덕이자 플로레타가 나를 한 번 더 끌어안고 방을 나갔다.
잠시 낯선 정적이 흘렀다. 라파일을 무찌르기 위해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너무 아득해 이 방은 완전히 분리된 별개의 공간 같았다.
순식간에 혼자 남게 되니 마음이 헛헛했다.
파라돈의 황성이 낯선데다가 펠리온마저 없으니 더 그렇게 느껴졌다.
나는 의자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라파일을 막을 수 있을까?’
펠리온이나 가족들이 다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두려웠다.
좀처럼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이 울컥 치솟았다.
키네시아에게는 가족이니 함께하자면서 잘난 척을 하긴 했지만 아마 내가 키네시아의 입장이 되었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죽지만 말자. 펠리온을 위해서.
“펠.”
“불렀어?”
불쑥 들린 목소리에 깜짝 놀라자 그가 웃음을 터트리며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고개를 젖혀 그에게 기대며 얼굴을 올려다봤다.
“끝났어?”
“응. 마법진도 만들어 뒀고, 마법으로도 봉인할 수 있도록 운용 방식도 수정해 놨어. 그런데…….”
“그런데?”
“다른 마법사들이 나에게 마력을 넣고 내가 매개체가 되어서 봉인을 진행하는 거라 중간에 중지하면 일대가 완전히 사라질 거야.”
“너도?”
“나도.”
펠리온이 내 옆으로 의자를 끌어와 나란히 앉아 손을 잡았다.
“그래서 자기한테 허락받으려고.”
“어쩔 수 없지. 중간에 멈추지만 않으면 위험이 없는 거지?”
“응. 확신할 수 있어.”
“변수도 없어? 갑자기 새가 날아 들어간다거나, 누가 밟아서 마법진이 깨진다거나.”
진지하게 물었는데도 펠리온은 웃음을 터트리며 내 얼굴 여기저기 입을 맞췄다.
“그런 사소한 걸 걱정할 줄 몰랐는데…….진짜, 왜 이렇게 귀엽지?”
“콩깍지가 씌어서.”
펠리온이 가볍게 웃었다.
“주변에 구체가 생기긴 하는데 거기로 뭐가 들어간다고 해서 봉인이 망가지진 않아. 까딱 해 봐야 라파일과 같이 봉인되는 정도?”
“그럼 안에 들어간 건 라파일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같이 있는 거야?”
“그렇지. 오히려 새가 들어가면 라파일도 심심하지 않고 좋겠다. 라파일도 새 친구를 사귈 때가 되었지.”
세상을 멸망시킬 수도 있는 놈한테 새하고 친구나 하라고 하다니.
이걸 유쾌하다고 해야 할지, 정신이 나갔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좋았다.
“널 다시 기억해 내서 다행이야, 펠리온.”
“아까처럼 애칭으로 불러 줘.”
“펠.”
“응. 이라네.”
그가 천천히 다가와 입을 맞췄다. 나는 그의 볼을 감싸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꽤 오래 입을 맞췄다. 영혼을 섞듯이 서로의 숨을 섞으며.
***
레튜니아의 수도를 막 벗어났을 무렵, 키네시아가 말을 멈췄다.
“여기서 찢어져요.”
“찢어지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이대로 렘록 산맥에 있는 군사 기지로 갈 거예요. 지시스 경은 궁전으로, 타솔라 경은 아미르 공작가로 가서 이 편지를 전해 주세요.”
“그러면 호위는…….”
“기본적인 검술은 할 줄 알고, 따라붙은 이는 없으니 괜찮아요.”
타솔라와 지시스는 키네시아를 호위하라는 이라네리아의 명령이 떠올라 망설였다.
“꼭 필요한 일이에요.”
하지만 키네시아가 단호하게 말하자 계속 거절할 수도 없었다.
두 사람은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일단 키네시아의 말대로 따르고 이라네리아에게 알리는 방식을 선택했다.
“알겠습니다, 전하.”
“부탁할게요.”
지시스와 타솔라가 키네시아에게 인사하고 각자 말 머리를 돌렸다.
그 자리에 서서 두 사람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던 키네시아도 이내 말을 움직였다.
***
마차 한 대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간격을 둔 채, 파라돈의 병사가 늘어서 있었다. 그 수는 지대가 높은 궁전에서 내려다봐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못해도 10만 명은 될 것 같았다.
“이렇게 많은 군사는 필요 없어요.”
내 말에 페라포네가 픽 웃고 몸을 돌렸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 에피파네스를 위해 준비한 건 아니니 부채감 느낄 필요 없어.”
당연한 말이다.
“파라돈이 악을 처단하기 위해 앞장섰다는 인식을 심기 위해 준비한 것이면서 생색을 내시네요.”
페라포네가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리며 기가 차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나는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황궁 정원에는 300명가량의 레바나 신관과 600명 정도의 마법사가 모여 있었다. 나는 제일 선두에 서 있는 레바나의 대신관과 마법 협회장의 앞으로 다가갔다.
“두 분 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닙니다. 레바나도 레그레시오에 인해 피해 입은 적이 있으니 돕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마법사 협회장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살짝 숙여 내 인사를 받았다. 그러면서도 펠리온을 동경 어린 시선으로 힐끔거렸다.
그러다가 별안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현관 밖으로 나온 페라포네가 협회장의 인사를 받고 내 옆에 섰다.
“나는 군사를 이끌고 뒤따라가도록 하지.”
“그러세요.”
가볍게 대답한 뒤 말에 올랐다.
그러자 마법사들과 신관들도 준비해 둔 마차에 올랐다.
모두 탄 것을 확인하고 출발했다. 우리 뒤로 수십 대의 마차가 따라왔다.
양옆으로 늘어선 병사들이 우리가 지나갈 때마다 함성을 질렀다. 온몸이 진동할 정도로 커다란 소리에도 숨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제 라파일과 대면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