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
키네시아는 굳은 얼굴로 창밖을 보았다.
밤하늘처럼 짙은 남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이라네는 넓은 대로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역시 혼자 가는구나.’
이라네라면 혼자 가는 것이 안전하다는 판단을 내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자리를 비운 사이 누가 키네시아의 편이 되었을지 모르니 말이다.
여기까지는 키네시아의 예상과 맞아떨어졌다.
그녀는 한참 제 동생을 바라보다가 인기척에 몸을 돌렸다.
“누가 들으면 키네시아 당신이 진짜 국왕 내외를 죽인 줄 알겠군요.”
레바나의 대신관이 안으로 들어오며 장갑을 벗었다. 그의 손등에 보라색 태양 문양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키네시아는 그의 손등을 빤히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죽이려고 했어요. 성 라파일께서 나서지 않았으면 제가 깔끔하게 처리했을 거예요.”
“그랬겠죠.”
대신관의 몸을 뒤집어쓴 라파일이 주름진 얼굴로 미소 지으며 수긍했다.
라파일은 스페르모에게 파라돈의 황제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키네시아를 찾아와 조문 행렬의 이동 경로를 물었다.
키네시아는 공허한 목소리로 대답을 회피했다.
“이미 제가 다 조치를 취해 놨어요. 부모님은 돌아오지 못하실 거예요.”
그녀의 말에서 거짓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라파일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키네시아가 제 눈을 속이고 국왕 부부를 파라돈으로 보내 보호받게 하려는 속셈이라고 생각했다. 파라돈에 머문다면 에피파네스로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말도 거짓은 아니니까.
그녀에게 고통을 가하면 진실을 말할수도 있겠지만, 그건 얼마 안 남은 신성력을 낭비하는 일이었다.
국왕 부부가 레바나의 대신관과 동행한다고 했으니 대신관의 신성력을 흡수하고 난 다음 거짓을 고한 키네시아에게 벌을 주어도 늦지 않다.
고통을 각오하고 한 말인데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자 키네시아가 제 손등을 바라보았다.
곧 그녀의 미소가 라파일에게로 향했다.
“역시 약해진 게 맞군요.”
“…….”
라파일은 펠리온과의 충돌이 떠올라 살의가 들끓었다.
그러나 그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도 키네시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혹시 다른 사람의 신성력을 흡수해야 하는 건가요?”
“……그건 누구에게 들었습니까?”
“그냥 추론이에요. 성 라파일이 사라진 직후 샤마흐의 신관들이 살해당하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었으니까요. 신관을 죽여 샤마흐의 분노를 살 정도로 미친 사람은 드물잖아요.”
“…….”
“그럼 당신의 힘도 결국 신성력을 기반으로 한 것이네요.”
잠시 침묵이 흐르고, 키네시아가 결심한 듯한 얼굴로 라파일을 보았다.
“당신이 플로레타의 신성력을 흡수할 수 있게 도울게요.”
“무슨 일이 있었기에 심경의 변화가 생긴 겁니까?”
“전쟁이 코앞이니까요.”
충분한 대답이 되지 않았는지 라파일은 입을 다물었다. 키네시아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생각해 봤어요. 어느 나라와 동맹을 맺든 가운데에 낀 에피파네스는 제일 먼저 짓밟힐 거예요. 풍요로운 땅은 그저 전쟁터가 되겠죠.”
맞는 말이었다. 라파일이 고개를 끄덕이자 키네시아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뱉었다.
“백성을 지키는 게 왕족의 의무예요. 우리 가족은 왕족이니 책임을 져야죠.”
키네시아는 이라네 같은 소리를 했다. 라파일은 이라네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에 키네시아의 가치관과 결단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러나 키네시아의 성격으로 이라네처럼 행동하는 게 가능할까 싶었다. 그는 여전히 키네시아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었다.
“키네시아. 당신의 말을 증명해 보세요.”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국왕 내외의 이동 경로를 말해요. 내 손으로 직접 처리해야 믿을 수 있겠습니다.”
“지금쯤이면 렘록 산맥의 낭떠러지 옆을 지나고 있을 거예요.”
라파일은 순식간에 키네시아 앞에서 사라졌다가 렘록 산맥 위의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신성력과 함께 생명력이 빠져나간 탓에 그의 다리는 마른 나뭇가지처럼 변했다.
