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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137화 (137/151)

<137화>

***

우리는 마법으로 순식간에 아네스 궁에 있는 내 방에 도착했다.

방을 청소하던 하녀가 우리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나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곧장 방을 나왔다.

복도에서 일하고 있는 자들은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멈추자 펠리온이 손을 잡아 왔다. 나는 그의 손을 꽉 쥐며 마른침을 삼켰다.

굳은 채로 서 있는데 마찬가지로 검은 옷을 입은 시종장이 다가왔다.

“공주님. 어떻게 이렇게 빨리…….”

“키네시아는?”

“집무실에 계십니다.”

나는 시종장에게로 아르만을 밀었다.

“얘 내 시종으로 쓸 거니까 교육시켜.”

그리고 펠리온의 손을 잡은 채로 걸음을 옮겼다.

검은색. 검은색. 온통 죽음을 상징하는 검은색뿐이었다. 정말 부모님이……. 룩소르와 오틸리에가 죽기라도 했단 말인가?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겠지. 라파일이 부모님을 죽이라고 했으니까, 키네시아가 그를 속이기 위해 뭔가 손을 써 둔 걸 거야.

심호흡하며 집무실 문을 열었다.

소파에 앉아 몸을 앞으로 숙인 채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있던 포넨트가 나를 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리아.”

성큼 다가온 그가 나를 끌어안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두려움이 몰려왔다.

진짜 돌아가신 거면 어떡하지? 10년 동안 어머니, 아버지라고도 불러 주지 못했는데? 작별 인사조차 하지 못했는데.

키네시아가 포넨트에게는 말하지 않은 거겠지. 계획을 공유하던 사이도 아니었고, 원래 이런 일일수록 아는 사람이 적어야 하니까.

그래도 나에게는 진실을 말해 줄 거야. 부모님이 죽은 게 아니라고.

나는 뻣뻣하게 굳어 있다가 포넨트를 밀어 내고 키네시아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무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왔구나. 너도 검은 옷으로 갈아입어, 리아.”

덧칠하면 모든 색을 가릴 수 있는 검은색. 그 검은색 상복이 키네시아의 감정마저 전부 뒤덮어 버린 듯했다.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는 죄책감도, 슬픔도 찾을 수가 없었다.

“시신을, 시신을 확인해 봐야겠어.”

포넨트 비틀거리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내가 확인해 봤어. 알아볼 순 없었지만…….”

포넨트가 흐느끼며 입을 다물자 키네시아가 그의 말을 이었다.

“마차가 추락할 때 밖으로 튕겨 나오셔서 시신이 많이 훼손되었어. 신분은 옷하고 소지품으로 확인했고. 지금은 장례식을 위해 보존 마법을 걸고, 훼손된 부분을 재건축해 놓은 상태야.”

“복원이 아니라?”

펠리온의 질문에 키네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의 신체를 원래대로 돌리는 건 힘든 마법이라고 해서.”

나는 펠리온을 보았다. 키네시아의 말이 틀린 건 아닌 듯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믿을 수 없어 키네시아를 쳐다보자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은 옷으로 갈아입고 오면 안내해 줄게.”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펠리온이 마법으로 우리의 옷을 검은색으로 바꿨다.

키네시아는 잠깐 펠리온을 응시할 뿐, 놀란 기색 없이 몸을 돌려 아버지의 방으로 향했다.

침대 위에는 부모님의 시신이 잠든 것처럼 누워 있었다. 옆에서 펠리온이 속삭였다.

“키네시아가 말한 마법이 걸려 있어.”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두 사람의 죽음을 믿을 수가 없어 다가가 얼굴을 쓸어 보았다. 손 아래로 느껴지는 피부는 부드럽지만 차갑고 딱딱했다.

“안 돼……. 이제야, 이제야 기억해 냈는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펠리온이 나를 끌어안아 주었다. 나는 입술을 악물며 울음이 새어 나가는 것을 막았다.

그렇게 한참을 슬픔에 허덕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키네시아는 시선을 내리깐 채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진짜로 돌아가신 거 아니지? 네가 라파일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 위장한 거지?”

“……미안해, 리아.”

저 사과는 무슨 뜻일까. 현기증이 일었다. 비틀거리자 펠리온이 내 어깨를 끌어안아 부축해 주었다.

