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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140화 (140/151)

<140화>

갑자기 찾아온 격통에 라파일이 두 눈을 크게 뜨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의 가슴을 뚫고 나온 검 끝이, 떠오르는 태양 빛을 반사하며 반짝였다.

그가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이 키네시아가 검을 뽑았다.

허공에 떠올라있던 플로레타가 아래로 떨어지고, 라파일의 피가 비산하며 사방으로 튀었다.

라파일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창백한 얼굴에 보라색 핏줄이 퍼졌다. 흰자위는 당장 피를 흘릴 것처럼 붉게 충혈되었으나 그의 입꼬리는 오히려 위로 더 치솟았다.

“고작 검 따위로 나를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까?”

라파일이 천천히 일어나며 몸을 돌렸다.

키네시아는 그의 등 너머에 있는 플로레타를 살폈다. 플로레타의 상처가 다 아문 것을 본 키네시아는 다시 검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라파일이 그에 대응하듯 손을 들었다.

하지만 키네시아에게 공격이 쏟아지는 일은 없었다.

“컥, 으, 으윽!”

라파일이 신성력을 쓰려고 하자마자 그의 피가 증발하기 시작했다. 물이 꽉 찬 주머니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신성력이 상처를 통해 빠르게 빠져나갔다.

당황한 라파일이 신성력을 붙잡아 두기 위해 힘을 쓰면 쓸수록, 고통은 극대화되고 몸은 미라처럼 마르며 검게 변했다.

라파일은 격통 속에서 깨달았다.

키네시아가 자신을 찌른 건 그냥 평범한 검이 아니다.

독을 바른 것이었다. 그것도 이라네 황제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그 독을.

“으아, 아아아악! 키네시아, 네가, 네가 이 독을 어떻게!”

키네시아는 대답 대신 라파일을 향해 칼끝을 내질렀다. 라파일이 양손으로 검날을 움켜잡았다. 키네시아는 재빨리 왼손을 보태 검 자루를 역으로 고쳐 잡아 무게를 실었다.

검에 베인 라파일의 손이 쩍 갈라지며 모래처럼 바스러졌다.

안 그래도 노화되어 있던 대신관의 몸은 독을 이기지 못하고 금세 수분을 다 빼앗긴 것처럼 말라비틀어졌다.

그러나 라파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더 움켜쥐었다.

“말해. 어서! 그 독이 어디서 났는지!”

라파일은 검을 옆으로 던지듯 놓으며 몸을 피했다.

그러자 무게를 실어 가며 라파일과 대치하고 있던 키네시아가 앞으로 쏟아졌다. 그리고 그 검 끝에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플로레타가 있었다.

플로레타에게 검 끝이 닿기 직전, 키네시아가 검을 던지며 몸을 굴렸다.

“키네시아!”

플로레타가 울먹이며 키네시아에게 손을 뻗으려 하자 라파일이 검을 주워 힘껏 던졌다.

공기를 가르며 날아온 검이 키네시아의 다리에 박혔다.

“으윽!”

이를 악물고 비명을 참는 키네시아에게 시선을 준 라파일이 다정한 목소리로 플로레타에게 말을 걸었다.

“신성력을 쓰세요, 성녀.”

플로레타의 움직임이 멈췄다. 손에 서렸던 신성력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동시에 라파일이 미치광이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흐흐, 흐흐하하! 아하하하!”

웃음소리가 잦아들고, 미소만 남은 얼굴로 라파일이 천천히 다가왔다. 여기저기 실핏줄이 터진 얼굴 위에 떠오른 미소는 기괴해 보일 뿐이었다.

플로레타는 겁에 질린 얼굴로 키네시아를 끌며 뒤로 물러났다.

“다가오지 마세요! 더, 가까이 오면 공격 하, 하겠어요.”

“용감하군요. 신성력을 쓰면 나를 죽일 수 있습니다. 물론 당신의 자매가 무사하리라 장담할 순 없지만.”

플로레타는 눈물을 흘리며 키네시아를 보았다.

제 언니의 다리에 박힌 검에는 독이 발려 있다고 했었다. 라파일의 상태를 보니 신성력에 반발 작용을 하는 독일 것이다.

만약 검에 미약하게나마 독이 남아 있다면? 신성력에 키네시아까지 다치게 된다.

그 생각에 플로레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라파일이 갈라진 목소리로 다정하게 타일렀다.

“뭘 망설입니까? 당신을 찌른 사람입니다. 나를 없애는 김에 같이 죽일 수 있으면 당신도 손해 보는 건 아닐 텐데요.”

플로레타가 벌벌 떨고만 있자 키네시아가 다리에 박힌 검을 뽑아내 손에 쥐고 제 동생의 앞을 보호하듯 막아섰다.

라파일이 걸음을 멈췄다.

마주 선 채로 대치하며 키네시아가 플로레타에게 속삭였다.

“로라. 도망쳐. 광장 중앙대로를 따라 수도를 벗어나. 지금쯤 리아와 포넨트가 궁전으로 돌아오고 있을 거야. 가서 리아와 함께 있어.”

“하지, 하지만, 키네시아, 그러면 너는…….”

플로레타는 머뭇거리며 라파일을 보았다.

