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설마 머리만 덜렁 들고 온 건가 싶어 당황해 주머니를 내리자 다행스럽게도 몸이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이걸……. 훔쳐 왔다고? 혼자?”
“훔치, 훔치다니. 그냥 우리 거니까……. 그리고 혼자서 한 게 아니라 미론 경이 도와주셨어.”
포넨트와 키네시아는 할 말을 잃었고, 펠리온마저 놀란 표정으로 플로레타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녀는 우물쭈물 변명을 덧붙였다.
“그리고 왠지 가져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단 말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 아랫단을 잡아당겼다.
“잘했어.”
“그래. 신관의 직감은 우습게 볼 게 아니니까.”
펠리온이 내 말에 동조하며 내 손을 떼어 내고 마법으로 주머니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주머니 입구가 크게 벌어지며 이라네 황제의 몸을 토해 냈다. 펠리온이 손가락을 휘젓자 주머니는 플로레타에게 돌아가고, 내가 전생에 쓰던 몸은 탁자에 바로 눕혀졌다.
키네시아가 착잡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궁전 묘실에 있어야 할 시신이 어떻게…….”
“장례식이 끝난 뒤에 이라네 곁을 가장 마지막까지 지킨 게 그 녀석이었으니까, 빼돌리는 건 어렵지 않았을 거야.”
펠리온의 목소리를 들으며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묘한 기분이다.
마치 몸 밖으로 빠져나와 내 몸을 보는 것 같았다. 전생의 일들이 전부 기억나긴 하지만 사실 내 정체성은 아직 이라네 황제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제는 끊어 내야 할 때이다.
떠나온 삶보다는 눈앞에 있는 가족들이 더 중요하니까.
“펠리온. 태워 줘.”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포넨트가 경악하며 고개를 돌렸다.
“야! 너는 무슨, 애인한테 그런 걸 부탁하냐?”
“응?”
정작 펠리온은 이미 시신을 태우고 있었다. 열기가 새어 나가지 않게 막을 씌운 덕분에 연기가 들어차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불길은 희뿌연 연기를 헤집으며 선명하게 일렁였다.
포넨트의 경악 어린 시선이 펠리온에게로 향했다.
펠리온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 손을 움켜쥐었다. 막이 쪼그라들며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난 상관없는데? 이라네가 머물렀던 몸까지 전부 신경 썼으면 내 동굴에는 벌써 시체가 10구 넘게 쌓였을 거야.”
펠리온이 손을 펴자 작은 구체가 된 막이 사라지며 탁자 위로 새하얀 가루가 떨어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만 한 유리 항아리 하나를 가져왔다. 펠리온에게 내밀자 그가 마법으로 가루를 모아 항아리 안에 넣어 주었다.
나는 마개로 입구를 단단하게 막고 주머니에 넣었다.
“펠리온. 고속 이동이 빨라, 날아오는 게 빨라?”
“아무래도 날아오는 게 빠르지. 장애물이 없으니까.”
“그러면 레바나의 대신관을 데리러 가자.”
“알겠어.”
펠리온이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키네시아가 입을 열었다.
“바로 파라돈으로 갈 거야?”
“그래야지. 한시가 급하니까.”
“그럼 나도 같이 갈게. ……용서는 못 해도 장례식엔 가기로 했었거든.”
***
독의 여파로 엉망이 된 몸을 이끈 채, 라파일은 제 몸에서 깨어났다.
당장 신성력을 찾아 흡수해야 했으나 앉은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옆자리가 텅 비어 있던 탓이었다.
“폐하……?”
조심스럽게 불러 봤으나 대답이 돌아올 리 없었다. 라파일은 사색이 되어 신성력이 부족해 주름진 손으로 벽을 열고 계단을 올라갔다.
스페르모의 방으로 바로 이어진 계단이었다.
벽을 열고 나오자 스페르모가 바로 달려와 라파일을 부축했다.
“부르시면 제가 갔을―.”
“폐하는 어디 계십니까?”
라파일이 스페르모의 말을 차갑게 끊으며 물었지만 그는 라파일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라파일이 폐하라고 칭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서가 아니었다. 그가 그런 존칭으로 부르는 자는 죽은 듯 잠들어 있는 이라네 황제뿐이었다.
그러나 지하로 내려간 사람은 없었다. 스페르모 본인마저 라파일이 내려오지 말라고 명령해 지하에 숨겨진 방을 모르는 사람처럼 지냈다.
문 앞에 호위를 두면 호기심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까 봐 일부러 지키지도 않았다.
“그 말씀은 그분이 사라졌다는 뜻입니까?”
라파일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스페르모를 밀어 냈다.
그러자마자 라파일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왈칵 쏟아졌다.
“교주님! 괜찮으십니까?”
스페르모는 저를 밀쳐 낸 라파일의 몸에 차마 손을 대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계속 피를 토해 내는 라파일을 보며 안절부절못하면서도 분노에 차 중얼거렸다.
“내가 독까지 주었는데, 키네시아는 일을 어떻게 처리했길래…….”
그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시뻘겋게 충혈된 청보라색 눈이 스페르모에게로 향했다.
피가 엉겨 붙은 입술 사이로 험악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뭘 주었다고요?”
