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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141화 (141/151)

<141화>

***

차가워지기 시작한 바람이 세차게 볼을 훑었다.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해 찬바람이 옷 사이를 파고들었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말을 몰았다.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추적은 쉽지 않았다. 포넨트가 타고 간 마차 자국은 선명했지만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시간이 지체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상하단 말이야.’

습격한 놈들의 행색은 분명 암살자였는데 공격이 시원치 않았다. 몰려와 놓고는, 마치 대충 만든 연극의 전투 장면처럼 한 명씩 나를 공격했다. 그러다 내가 지치면 도망치기를 반복했다.

‘죽이려는 게 아니라 시간을 끌려는 것 같잖아.’

나는 바로 포넨트를 쫓지 않고 궁전이 있을 방향을 뒤돌아봤다.

‘나를 궁전 밖으로 끌어내는 게 목적이었구나.’

나오기 전 마주쳤던 레바나의 대신관이 떠올랐다. 그는 평소에 끼지 않던 장갑을 끼고 있었다.

만약 그 장갑 아래 있는 것이 보라색 태양이라면…….

‘키네시아는 도대체 라파일과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야.’

어쩌면 궁전으로 돌아가자마자 라파일에게 붙잡혀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당분간은 궁전으로 돌아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다시 말에 올랐다.

왕자의 행렬이니 쉬거나 잘 때 반드시 도시에 들릴 것이다. 그러면 영주나 시장이 나와서 포넨트를 성으로 초대하겠지.

나는 도시마다 들러 포넨트를 추적했다. 생각보다 느리게 이동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백작령에 있는 포넨트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나는 성으로 들어가려는 왕실 마차를 발견하고 냅다 소리 질렀다.

“마차 세워!”

말을 몰아 최고 속력으로 달려가자 기사들이 검을 빼 들었다. 내 얼굴을 확인한 기사들이 놀라며 마차를 세웠다.

창문 너머로 포넨트의 얼굴이 보였다.

말에서 내려 고삐를 아무에게나 쥐여 주고 마차 문을 벌컥 열었다.

다짜고짜 안으로 들어가자 포넨트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혼자 여기까지 쫓아온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본론을 꺼냈다.

“너 파라돈으로 가면 안 돼. 가면 죽어.”

“협박하냐?”

“아니. 사실이야. 키네시아는 너를 죽일 생각이야. 본인 입으로 직접 그렇게 말했어.”

“……넌 그 말을 믿어? 키네시아가 우리를 배신할 리 없잖아.”

내 말이 충격적이었는지, 아니면 하루 만에 여독이라도 쌓인 것인지 포넨트의 얼굴은 수척해져 있었다.

나는 긴 숨을 내쉬며 일어나 포넨트의 양어깨에 손을 올렸다.

“믿는 건 네 마음이야. 하지만 마차는 돌려.”

“…….”

“배신하지 않았다고 해도 내가 널 막길 바라니까 그런 말을 꺼낸 거 아니겠어?”

키네시아가 부모님을 죽였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하면 성격이 불같은 포넨트는 분명 확인하러 궁전으로 돌아가자고 할 테니까.

지금 중요한 건 포넨트를 데리고 안전한 곳으로 가서 펠리온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아미르 공작령으로 가자.”

“……알겠어. 오늘은 늦었으니까 예정대로 백작가에서 하룻밤 머물고 내일 출발하자.”

나는 창문으로 밖에 있는 기사들의 얼굴을 보았다. 체력이 좋은 그들도 조금 지친 기색이 보였다. 그들이 타고 있는 말들도 지친 게 보였다.

‘저 상태로 더 이동하긴 무리겠네.’

백작이 키네시아의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작의 성에서 암살을 시도할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

왕자의 방문을 알리며 대로를 통해 들어가는 것이기도 하고 죽일 거면 내가 포넨트를 만나지 못하게 막았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포넨트는 기사와 시종을 불러 조용히 경로를 바꾸라고 명령하고 백작 성으로 들어갔다.

나는 제일 먼저 플로레타에게 궁전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혹시 몰라 포넨트의 주변을 경계를 하며 밤을 새웠지만 역시나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 계획대로 일어나자마자 떠난 것도 아니었다.

“왕자님, 곧 제국의 국서가 되실 텐데 고국이 그립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지 마시고 하루만 더 머물러 주십시오. 아직 안내해 드리지 못한 곳이 많습니다.”

포넨트가 파라돈 제국의 국서가 되어 대공의 지위를 받을 거라는 소문이 났는지, 백작은 어떻게든 포넨트에게 잘 보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떠나려고 할 때마다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뛰어나와 우리를 붙잡았다.

다행히 포넨트도 나도 성질머리가 좋지 못한 편이었기에 백작을 뿌리치고 출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만행은 다음 도시에서도, 그 다음 도시에서도 이어졌다.

“……너 계속 이러고 다녔어?”

포넨트가 피곤한 얼굴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어제 얼굴이 수척해 보인다 했더니 이런 놈들 때문이었구나.

마주칠 때마다 단호하게 뿌리쳤지만 이동 속도는 여전히 더뎠다. 게다가 종일 시달리니 진절머리가 났다.

“안 되겠어. 우리는 호위 기사들하고 먼저 말을 타고 가고, 마차는 그냥 비워두자. 다들 마차만 노리느라 우리는 신경도 쓰지 않을 거야.”

