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우리는 동시에 키네시아를 보았다. 시선을 한몸에 받은 그녀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셰피오 백작과 함께 렘록 산맥 군사 기지에 계셔.”
그제야 반겔레스 셰피오 백작이 부모님을 호위했었다는 게 떠올랐다.
원래라면 호위를 통솔했던 그부터 찾았을 텐데, 그때는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었다.
괜찮은 척하고 있었지만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데 포넨트가 한발 빨랐다.
“셰피오 백작은 마차 전복 때 실종된 거 아니었어?”
“그렇게 꾸민 거겠지.”
내 말에 키네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을 죽이라는 건 내가 정말 그의 명령을 따르는지 보려고 시킨 일이었을 거야. 필요하기도 했겠지만.”
키네시아가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덮어 가렸다.
“그래서 부모님의 죽음을 꾸며 낼 생각이었어. 마침 성 라파일이 약해진 게 느껴졌고, 요르고스 황자가 신성력에 반발하는 독을 줬어. 지금이 아니면 그를 죽일 기회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아서…….”
키네시아는 우리가 위험하지 않도록 혼자 해결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셰피오 백작에게 부탁해 국왕 부부가 시장의 저택에 들렀을 때 준비된 시신을 마차에 넣어 두고, 부모님께는 충격 흡수 마법이 걸린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원래는 바퀴를 느슨하게 해 두어 절벽으로 떨어지게 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아무도 심약한 어머니와 아버지가 시신과 함께 마차를 타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테니까, 완벽하게 위장할 수 있을 거라 여겼어.”
“그런데 펠리온과의 싸움으로 약해진 라파일이 마음이 조급해져서 먼저 선수를 친 거고?”
“응. 오히려 잘됐지. 자기가 처리했다고 착각하면 부모님의 죽은 걸 의심하지 않을 테니까.”
입을 가린 채 듣고 있던 플로레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그런데 그걸……. 그, 죽은 사람들하고 마차에 타는 걸 엄마 아빠가 허락하셨어?”
“편지에 내 상황을 적고, 부모님의 죽음을 위장하지 않으면 내가 위험해진다는 내용을 써서 셰피오 백작에게 적당한 때에 전해 달라고 했었어. 별다른 방도가 없다면 내 의견에 따라 달라고.”
부모님이 뾰족한 수를 가지고 있을 리 없었다. 원래 계략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니까.
예전 같았으면 걱정되니 돌아오겠다고, 위험해도 함께 위험해야 한다며 고집부렸을 사람들이 용케 얌전히 셰피오 백작을 따라갔나 보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키네시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러다 네가 죽으면 어쩌려고 했어?”
“…….”
“같이 죽으려고 했냐?”
포넨트가 뾰족하게 묻자 키네시아가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플로레타는 울음을 삼키기 위해 코를 훌쩍였다.
키네시아가 그녀를 보았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지 않으려고 충분히 알아봤어. 그 힘의 근원이 어디일지, 어떤 성질을 띠고 있는지.”
“우리가 화내는 게, 네가 조심하지 않았을까 봐 그러는 것 같아?”
“그러면 내가……. 내 선택 때문에 너희까지 위험해지도록 내버려 뒀어야 했어?”
그녀가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조용하지만 날이 선 분위기에 플로레타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연스럽게 따라 일어나려는 펠리온의 어깨를 눌러 앉히고 포넨트를 옆으로 밀어 포넨트와 키네시아 사이에 앉았다.
나를 보는 키네시아의 눈빛에는 나만큼은 그녀를 이해해 줄 거라는 믿음이 담겨 있었다.
“키네시아. 우리 중 누군가가 실수로 위기에 처하면 넌 모른 척할 거야?”
“그건…….”
키네시아가 억울함과 배신감이 적절히 섞인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이게 최선이었다는 거 너도 알잖아. 난……. 아무도 다치지 않게 하려고 그런 거야. 너라면, 이라네 황제라면 어떻게 했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그렇지만 키네샤. 네가 잘못되었으면 우리 심정이 어땠겠어?”
플로레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맞아. 나, 나도, 키네시아 네가 어떻게 되는 줄 알고 너무 무서웠단 말이야.”
“맞아. 내가 너 큰일 났다는 말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같이 해결 방안을 모색할 수 있었잖아. 왜 독단적으로 행동한 거야? 네가 이라네야?”
포넨트가 벌떡 키네시아에게 다가가며 나를 걸고넘어졌다.
키네시아는 대답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람과 함께 일을 계획하면 누군가 엿듣고 라파일에게 계획을 발설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겠지.
우는 플로레타와 여전히 화가 난 듯한 포넨트 사이에서 키네시아가 어쩔 줄 몰라 했다.
방황하던 시선이 내게 닿았다.
키네시아가 라파일과 위험한 계약을 했으나 그게 그녀 혼자만의 탓이라고 보긴 어렵다.
라파일에게 받은 애정을 같은 방식으로 돌려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도 곁에 둔 내 잘못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면 저 애들이 아닌 내가 져야지.’
언제 옆으로 다가온 것인지, 펠리온이 내게 깍지를 꼈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휘어진 그의 입술에 불안이 찰랑이고 있었다.
나는 깍지 낀 손을 힘주어 잡았다.
‘책임을 지되 목숨을 걸진 말자. 이제 이 목숨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니까.’
펠리온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다시 키네시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내 방식이 항상 정답은 아니야. 오만할수록 주변 사람을 상처입히게 되더라. 그러니까 같이 해결해, 키네시아.”
“나는…….”
“우린 가족이잖아.”
포넨트와 키네시아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플로레타는 겨우 멈춘 울음을 다시 터트리며 나에게 와락 안겨 들었다. 어색하게 토닥이고 있으려니 포넨트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나와 플로레타를 동시에 안았다.
