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시무룩해진 로그리예가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내가 만졌을 때는 움직이지도 않던 문이 거짓말처럼 열렸다. 나는 미론에게 검을 돌려주고 양쪽 문을 밀어젖히며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난장판이었다.
바닥에는 넓게 퍼진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고, 그 위에는 키네시아와 요르고스 황자가 쓰러져 있었다.
“키네시아!”
나는 달려가 그녀의 상태부터 살폈다.
죽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호흡이 불안정하고 열이 심하게 났다. 다행히 기절하기 전에 응급 처치는 했는지 다리의 상처는 동여매어 있었다.
그 옆에 있는 파라돈의 황자는 사망한 상태였다.
내가 둘을 살피는 사이 포넨트와 플로레타도 달려왔다.
나는 두 사람에게 키네시아를 맡기고 주변을 둘러봤다. 조금 떨어진 곳에 사람 형체로 말라비틀어진 것이 레바나 대신관의 옷을 입고 있었다.
파라돈의 황족과 종교 지도자가 에피파네스의 아네스 궁전에서 죽었다.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에피파네스는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일단 입막음부터 해야겠는데.’
뒤를 돌아보자 눈이 마주친 기사 두 명이 움찔거렸다.
“미론. 경들과 응접실에 가서 차라도 마시고 있어. 다른 사람은 만나지 말고. 혹시 누굴 마주치더라도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지?”
“네, 공주님.”
미론이 기사 두 명과 자리를 떠났다.
나는 굳게 닫힌 문을 보고 몸을 돌렸다. 플로레타가 신성력으로 키네시아를 치료해 뒀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울기만 할 뿐 신성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나는 다급하게 걸어가 키네시아 옆에 주저앉았다.
“플로레타, 빨리 키네시아를 치료해 줘. 더 두면 위험할 거야.”
“하지만, 하지만 키네시아가 독에 당해서…….”
“독?”
“응. 키네시아가 검에 발라서 대신관을 찔렀는데, 신성력에 반발 작용이 있는 독 같았어. 그런데 대신관이 그 검으로 키네시아를 공격해서……. 키네시아도 중독되었을지 몰라.”
키네시아가 중독되었다면 신성력으로 치료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이대로 두면 키네시아가 위험할 텐데…….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진정하자.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그래야 키네시아를 살리면서 에피파네스의 외교적 마찰을 최소화할 수 있다.
진정, 진정해야…….
“이라네.”
따뜻한 손이 깍지를 껴 왔다. 고개를 돌리자 로그리예가 엄지로 내 손등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황자의 몸에서 신성력이 느껴져.”
숨이 탁 트였다. 나는 로그리예의 손을 한번 꽉 잡았다가 놓고 다시 플로레타에게 말했다.
“괜찮으니까 신성력 써, 플로레타. 라파일, 아니, 레바나의 대신관은 신성력으로 싸웠어. 키네시아가 중독되었다면 살아 있지 못했을 거야.”
흑빛이던 플로레타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녀는 고개를 거세게 끄덕이며 눈물을 닦아내고 기도하듯 양손을 맞잡았다.
곧 그녀의 몸에서 환한 빛이 터지고,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신성력은 시력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에 나는 바로 키네시아를 살폈다. 열은 내리고 호흡도 편안해졌다.
포넨트가 키네시아의 다리에 감아 놓은 천을 풀어 상처를 살피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 나았어.”
나도 키네시아를 한 번 더 확인하고 플로레타를 보았다. 그녀는 이제야 주변에 널려 있는 시체를 확인했는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포넨트. 플로레타랑 같이 키네시아 데리고 방에 가 있어.”
포넨트가 고개를 끄덕인 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키네시아를 안아 들고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펠리온과 둘만 남자 애써 붙잡고 있던 정신이 느슨해졌다. 그동안 억눌렀던 감정과 외면하고 있었던 충격이 몰려왔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도, 키네시아가 배신을 한 것도 아니다. 나를 속인 게 괘씸하긴 해도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혼자 아등바등했을 것을 생각하니 짠했다.
‘그래도 아무도 죽지 않아서 다행이야.’
긴장이 풀리자 무릎이 툭 꺾였다. 그러나 단단한 팔이 받쳐준 덕에 피가 말라붙은 바닥으로 쓰러져서 체면을 구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라네. 괜찮아? 좀 기댈래?”
나는 바로 몸을 틀어 펠리온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응?”
이제껏 진짜 기댄 적이 없어서 그런지 그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이내 따뜻한 손으로 내 등을 감싸 주었다.
신기한 기분이었다. 펠리온이 오기 전까지는 전전긍긍했는데, 그에게 안기자 뭐든 잘 해결될 것만 같았다.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렇게 위안이 되는 일이었구나.’
그에게 얼굴을 묻으며 보고 싶어서 빨리 왔다는 그의 말에 이제야 대답을 했다.
“나도 보고 싶었어.”
펠리온이 내게 이리저리 입을 맞추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 너무 감동받아서 울 것 같은데.”