내 말을 듣자마자 포넨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런 좋은 방법이 있었으면 진작 알려 줬어야지!”

“내가 괜히 말 안 했겠어? 미행하고 있는 놈들이 있으면 습격 위험이 높아지니까 그렇지.”

“음…….”

포넨트는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습격과 반드시 있는 귀족 중 어느 쪽을 피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듯했다.

그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별안간 마차가 멈춰 섰다.

기사가 마차를 두드리고 말했다.

“왕자님, 공주님. 성녀님께서 오셨습니다.”

플로레타가 왔다고? 편지는 못 받았나?

고개를 돌리자마자 문이 열리며 플로레타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열린 문 너머로는 미론이 보였다.

그가 내게 꾸벅 인사하는 것을 받아 주기도 전에 플로레타가 나와 포넨트를 붙잡았다.

“당장 돌아가야 해! 키네시아가, 키네시아가…….”

나는 울먹이는 플로레타의 입을 막았다.

부모님을 죽였다느니 하는 말이 나올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마차 밖으로 이 말이 새어 나가서는 안 된다.

나는 그 상태로 미론에게 사람들을 물리라고 소리쳤다.

십여 개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주변이 조용해진 뒤에야 나는 플로레타의 입에서 손을 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키네시아가 부모님을……. 살해했다는 건 나도 알아.”

“뭐? 그게 무슨 소리야? 키네시아가 뭘?”

포넨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동시에 플로레타가 눈물이 줄줄 흐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야! 부모님은……, 아니, 일단 돌아가야 해. 키네시아가 위험해! 가면서 이야기해 줄게, 빨리.”

플로레타가 나와 포넨트의 옷자락을 잡고 마차 문을 향해 질질 끌었다.

포넨트는 플로레타를 따라 반쯤 일어났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두 사람을 잡아당겨 다시 자리에 앉혔다.

“플로레타. 내가 보낸 편지는 보지 못했어? 돌아오지 말라고 했잖아.”

“편지? 몰라……. 나는 키네시아의 편지만 보고 달려와서 궁전에 갔었는데, 그것보다 빨리 돌아가야 해!”

“아니. 돌아가도 너희가 안전하다는 확신이 설 때까지는 갈 수 없어.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빠르고 간단하게 설명해.”

“그게, 흡, 흐어엉.”

“뚝! 울지 말고!”

“키네, 키네시아가, 흡!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해서……. 내가 갔는데, 죽어 있는 게 부모님이 아니었고, 키네시아가 나를 찔렀는데.”

“널 찔렀다고? 키네시아가?”

포넨트가 경악한 목소리로 묻자 플로레타가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 그러긴 했는데, 나를 지키려던 거였어! 키네시아는, 지금, 레바나의 대신관과 싸우고 있어.”

플로레타가 어렸을 때처럼 울먹이는 목소리로 횡설수설했지만 중요한 것은 다 알아들었다.

부모님은 멀쩡히 살아 있고, 키네시아는 우리를 안전한 궁 밖으로 내보낸 뒤, 안에서 혼자 라파일을 잡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게 함정일까? 하지만 함정이라면 이렇게 복잡하게 설계할 필요가 없다.

우리를 한데 모을 생각이었다면 그냥 가만히 있어도 되었을 테니까.

“……가자.”

나는 제일 먼저 마차에서 내려 말을 타고 달려갔다.

그 뒤로 플로레타를 태운 미론과 포넨트가 따라왔다. 지칠 즈음엔 플로레타가 신성력을 사용해 체력을 회복시켜 주었기에 쉬지 않고 달렸다.

궁전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의 방으로 올라갔다. 당장 들어가려고 했으나 기사들이 앞을 막고 있었다.

“뭐야?”

“죄송합니다, 공주님. 왕세자 저하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밖으로 나오긴 했어?”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그걸 그냥 뒀단 말이야? 시종장은 어딨어.”

“열쇠를 써도 열리지 않고, 저하께서도 괜찮으니 들어오지 말라고 극구 말리셔서…….”

“그딴 걸 지금 변명이라고.”

우리가 꼬박 하루를 달려왔으니까 적어도 이틀은 저 안에 혼자 있었다는 뜻이 된다.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울고 있는 플로레타에게 물었다.

“키네시아 혹시 다쳤어?”

플로레타가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를 악물고 미론에게 다가가 그의 허리춤에 있는 검을 뽑아 들었다.

기사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주춤거렸다. 나는 검을 들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만일 왕위 계승자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그대들에게 책임을 물을 테니, 기회를 줄 때 비켜.”

기사들이 물러났다. 나는 문고리를 돌려 보고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있는 힘껏 문고리를 내리쳤다.

검이 문에 박히며 나무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지만 안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조급함에 문에 발을 대고 박힌 검을 빼내려는데 뒤에서 놀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돌아보지 않고 다시 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다시 내리찍으려 할 때였다. 누군가 내 허리를 낚아채 뒤로 끌어당겼다.

“뭐야, 안 놔?”

“자기, 그러다 손목 다쳐.”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나는 당장 그의 옷깃을 잡아 당겼다.

“자기도 내가 보고 싶었구나? 나도 자기가 보고 싶어서 좀 서둘렀-”

“열어 줘.”

“응……?”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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