그러나 라파일은 제 다리는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키네시아의 말대로 국왕 부부가 탄 마차는 절벽과 낭떠러지 사이의 좁은 길을 지나고 있었다.
라파일은 조문 행렬이 쉬기 위해 멈춘 틈을 타 커다란 바위를 떨어트렸다. 비명이 들리고, 국왕 부부가 탄 마차가 바위에 부서지며 낭떠러지 밑으로 추락했다.
그는 혼란스러운 틈을 타 대신관의 마차로 들어갔다.
그러나 신성력을 채울 수는 없었다.
‘가짜군.’
레바나의 대신관에게는 신성력이 없었다.
그는 실망스러웠으나 아쉬운 대로 대신관의 몸을 빼앗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절벽 아래에서 찾아온 시신을 직접 확인했다.
힘이 많이 약해져 영혼의 흔적은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훼손된 시신이 입고 있는 것은 분명 국왕 부부의 옷이었다.
증거를 본 라파일은 레바나의 대신관이 된 채 에피파네스로 돌아왔다.
그리고 키네시아와 완벽한 조력 관계가 되었다.
하지만 키네시아의 행동에 아무런 의문이 없는 건 아니었다.
“폐하께 진실을 너무 빨리 밝힌 것 아닙니까? 폐하가 지금 포넨트를 따라가면 금방 따라잡을 텐데요.”
“적당히 시간을 벌어 두라고 사람을 보내 놨으니 금방 돌아오진 못할 거예요.”
“그녀가 다치시면 안 됩니다.”
“작은 피해 정도는 감수하세요. 어차피 당신이 원하는 건 이라네리아의 몸이 아니잖아요.”
서늘하고 섬뜩한 청보라색 눈빛은 키네시아를 찌를 것처럼 날카로웠다. 그러나 키네시아는 두려움 없이 그를 마주 봤다.
그 모습이 이라네와 비슷해 라파일은 곤두선 신경이 조금 뭉툭해졌다.
“그러죠.”
키네시아는 몸을 돌려 책상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신성력을 빼앗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있나요?”
“상대가 신성력을 사용해야 합니다. 신관들은 대체로 몸에 상처를 입으면 무의식적으로 신성력을 사용해요. 다리를 잘라 놓는 편이 흡수하기 편하겠군요.”
“그러면 죽을지도 몰라요.”
“상관없습니다. 죽어도 한동안 신성력은 남아 있으니까요.”
“……플로레타를 공격하는 건 제가 할게요.”
라파일이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리며 차가운 눈으로 키네시아를 쳐다봤다.
“왜, 새삼 두려워졌습니까? 찌르는 척하고 도망칠 수 있게 도와주기라도 하려고요?”
“제가 다 된 일에 뭐 하러 재를 뿌리겠어요? 제가 접근하는 편이 의심을 덜 받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으니까 드리는 말씀이에요.”
“……좋습니다.”
수긍하면서도 라파일은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시켜 상해를 입히는 것과 직접 찌르는 것은 다르다.
그녀가 나중에 변심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키네시아는 라파일의 의심이 당연하다는 듯 신경 쓰지 않으며 계획을 읊었다.
“그럼 제가 아버지의 방으로 플로레타를 유인해서 찌를게요. 흡수하는 데는 시간이 얼마나 걸려요?”
“성녀면……. 완전히 흡수하는 데에 하루 정도 필요합니다.”
“많이 고통스럽나요?”
“그렇겠죠.”
“그럼 비명이 새어 나가지 않게 방음 마법을 미리 설치해 둬야겠네요.”
“동생을 해하는 일인데, 괜찮겠습니까?”
“……에피파네스를 지켜 주겠다는 약속만 잊지 마세요.”
라파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성녀가 올 때까지 궁전에서 머물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세요.”
가볍게 인사한 라파일이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거대한 문이 매끄럽게 닫히고, 발소리도 점점 멀어졌다.
책상 앞에 꼿꼿하게 서 있던 키네시아는 주변이 정적에 휩싸이자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조용히 흐느끼던 그녀는 이내 눈물을 닦아 내고 몸을 일으켰다.
‘잘한 거야. 지금까지도 잘 했으니까. 약해지지 마.’
