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돌풍과 함께 희뿌연 흙먼지가 들어찼다. 펠리온의 마법 덕에 유리 잔해에 다치는 일은 없었으나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시야가 가려지자 기사들이 검을 빼 드는 소리가 들렸다.
“펠리온. 먼지 좀 몰아내 줘. 이러다 피 보겠어.”
펠리온이 손을 휘두르자 바람이 깨진 유리 창문으로 빨려 나가듯이 휘몰아치며 시야가 맑아졌다.
다행히 유리가 깨진 것이 다였다. 누가 침입했다든가 무기가 날아왔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다.
주변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기사들이 검을 집어넣었다.
우리 뒤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온 페라포네가 틀만 남은 창으로 다가갔다.
파라돈의 궁전은 지대가 높은 곳에 세워졌기에 시가지의 모습이 넓게 내려다보였다. 덕분에 샤마흐의 신전이 있던 자리가 황무지로 변한 것 역시 한눈에 들어왔다.
“아……. 샤마흐시여.”
누군가가 탄식했다. 플로레타 역시 충격받은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눈을 맞췄다.
“저 신전, 규모가 어떻게 돼?”
“파라돈에서 제일 커……. 신관만 100명이 넘, 넘는데…….”
“가장 큰 곳부터 차례대로 흡수할 생각인 거네. 그가 신성력을 완전히 회복하게 둬선 안 돼.”
“내가, 신관마다 연, 연락해서 모여 있지 말라고 할게……! 방에 연락용 수정구가 있으니까…….”
나는 뛰쳐나가려는 플로레타를 붙잡았다.
“안 돼. 지금 신성력이 가장 강한 게 너와 레바나의 대신관님이잖아. 따로 움직이는 건 위험해. 그러니까, 미론.”
“네, 공주님.”
“네가 가서 연락해 줘.”
“알겠습니다.”
미론이 플로레타에게 눈짓으로 인사하고 오찬장을 나갔다.
플로레타는 미론이 나간 곳을 보며 연신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를 키네시아에게 넘기는데 펠리온이 다가와 속삭였다.
“내가 라파일을 쫓을게.”
“그럴 필요 없어. 포넨트에게 라파일이 찾아오면 황제의 몸은 내가 가지고 있다고 전하라고 해 뒀으니까 알아서 찾아올 거야.”
이미 다친 전적이 있는 그를 혼자 보낼 순 없다.
나는 혹시라도 펠리온이 마법을 쓸까 봐, 당장이라도 라파일을 따라갈 듯 먼 곳을 바라보는 그의 손을 꼭 움켜잡았다.
주변은 혼돈 그 자체였다.
유리 파편에 다친 사람이 많은지 비명과 공포에 질린 숨소리, 흙먼지로 인한 기침이 난무했다.
그러나 페라포네만은 여상스러운 표정이었다.
나는 그녀를 보다가 놀라 굳어 있는 레바나의 대신관에게 다가갔다.
“성하. 치료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대신관이 고개를 끄덕이고 성기사들에게 다친 사람들을 모아 달라고 말했다.
몇몇 사람이 성녀를 놔두고 왜 모르는 사람에게 치료받아야 하느냐고 반발하다가 대신관이 신성력을 터트리자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조용해진 틈을 타 모두가 들을 수 있게끔 플로레타에게 물었다.
“지금 습격당한 신전 다음으로 규모가 큰 신전은 어디야?”
“할린타 왕국 수도에 있는 신전이야.”
“들으셨죠? 신전이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도 레그레시오의 습격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보다시피 신전뿐만 아니라 주변에도 피해가 생겨요.”
나는 입을 다문 채 있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에게 눈을 맞추며 말했다.
“그러니 다들 결정하세요. 회담을 열어 레그레시오를 막을 방법을 모색할지, 아니면 무법 지대가 되었을 레튜니아로 땅따먹기나 하러 갈지. 물론 후자를 선택하실 경우 본국의 안위는 보장할 수 없습니다.”
제일 먼저 움직인 것은 페라포네였다. 그녀는 시종과 하인들에게 나가라는 듯이 손짓했다.
“어차피 음식은 못 먹게 되었으니 자리를 옮길 필요는 없겠지.”
그녀는 천천히 움직여 상석에 앉았다.
“회담을 시작합시다. 참석하지 않을 분들은 나가셔도 좋습니다.”
물론 그 말을 듣고 자리를 떠나는 사람은 없었다.
***
나는 제일 먼저 요르고스 황자와 가짜 레바나 대신관의 시신을 꺼냈다.
초대받아 와 있던 샤마흐의 대신관이 변질된 신성력을 감지했다.
성녀인 플로레타까지 당시 있었던 일을 증언한 데다가 진짜 레바나 대신관의 신성력을 경험하고 나자 죽은 자가 가짜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저분이 진짜인 겁니까?”
레바나의 신관이 묻자 대신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소식을 듣고 북서 대륙에서 왔습니다.”
“그럼 저희가 따르던 대신관은…….”
“100년 전, 성전이 끝난 후에 남동 대륙을 침략하지 말라는 신탁이 떨어졌습니다. 그것에 반발한 주교 한 명이 자신을 따르는 신관들을 데리고 남동 대륙으로 넘어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 대신관 행세를 하던 자는 그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레바나의 신관이었던 것은 맞네요. 그런데 그는 왜 신성력을 사용하지 못했죠?”