키네시아를 두고 가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찌르긴 했어도 뭔가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성력이 키네시아에게도 독이 되는 상황에서 버티고 있어 봤자 플로레타는 짐만 될 뿐이었다.

‘차라리 이라네든 누구든 도와줄 사람을 데리고 오는 게 나을 거야.’

게다가 이라네 옆에는 항상 마법사인 로그리예가 붙어 있으니까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이성은 제대로 된 판단을 내렸으나 키네시아의 다리에서 흐르는 피를 보자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키네시아는 천천히 움직여 플로레타를 문 쪽으로 밀어 보내며 재촉했다.

“어서.”

문의 위치를 확인한 플로레타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나갔다.

플로레타를 쫓아가려는 듯 달려드는 라파일을 향해 키네시아가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그의 가슴팍이 가로로 갈라지며 검은 피를 쏟아 냈다.

그럼에도 라파일은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서 있었다.

반면에 허벅지의 상처에서 피가 너무 많이 흐른 탓이 현기증이 나고 구역감이 치밀었다. 시야도 흐릿해졌지만 키네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정신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독이 들지 않는 건가?’

키네시아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대신관의 몸을 유심히 살폈다. 옷에 가려졌긴 해도 처음보다 지나치게 왜소해진 몸은 라파일이 움직일 때마다 티가 났다.

시간을 끌면 라파일은 반드시 무너진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키네시아는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공격이 급소를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라파일은 몸을 피하며 이를 악물었다. 치아가 강하게 맞물리며 듣기 거북한 소리를 냈다.

키네시아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신성력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빠져나갔다.

망가진 몸이야 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손실된 신성력은 돌이킬 수 없다.

생명을 연명하려면 레튜니아로 돌아가 원래의 몸에 들어가야 한다. 원래의 몸도 상태가 썩 좋진 않지만 독에 당한 몸보다는 나았다.

그렇지만 도무지 떠날 수가 없었다.

‘단서가 눈앞에 있어.’

그는 이라네와 자신을 갈라놓은 게 누구인지 알아내야만 했다. 알아내 본인은 물론 그의 자손들까지 모두 죽여야 이 원한이 풀릴 것 같았다.

“키네시아. 누가 그 독을 당신에게 주었는지만 말해 주세요. 그럼 저는 당신을 용서하고 조용히 물러나겠습니다.”

“용서?”

키네시아는 웃었다.

“내가 용서를 빌어야 할 건 플로레타지 당신이 아니에요.”

“그것도 살아 있어야 가능한 일 아닙니까? 나와 함께 자멸할 생각인가요?”

“필요하다면요.”

“어리석은 짓 하지 말아요. 나를 이 정도로 몰아넣은 건 대단한 일이지만 당신은 날 죽이지 못할 겁니다.”

라파일의 몸에서 새하얀 빛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곧 검보라색으로 변하며 라파일의 신체 말단을 가루로 만들었다.

속이 망가지며 입 밖으로 검붉은색 피가 쏟아졌으나 라파일은 멈추지 않고 제힘을 움직였다.

검보라색의 진득한 액체가 손처럼 뻗어져 키네시아의 얼굴을 완전히 덮으며 움켜쥐었다.

“읍, 으읍!”

코와 입이 한꺼번에 틀어막힌 키네시아가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며 발버둥 쳤다. 라파일이 그대로 손을 천천히 들어 올리자 키네시아는 얼굴이 잡힌 채로 허공에 떠올랐다.

목이 뽑히는 듯한 고통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들고 있던 검도 땅으로 추락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제 얼굴을 움켜쥔 것을 떼어 내려 했으나 오히려 그 기운은 키네시아의 손을 삼키며 팔로 타고 올라왔다.

벗어나려 발버둥 치던 움직임마저 서서히 잦아들었다.

‘이렇게 죽을 순 없어. 이대로 죽으면 동생들이 위험해…….’

키네시아는 어떻게든 정신을 붙잡으려 했으나 숨이 모자라 생각마저 끊겨 버렸다.

그렇게 그녀가 막 기절하려는 순간,

“키네샤를 놔!”

문을 박차고 들어온 요르고스가 그대로 라파일을 들이박았다.

“윽!”

노쇠한 육체가 멀리 떠밀리며 동시에 키네시아의 몸도 바닥을 나뒹굴었다.

“헉!”

아래로 떨어진 키네시아가 몸을 감싸며 거친 기침을 토해 냈다.

“키네시아!”

요르고스가 키네시아에게 달려갔다.

“조용한 게 이상해서 들어왔더니, 저건 뭐야?”

“너, 여긴 왜 들어온 거야! 당장 나가.”

키네시아가 비틀거리면서 일어나 다급하게 요르고스의 멱살을 틀어쥐고선 문으로 끌고가려 했다.

“고맙다는 말을 하면 혀가 잘리기라도 하나…….”

빈정거리며 키네시아를 뿌리치려던 요르고스의 등 뒤로 섬뜩한 예감이 스쳤다.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몸의 절반이 가루가 되어 사라진 라파일이 그들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키네시아를 공격했던 기운이 이내 수십 개의 송곳이 되어 그들을 향해 쏟아졌다. 요르고스는 반사적으로 키네시아를 감싸며 몸을 웅크렸다.

“으아악!”

비명과 함께 요르고스의 등 위로 검보라색 송곳이 박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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