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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138화 (138/151)

<138화>

“왜 저놈은 멀쩡하지?”

“그러게. 레바나의 대신관은 전하들과 동행했다고 하지 않았어?”

펠리온도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법 사이가 가까워 보이는 키네시아와 레바나의 대신관을 노려보았다.

마차가 어쩌다 전복되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운이 좋아 레바나의 대신관이 다치지 않고 돌아왔다고 해도, 그는 절대 키네시아와 단둘이 차를 마시거나 하하 호호 할 사이가 아니었다.

나는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소피아를 불러 부모님의 사고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라고 시켰다.

“렘록 산맥 인근을 지나갈 때 산사태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게 부모님이 타고 있는 마차만 덮쳤고?”

“네. 잠시 쉬어 가느라 멈춰 있었던 데다가 레바나의 대신관은 마차를 따로 써서 무사했다고 해요.”

이 정도는 우연히 있을 수 있는 사건이다.

그러나 소피아의 침묵은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말이 끝나서 입을 다물었다기보다는 목전까지 차오른 말을 꺼내도 될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숨길 게 있으면 티 내질 말아야지, 소피아.”

냉랭한 목소리에 소피아가 놀라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에요, 공주님.”

그녀는 그러고도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내 인내심이 바닥나기 직전에 입을 열었다.

“단지, 이간질하는 것처럼 들릴까 걱정이 되어서요.”

“판단은 내가 할 테니 너는 사실만 말해. 더하거나 덜어 내지 말고.”

“사실 궁전 내부에 저하께서 국왕 내외를 암살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이유는?”

소피아는 몇 가지 이유를 짧게 설명했다.

키네시아가 부모님께 렘록 산맥 인근 도시에 머물러 시장의 저택에 꼭 들르라고 말했으며, 산맥을 지날 때는 절대 마차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소문이 퍼졌다고?”

“물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다들 키네시아 저하의 성격을 아니까요.”

고작 풍문이면 소피아가 나에게 말을 꺼내는 걸 망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직 더 남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계속 말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소피아가 말을 이었다.

“따로 알아봤는데, 국왕 내외가 도착하기 전에 키네시아 저하의 시종이 시장의 저택으로 들어가는 걸 목격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키네시아가 부모님을 죽일 리 없다.

왕위가 가지고 싶었으면 차라리 아버지께 양위를 요청했겠지. 가족애가 남다른 그녀가 어떻게 아버지를 죽이겠어?

말도 안 되는 의심이다.

“알겠어. 나가 봐.”

소피아가 떠난 뒤에도 머리가 복잡했다.

이마를 짚고 있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펠리온. 너는 신성력에 영향을 받지 않으니까, 동대륙까지 순간 이동으로 갈 수 있어?”

“그렇지.”

“그럼 가서 진짜 레바나의 신관을 데려와 줘.”

이미 지시스와 타솔라를 보내 놨지만 레바나의 대신관이 수상하게 행동하는데 마냥 그들을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는 길에 지시스와 타솔라도 챙겨오고.”

“음……. 다른 애들은 괜찮지만 신관은 순간이동을 하면 상반신만 올 수도 있는데? 바람을 일으켜서 배를 고속으로 이동시킬 순 있지만, 그러면 일주일은 걸릴 거야.”

“그 정도면 괜찮아.”

떨어져 있기 싫어하는 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표정을 읽은 게 아니라, 정말 느껴졌다.

신기한 마음에 각인이 있는 부분에 손을 올리자 펠리온이 작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다치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다녀올게.”

“……약속해.”

약속은 해도 지킬 수 있을지는 모른다. 펠리온은 그걸 알면서도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사라졌다.

나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대한 몸을 사렸다.

그러면서도 레바나와 키네시아를 주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들의 만남은 단순히 일회성에서 그치지 않았다.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들은 사람은 없지만 같이 있는 것을 목격한 사람은 종종 있었다.

그 와중에 시간이 지나 포넨트가 궁전을 떠나는 날이 되었다.

그는 배웅하는 키네시아와 인사하고 내 앞으로 왔다. 포넨트는 딴에 자기도 이제 어른이라고 슬픔을 잘 숨기고 있었다. 그래서 더 못마땅했다.

“정말 갈 거야? 너는 페라포네 같은 여자와 결혼하고 싶어?”

포넨트는 대답하지 않고 쓰게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듯 거칠게 쓰다듬을 뿐이었다.

“갈게. 네가 키네시아 좀 잘 보살펴 줘.”

“……독개미굴로 들어가는 게. 네 걱정이나 해.”

“이게 끝까지 오빠한테!”

나는 포넨트의 꿀밤을 피하지 않고 맞아 줬다. 힘 조절을 했는지 별로 아프지도 않았는데 정작 때린 사람은 놀라 굳고 말았다.

“그걸 왜 가만히 맞고 있냐? 작별 인사야?”

“뭐래. 빨리 가.”

포넨트가 기가 찬다는 듯 웃으며 한 번 더 나를 쓰다듬고 몸을 돌려 마차에 올랐다.

키네시아는 마차가 움직이기도 전에 냉정하게 몸을 돌려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한참을 서서 마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포넨트를 배웅한 뒤, 숨을 깊게 내쉬며 텅 빈 옆자리를 보았다.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제 부탁으로 떠나는 형제를 끝까지 배웅해 주지도 못하나?