나는 작게 웃음을 흘리며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어느 정도 진정되자 엉망이 된 방이 걱정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돌아와서 보면 여섯 번은 기절하고도 남을 광경이었다.
대책이 생길 때까지 파라돈의 황자가 죽은 것은 은폐해야 한다.
숨겨야 하는 일의 뒤처리를 하인에게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라 고민하는데 펠리온이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핏자국들이 서서히 사라지고 방 안에 가득 차 있던 불쾌한 공기도 맑게 변했다.
참상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시신들조차도.
펠리온을 보자 그가 생긋 웃었다.
“전부 보존 마법 걸어서 안전한 곳으로 옮겨 놨어. 가서 기사들 입막음도 시킬까? 발설하지 못하게 마법을 걸면 되는데.”
“……펠리온.”
“응?”
“너는 내가 본 미친놈 중에 제일 유능해.”
그가 웃음을 터트리며 우아하게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영광이야.”
그리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혹시 다른 사람이 들어와 수상한 점을 눈치챘을까 봐 문과 창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일이 끝났을 때쯤 펠리온이 돌아왔다.
“양해를 구하고 발설 금지 마법을 걸어 뒀어.”
그가 허리를 숙여 얼굴을 들이대며 뽀뽀를 해 달라는 듯 검지로 제 볼을 톡톡 두드렸다.
나는 그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얼굴을 감싸 끌어와 짧게 입을 맞춰 주었다.
“키네시아 방으로 가자.”
펠리온이 나에게 짧은 키스를 돌려주고 순간 이동을 사용했다.
주변이 순식간에 바뀌며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키네시아와 화를 삭이는 듯 얼굴을 감싼 채 웅크린 포넨트, 둘 사이에 껴서 눈치만 보고 있는 플로레타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인기척을 내자 포넨트가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나와 펠리온을 노려보더니 손가락으로 펠리온을 가리켰다.
“너도 쟤가 마법사인 거 알고 있었어?”
“안 지 얼마 안 됐어.”
“부모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는 건 뭔데?”
나는 포넨트의 옆에 펠리온과 나란히 앉으며 키네시아를 보았다.
“그러게. 그게 뭘까.”
눈이 마주치지도 않았는데 키네시아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나는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천천히 고개를 드는 그녀에게 말했다.
“포넨트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나도 빼놓지 말고 전부 설명해.”
키네시아는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 설명이 이어질수록 포넨트의 상체는 점점 앞으로 기울었다. 그는 다시 이마를 짚은 채로 무릎에 팔꿈치를 세우고 있는 자세가 되었다.
“그러니까, 파라돈에 있을 때 라파일이라는 놈을 만났고, 멋도 모르고 맹약을 맺게 되었다고?”
“응.”
“그 맹약의 목적이 이라네 황제의 환생인 이라네리아를 갖기 위해서고. 이라네는 자기가 후손 몸에 들어온 건 줄 알았는데 사실은 환생한 거였고? 환생이라니. 하! 환생…….”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마른세수를 하였다.
“그래서 그동안 폭군 이야기만 나오면 그렇게 난폭하게 발작을 했구나. 자기가 폭군이니까.”
“폭군 아니라고!”
내 반발은 들은 척하지도 않은 채 포넨트가 손가락으로 펠리온을 가리켰다.
“그럼 로그리예 놈은 뭔데. 뭔데 남의 동생 이름을 멋대로 바꿔?”
“나는 이라네 남픕, 아야.”
나는 황급히 펠리온의 입술을 찰싹 때려 말을 막고 대신 대답했다.
“펠리온이야.”
“펠리온? 그 펠리온? 드래곤의 화신? 세상에 두 번 다신 태어날 리 없다는 위대한 대마법사? 폭군의 측근이자 정부?”
“그렇게 칭찬해 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 그렇지만 더 해도 좋아. 아! 그리고 기왕이면 정부보다는 애첩이라고 해 줘.”
포넨트가 싸늘한 눈으로 펠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답이 없다는 듯 외면해 버렸다.
그다음 포넨트의 시선을 받은 사람은 플로레타였다.
“이걸 플로레타는 전부 알고 있었고.”
“나는 그냥, 키네시아가 도와달라고 해서 왔다가……, 맹약만 확인하고……. 리, 리아 이야기가 나왔는데, 키네시아가 리아의 몸에 사실 이라네 황제가 들어가 있고 황제를, 고, 고양이 몸으로 옮겨야 한다잖아.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고 설명해 준 게 다야…….”
“고양이는 또 뭐야…….”
포넨트가 작게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고 다시 이마를 짚었다.
둘러앉은 네 사람 중 세 사람은 포넨트의 눈치를 보는 기묘한 일이 생겼다.
‘아버지 어머니에 관한 일은 어떻게 된 건지 아직 듣지 못했는데.’
포넨트가 겨우겨우 화를 눌러 담고 있는 게 보여서 입을 열기가 힘들었다. 나는 우리 중 유일하게 포넨트의 눈치를 보지 않는 펠리온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그가 나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가 활짝 미소 지으며 끄덕거렸다.
“그건 그렇고, 국왕 내외께서는 지금 어디 계시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