그녀는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침대로 걸어가 협탁 서랍을 열었다.
스페르모가 주고 간 약병과 호신용으로 둔 단검이 보였다.
키네시아가 단검을 들어서 날을 확인하고 있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화들짝 놀란 키네시아가 그대로 단검을 겨눴다. 날 끝에는 요르고스가 서 있었다. 평소라면 얼굴을 보자마자 성질을 긁어댔을 요르고스가 오늘따라 조용했다.
‘라파일과 한 말을 들었나?’
불안해진 키네시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시죠?”
“내가 언제는 일이 있어서 왔어?”
요르고스가 단검에 시선을 둔 채 대답했다.
키네시아는 단검을 다시 서랍에 넣고 몸을 돌렸다.
“황자님. 전쟁이 나기 전에 고국으로 돌아가세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해.”
요르고스가 입술을 삐뚜름하게 말아 올리고 빈정거렸다.
“뭘 그렇게 보채? 내가 죽으면 제일 좋아할 사람이 너 아니야?”
키네시아는 그를 상종도 하지 않은 채 책상으로 돌아갔다. 요르고스는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그리고 몸을 홱 돌려 밖으로 나갔다.
키네시아는 잠깐 문에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밀린 업무를 처리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궁전으로 샤마흐 신전의 마차가 들어왔다.
“키네샤!”
안에서 내린 플로레타는 눈물을 흘리며 키네시아를 끌어안았다.
“이게, 이게 무슨 소리야? 엄마 아빠가 돌아가셨다니……. 이게, 무슨…….”
“로라, 진정해.”
“미안해, 키네시아. 내가 떠나지 말아야 했어. 내가 있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미안해, 미안해, 키네시아.”
“아니야…….”
키네시아는 눈물을 쏟아 내는 플로레타를 끌어안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미안한 건 나지.”
그녀의 목소리는 플로레타의 울음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키네시아는 플로레타를 다독이다가 울음소리가 잦아들자 그녀를 품에서 떼어냈다.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쉬고 내일 이야기하자.”
키네시아는 그플로레타를 방으로 들여보내고 라파일을 찾아가 국왕의 방에 숨어 있으라고 연락했다.
그리고 스페르모가 준 독약과 두 자루의 검을 챙겨 품에 넣었다.
날이 밝기도 전에 플로레타가 키네시아의 방에 문을 두드렸다.
“키네시아. 나, 부모님을 뵙고 싶은데 혼자서는 도저히 용기가 안 나…….”
“그래. 같이 가자, 로라.”
키네시아는 제 동생의 손을 잡고 복도를 걸었다. 누군가 뒤따라오는 듯해 계속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신경이 예민해진 것이라고 여긴 키네시아는 이내 신경을 꺼버렸다.
곧 국왕의 침실 문이 열리고, 플로레타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키네시아는 뒤따라가며 마른침을 삼켰다.
부모님의 시신을 발견한 플로레타가 눈물을 쏟아 내며 침대로 다가갔다.
그러다가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눈물을 닦아 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뒤돌아 말을 걸려는 순간,
“키네샤, 이거, 헉!”
날카로운 단도 끝이 플로레타의 아랫배를 찔렀다.
“미안해, 로라…….”
키네시아는 제 동생에게 속삭이며 칼을 뽑아 냈다.
“키, 키네샤, 왜……. 왜, 네가 나를…….”
단단히 마음을 먹었음에도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모습을 보자 키네시아는 뒷걸음질 치다가 넘어지고 말았다.
그런 그녀의 뒤에서 라파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움츠린 채 떨고 있는 키네시아에게 잠시 시선을 준 뒤, 그녀를 지나쳐 플로레타에게 다가갔다.
“레바나의, 대, 신관……?”
플로레타의 말에 라파일이 환히 미소 지었다. 그리고 새하얀 빛이 피어오르기 시작한 플로레타의 옆구리에 검보라색 손을 얹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라파일이라고 합니다.”
“아, 아아아악!”
절명하는 듯한 비명이 들리고, 플로레타의 몸이 반쯤 떠오르며 뒤로 확 꺾였다.
새하얀 신성력이 라파일의 몸으로 회오리치며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이 제대로 진행되기도 전에,
-푸욱!
살가죽을 찢는 소리가 한 번 더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