키네시아가 울먹이는 표정으로 포옹에 합류했다.
은근슬쩍 펠리온이 나를 끌어안으려 하자 포넨트가 발을 들어 그를 밀어 냈다.
“넌 왜 눈치 없이 끼고 그러냐?”
“나도 가족인데, 네 매부.”
“결혼도 안 했는데 네가 무슨 매부야!”
“흐응.”
펠리온이 의미심장한 콧소리를 내자 심장이 뜨끔했다.
그러고 보니 허락도 없이 결혼보다 더한 짓을 저질렀네. 지금 말을 꺼낼까 하다가 그냥 팔을 뒤로 뻗어 펠리온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그가 포옹에 합류하자 플로레타가 몸을 쏙 빼내며 뒤돌아 눈물을 닦아 냈다.
키네시아와 포넨트도 피하길래 나 혼자 펠리온을 꼭 안아 주고 소파에 앉혔다.
“좋아. 그럼 이제 대책 세워 보자. 파라돈의 황자는 왜 죽은 거야?”
“요르고스는…….”
키네시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혼란과 죄책감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는 것으로 떠오른 감정을 지워 냈다.
“나를 감싸다 그렇게 됐어.”
원수보다 못한 사이인 놈이 저를 구했다는 것에 심경이 복잡한 모양이었다.
“파라돈은 요르고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에피파네스로 돌릴 거야. 그게 맞기도 하고.”
코를 훌쩍이던 플로레타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왜 키네시아 탓이야!”
“키네시아 탓이 아니긴 하지. 하지만 전쟁의 구실을 찾고 있는 파라돈이 그 말을 믿으려 할까?”
내 질문에 플로레타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면…….”
“되겠냐.”
포넨트가 말을 툭 내뱉었다. 다들 얼굴이 어두워졌다. 펠리온만이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 내 어깨를 끌어안으며 머리에 볼을 기댔다.
“파라돈 같은 거 그냥 쓸어 버리자. 대마법사랑 성녀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신전에 소속되면 성전 외의 전쟁에는 끼어들 수 없어요, 로그리예 공자…….”
“대마법사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펠리온이 숨 쉬듯 자연스럽게 말을 바꿨다.
포넨트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키네시아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어차피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거였어.”
“하지만 전쟁의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는 중요한 문제지.”
단순히 결혼을 거절한 것이면 일반적인 동맹을 제안할 수 있다.
하지만 에피파네스가 요르고스 황자를 죽인 게 되면 동맹이 불가능해질 뿐더러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게 된다.
파라돈은 에피파네스를 격파한 뒤 반드시 왕족을 죽이려 할 것이다. 거기서 레튜니아가 도와준다는 핑계로 들어오면 전쟁은 에피파네스에서 벌어진다.
파라돈과 동맹을 맺어 레튜니아의 땅에서부터 전쟁을 시작하는 것과는 피해량이 다를 수밖에 없다.
패배했을 때 보상해야 하는 금액 역시 달라진다.
“그, 그럼 어떡해……?”
플로레타가 불안한 표정으로 나와 키네시아를 번갈아 봤다.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들어야지. 펠리온, 레바나의 대신관은?”
“아마 오고 있을 거야. 남동 대륙 땅을 밟자마자 마차에 고속 이동 마법만 걸어 주고 나는 자기한테 온 거거든.”
고개를 끄덕이고 이번에는 키네시아에게 물었다.
“라파일은 정확히 어떻게 된 거야?”
“레바나 대신관의 몸에 있었으니까, 죽지 않았을까 싶어.”
확신이 없는 말투였다. 확인하러 레튜니아에 가 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펠리온이 입을 열었다.
“대신관의 몸에 아직 피와 수분이 남아 있었어. 독에 완전히 당하기 전에 도망친 것 같아. 그래도 연달아 두 번이나 타격을 받았으니 움직이기 힘들겠지.”
“그럼 레튜니아로 가서 그 성자란 놈부터 없애야 하는 거 아니야?”
키네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요르고스 황자나 대신관의 죽음을 오래 은폐할 순 없어. 아마 벌써 황자가 보이지 않는다고 찾고 있을 거야.”
“그리고 라파일은 이미 반신의 반열에 들어서, 육체를 없앤다고 완전히 죽일 수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어.”
일이 더 복잡하게 되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펠리온에게 기댔다.
라파일은 나를 살리는 것에 비이성적으로 집착하고 있다. 시신이 사라지면 분명 찾아내거나 만들어 내기 위해 다른 파괴적인 일을 멈출 것이다.
“내가 예전에 쓰던 몸을 없앨 수만 있다면 시간을 벌 수 있을 텐데.”
레튜니아의 황궁에 있을 것 같지만 정확히 어디 있는지 몰랐다. 괜히 갔다가 그 몸에 빨려 들어가기라도 하면 위험할 테고.
포넨트와 키네시아가 몇 가지 의견을 냈지만 이렇다 할 만한 건 없었다.
그때 플로레타가 작은 목소리로 우리를 불렀다.
“저기……. 이라네 황제의 시신만 있으면 되는 거야? 사실 내가 레튜니아 황궁에 갔을 때 이상한 신성력이 느껴지길래 갔다가 발견했거든…….”
“그래? 어디서?”
“지하에서.”
플로레타가 허리에 차고 있는 주머니를 풀로 탁자 위에 올려놓고 주섬주섬 입구를 풀어 안으로 양손을 넣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아무래도 에피파네스의 묘실에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가져왔어.”
플로레타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밖으로 빼냈다. 그러자 주머니 밖으로 머리 하나가 딸려 나왔다.
그건 내 전생의 몸, 이라네 황제의 머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