내 일도 아닌데 울컥 서운함이 치밀었다.

‘역시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어.’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집무실로 가기 위해 복도를 지나는데, 맞은편에서 레바나의 대신관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는 나를 빤히 보다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공주님.”

“그러게요.”

대충 대답하며 대신관을 눈으로 훑었다.

‘원래 장갑을 꼈었던가?’

수상함이 느껴졌으나 굳이 적대적인 사람을 자극해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기에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나는 고갯짓으로 인사하고 그를 지나쳐 왕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키네시아는 익숙하게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한 채 일을 하고 있었다.

장례식을 치르지 않아서 부모님의 죽음이 아직 실감 나지 않는 걸까? 저 자리에 키네시아가 앉아 있는 게 어색했다.

“키네시아.”

집중하고 있던 키네시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나를 맞이했다. 그러나 표정이 잠시 굳는 것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나는 이를 꽉 깨물고 치밀어 오르는 온갖 의심과 분노를 눌러 담았다.

그리고 평온해진 목소리로 여상스레 물었다.

“요즘 레바나의 대신관과 자주 만나던데.”

“맞아. 할 이야기가 있어서.”

대신관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잘 눌러 담아 놨던 분노가 툭 튀어나왔다.

“대신관하고 네가?”

내가 들어도 비꼬는 것 같았지만 중요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키네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성큼 다가갔다.

“지금 무슨 소문이 돌고 있는지 알아?”

키네시아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리며 침착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아.”

“안다고?”

“내가 부모님을 죽였다는 소문 말하는 거잖아. 나도 알아. 하지만 리아,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헛웃음을 흘리는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귀족들은 전쟁이 목전이니 소문 때문에 날 폐위하진 못할 거야.”

“폐위가 문제야? 네 오명은? 넌 억울하지도 않아?”

“억울하지 않아.”

키네시아가 아무런 동요 없는 표정으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죽인 게 맞으니까.”

“…….”

쟤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장난인가? 키네시아의 표정은 진지했지만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하……. 농담하지 마. 네가 어떻게 부모님을 죽여?”

“성 라파일의 요구가 그것이었으니까. 너도 나에게 라파일의 명령을 따르라고 했잖아.”

“……지금 나한테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네가 내 말 한마디에 사리 분별 못하고 부모님을 살해했다는 말을?”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 사실이니까.”

키네시아는 책상을 돌아 나와 내 앞에 섰다.

“리아. 네가 노력해 줬지만 에피파네스는 아직 터무니없이 약해. 파라돈이 무리하게 결혼 동맹을 요구해도 제대로 거절할 수조차 없어.”

“그건 이번 전쟁이 끝나면!”

“너무 늦어, 리아. 너무 늦다고. 전쟁 동안 백성들이 흘릴 피는? 화살받이가 될 내 나라 병사들은? 군사들의 발이 짓밟혀 황폐해질 에피파네스의 국토는?”

“…….”

“최소한의 희생으로 나라를 지켜야 해. 그 희생이 설령 내 가족이라고 해도. 그게 대의를 위한 거야. 성 라파일은 내가 협조하면 승리를 안겨 준다고 했어.”

“그를 믿어?”

“정확히는 그의 힘을 믿어. 성 라파일이 가진 힘은 진짜야. 그리고 그는 절대 에피파네스를 망가트릴 수 없어. 리아, 네가 있으니까.”

키네시아가 손을 뻗어 내 어깨를 잡았다.

“내 마음은 네가 더 잘 알겠지, 리아. 넌 황제였고, 이런 생각도 너에게서 배운 거니까.”

“하지만 나는 내 선택을 후회했어. 그리고 너까지 똑같은 길을 걷게 하지 않을 거야.”

“…….”

“네 만행을 알리고 포넨트를 왕으로 세우겠어.”

“글쎄. 그럴 수 있을까 모르겠네.”

키네시아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부모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지? 포넨트도 그 길로 갔어. 운이 좋아 살아남는다고 해도 아마 파라돈에 도착하자마자 페라포네의 손에 죽을 거야. 이미 동맹을 맺지 않겠다고 서신을 보냈거든.”

“포넨트의 목숨을 기폭제로 전쟁을 일으키려는 거야? 너, 너, 내가 아는 키네시아 맞아? 제정신이야?”

“그 어느 때보다.”

더 말을 섞을 필요도 없다. 나는 곧장 몸을 돌려 달려 나갔다.

막지 않는 키네시아를 보면서 깨달았다.

‘이건 함정이야.’

어쩌면 레바나의 대신관을 가까이한 것도 펠리온을 내 곁에서 떼어 놓고, 나를 납치하거나 암살해 라파일을 휘두를 고삐로 쓰려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손 놓고 있으면 포넨트가 죽는다. 부모님을 잃었는데 형제마저 잃을 순 없다.

나는 시종장에게 키네시아가 파라돈에 편지를 보낸 적이 있는지 확인하고 바로 말에 올랐다.

등 뒤로 키네시아의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대로 정원을 가로질러 나갔다.

키네시아가 나를 위해 설치해 둔, 밟을 수밖에 없는 덫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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