“신성력은 신의 힘을 빌려 쓰는 것이기에, 보통은 교단을 나갈 때 그 권능을 반납하는 의식을 치릅니다. 그냥 도주하려는 자는 붙잡아 신성력을 봉인합니다.”
그래서 마나나 영혼에 관한 건 느껴도 사람을 치료하진 못했던 거로군.
“신성력을 봉인하는 걸 레그레시오의 교주에게도 쓸 수 있을까요?”
“가능합니다만, 신관과 신성력이 많이 필요할 겁니다.”
“방법만 알면 마력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
내 질문에 펠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힘의 뿌리가 같으니까.”
확답을 얻자마자 나는 우리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저는 레그레시오 교주의 봉인을 제안합니다.”
누군가 물었다.
“죽이는 게 아니라 봉인을 하자는 이유가 뭡니까?”
그 질문에 대답한 건 내가 아니라 펠리온이었다.
“이미 내가 한 번 시도했는데 실패했어. 교주가 반신의 경지에 올라서 죽이는 건 무리일 것 같고, 봉인해 두면 신성력이 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소멸할 거야.”
“그러니까 다들 왕실에 몰래 숨겨 놓은 마법사들을 지원해 주었으면 해요. 들으셨다시피 봉인에는 힘도 인원도 많이 필요하니까요.”
그 말을 듣고 있던 마법 협회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로그리예 공자는 마법을 쓰는 것 같던데, 등록은 했습니까? 비등록 마법사를 어떻게 믿고 귀한 마법사들을 지원합니까?”
“지금 그런 거로 꼬투리를 잡을…….”
답답해 역정을 내려는데 펠리온이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생글거리는 얼굴로 마법 협회장을 바라보았다.
“마법을 쓰는 사람은 마법이 발현하자마자 등록해야 한다는 게 협회의 규칙이잖아, 그렇지?”
“맞습니다.”
“그런데 나는 사람이 아니거든.”
청보라색 눈동자가 새파랗게 변하며 검푸른 동공이 세로로 쭉 찢어졌다.
자리에 있던 신관들이 움찔거릴 정도로 엄청난 마력이 느껴졌다. 같은 것을 느꼈는지 마법 협회장도 의자를 덜컹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드, 드래곤…….”
“그래. 그리고 어차피 교주를 막으려면 내가 꼭 필요할 테니 우리 사소한 일로 시간 끌지 말자. 내 공주님이 답답해하시잖아.”
마법 협회장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자 이쪽을 주시하고 있던 페라포네가 입을 열었다.
“레그레시오의 교주를 봉인하는 데에 마법사를 지원할 국가와 단체장은 거수해 주십시오.”
이리저리 의논하는 목소리가 들리고, 하나둘씩 손이 올라왔다.
나는 빠짐없이 올라온 손들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페라포네가 삐뚜름히 미소 지으며 천천히 한 손을 들었다. 분명 동조의 의미인데 이상하게 석연치가 않았다.
***
레바나의 대신관은 레바나의 신관들에게 가짜 대신관에 대해 알렸다.
그는 대신관의 이름으로 가짜 대신관이 탐욕스럽게 긁어모았던 재물들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고 신전은 땅 주인에게 주었다.
가짜 대신관을 섬긴 자들은 신관복을 벗고 원래의 평범한 삶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레바나 신을 섬길 의향이 있는 자들은 세례를 다시 받고 북서 대륙으로 건너가기로 했다.
나는 레바나 대신관이 떠나기 전 그를 찾아갔다.
“성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공주님. 레바나 신의 이름이 잘못된 곳에 쓰이는 것을 막아 주셨으니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건 뭐든 해 드리겠습니다.”
“레그레시오를 잡는 일에 도움이 필요해요. 자세한 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일단 출발 시기를 조금 늦춰 주세요.”
“알겠습니다.”
대신관은 눈치껏 나를 언급하지 않고 출발 날짜를 미뤘다.
그사이 이례적으로 황자와 황제의 장례식이 동시에 치러졌다. 키네시아는 약속대로 요르고스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꽃을 올리고 돌아온 그녀는 매우 불안해 보였다.
“성 라파일의 힘이 점점 강해지는 게 느껴져.”
키네시아의 뒤로 페라포네가 다가왔다. 그녀는 잠시 키네시아에게 눈길을 주고 내게도 오만한 시선을 던졌다.
“각국에서 마법사가 도착했어. 파라돈 황실에 소속된 마법사도 전부 내어주지. 다른 필요한 게 있다면 지금 말해. 지원해 줄 테니까.”
“혹시 모르니 군사도 준비해 주세요.”
“그러지. 내가 이 정도 해 주었으니 레그레시오의 교주라는 자는 확실하게 처단해야 할 거야.”
말투가 재수 없다. 하지만 태도만큼은 그 어떤 나라보다 협조적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단 말이야. 입을 꾹 다물고 눈을 가늘게 뜨자 나 대신 키네시아가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전하. 저희도 간절하니까.”
“기대하지.”
페라포네는 특유의 비웃음을 입에 달고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빤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키네시아. 넌 에피파네스로 돌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