살기 짙은 눈빛에 스페르모는 잠시 두려움을 느꼈으나 이내 침착하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성녀 때문에 국왕 부부를 시해하지 못한다고 변명하기에 독을 내어 줬습니다. 황실에서 보관하고 있는 독인데, 아주 소량만 남았고 썩은 세계수가 필요해 다시는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
라파일은 그가 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키네시아의 검에 발려져 있던 것. 절대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고 여겼던 그 독.
‘나에게서 폐하를 앗아갔던…….’
백 년을 수소문해도 찾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동안 신관들이 신성력을 쓰지 못했으니 신성력에 반발하는 독을 쓰는 사람도 자연스레 사라진 탓이었다.
그런데 그 실마리가 이렇게나 가까이에 있었다니.
“크흐, 흐흐, 커헉! 하하하, 하하하하!”
라파일은 피를 쏟으면서도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라네를 죽인 건 렘브로스다. 그녀에게 열렬히 구애하던 그가 성자인 자신을 이용해 폐하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그 후손이 지금 눈앞에 있었다.
피와 웃음을 동시에 쏟아 내면서도 라파일은 한 번도 눈을 깜빡이지 않은 채 스페르모를 노려보았다.
그 모습에 섬뜩함을 느낀 스페르모가 라파일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지도를 가져왔다.
“교주님. 성녀가 발굴을 허가해 달라고 한 동굴에 샤마흐의 신관들이 여럿 와 있습니다. 가서 신성력을 흡수하시면 괜찮아지실 겁니다.”
라파일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스페르모가 양손으로 공손히 지도를 바쳤다.
그것을 빤히 보던 라파일은 언제 미치광이처럼 웃었냐는 듯 새하얀 옷자락으로 피를 닦아 내고 신성한 기운을 풍기며 미소 지었다.
“스페르모.”
“네, 교주님.”
“곧 황태자가 되신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대를 축하하기 위해 황실 사람들 전부에게 축복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스페르모가 감동한 얼굴로 라파일을 올려다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영광입니다.”
라파일은 여전히 미소 지은 채로 지도를 받아 들었다.
“동굴에 다녀올 테니 그대는 마법을 이용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황족들을 전부 한자리에 모아 주세요.”
“예, 교주님.”
스페르모는 신성력을 많이 소모한 라파일이 편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마차를 준비했다.
그리고 그가 떠나자마자 황제에게 부탁해 황족들을 전부 초대하고 싶으니 황명으로 불러들여 달라고 했다.
황제는 스페르모가 미리 기강을 잡으려는 건가 싶어 그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스페르모는 마법 협회와 황실 마법사를 이용해 며칠 만에 황족들을 모았다.
그중에는 평소 스페르모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자들도 있었으나 상관없었다.
교주님이 행하는 기적을 목도하고 나면 다들 레그레시오의 신도가 될 것이고, 이제껏 레그레시오의 신도들은 교주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보였다.
‘교주님은 당연히 나를 지지하실 테니 쓸데없는 반대 세력도 사라지겠지.’
스페르모는 황제가 되면 레그레시오를 국교로 지정할 생각이었다.
교주가 함께하면 전쟁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교주는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신이었다. 살리는 것은 물론 죽이는 것까지 모두 교주의 뜻대로 할 수 있었다.
그러니 교주는 반드시 레튜니아에 승리를 가져다줄 것이다.
스페르모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한자리에 모인 황족들을 보았다.
그의 뒤로 말끔해진 모습의 라파일이 걸어 나왔다.
“교주님.”
스페르모가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상석을 넘기려 하자 라파일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어 다시 앉혔다.
“황족들은 전부 모인 겁니까? 레튜니아의 황제는요?”
“폐하께서는 방에 계시고, 나머지는 전부 모였습니다.”
스페르모의 말을 들은 황족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교주라니, 무슨 말입니까!”
“황자는 지금 이교도의 수장 따위를 소개하려고 우리를 불러 모은 것이오?”
라파일은 미소 띤 얼굴로 아우성치는 사람들을 보았다.
“진정하십시오.”
그의 몸에서 빛이 터지자 상처와 만성 통증, 피로를 사라졌다. 생전 처음 겪어 본 강력한 신성력에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침묵했다.
라파일은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섞인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렘브로스 왕을 아십니까?”
“레튜니아의 일곱 번째 왕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제가 그에게 갚을 것이 있습니다.”
황족들은 역시 위대한 왕이라며 감탄을 터트렸다. 라파일은 웃음을 참지 않으며 손을 뻗었다.
“그러니 그를 만나거든 안부를 전해 주세요.”
순간 그의 몸에서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빛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사람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감탄이 아니라 비명이었다.
“으아아악!”
“아악! 사, 살려…….”
“아아아아악!”
빛이 닿은 자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흔적조차 남지 않은 채 사라졌다.
문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이상함을 눈치채고 도망치려 했으나 빛은 순식간에 거대한 기둥이 되어 퍼져나갔고,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가리지 않고 전부 집어삼켰다.
그리고 아무런 잔상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다.
레튜니아의 궁전이 있던 거대한 부지는 순식간에 황무지가 되었다.
그리고 그 위에 살아 숨 쉬는 것은 오직 라파일 한 사람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