나는 그에게 기댄 채 다시 집무실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자리에는 키네시아가 앉았다.

포넨트가 나를 끌어안고 울었다. 나도 그에게 기대 눈물을 흘리다가 겨우 진정하고 키네시아에게 물었다.

“플로레타는? 플로레타도 이 사실을 알아?”

“연락했어. 레튜니아에서 만찬이 잡혀 있었는데 취소하고 바로 온대. 순간 이동은 신성력 때문에 제대로 통하지 않으니까 고속 이동 마법이 걸린 마차를 타고 온다더라.”

포넨트가 고개를 홱 돌렸다.

“플로레타라면…….”

“아무리 성녀라도 죽은 사람을 살리진 못해.”

키네시아가 차갑게 포넨트의 희망을 잘라 냈다. 그리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얘들아. 지금 슬픔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니야. 페라포네 황제가 다시 결혼 동맹을 제안해 왔어. 요르고스가 싫다면 포넨트 너를 보내 달래.”

지금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 동맹 이야기가 나오냐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왕이 될 키네시아는 당연히 이성적인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이 입을 막았다.

키네시아는 이제 군주다. 절망의 순간에도 개인의 감정보다는 나라를 생각해야 한다.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모습인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플까?

입술을 깨무는데 포넨트가 갈라진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할게.”

“잘 생각했어, 포넨트.”

“대신 장례는 치르고 가게 해 줘.”

“그건 안 돼.”

차가운 거절에 나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너……!”

포넨트가 내 손을 끌어 다시 자리에 앉혔다. 그가 물기 어린 눈으로 그러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키네시아는 우리를 보다가 입을 다문 채 깊게 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포넨트. 하지만 장례가 치르기 전까지는 레튜니아도, 파라돈도 우리를 공격하지 않을 거야. 만약 공격한다면 도의적인 책임은 피하지 못할 테니까.”

“…….”

“그러니까 장례식을 치르기 전에 네가 동맹을 맺어야 해. 그러면 장례를 치르는 동안 우리가 전쟁에 대비할 수 있으니까.”

“굳이 파라돈을 선택한 이유가 뭐야?”

내 질문에 키네시아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레튜니아는 황위 다툼으로 출혈이 있었어. 전력에 손실이 없을 수가 없지. 그 사소한 차이가 전세를 뒤흔들 수도 있다고 생각해. 반면에 페라포네 황제는 거침없고 잔혹해. 전쟁에 적합한 성격이야.”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그 말을 들은 포넨트가 입술을 깨물었다가 소매로 거칠게 눈물을 닦아 냈다. 키네시아가 그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제 쌍둥이의 손등에 손을 겹쳤다.

“포넨트. 너도 파라돈에 감정이 안 좋은 거 알아. 페라포네 황제가 두려운 사람인 것도 맞고. 하지만…….”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키네시아. 그러니까 설득하지 않아도 돼. 그냥……. 3일만 시간을 줘. 감정을 추스르고 바로 출발할게.”

“고마워. 포넨트.”

“아니야. 네가 이렇게 노력하는데, 내가 징징거릴 순 없지.”

포넨트가 키네시아를 한 번 꽉 끌어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돌아가서 쉴게.”

키네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의 행동을 빠짐없이 보다가 집무실을 나가는 포넨트를 따라갔다.

“결혼하기 싫으면 하지 마.”

포넨트가 한숨을 내쉬며 나를 봤다.

“전쟁에 필요하다잖아. 나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지.”

“어차피 키네시아도 페라포네 황제와 끝까지 함께할 생각은 없어.”

그렇게 준비해 두었으니 안다. 둘 중 한 제국이 약해지면 숨겨 둔 군사로 뒤통수를 칠 생각이니까.

“오히려 결혼 동맹이 방해가 될지도 몰라. 도움이 되어야 한다면 기사로서 참전해.”

“물론 참전도 할 생각이야. 하지만 지금은 필요하니까 부탁하는 거겠지. 오죽하면 부모님이……, 지금 같을 때 부탁하겠어.”

너에게 아무 설명도 안 해 주는데 그냥 따르겠다는 거야? 키네시아를?”

“뭐, 10년간 누구한테 뼈저리게 당해서 익숙하거든.”

“…….”

“걱정하지 마. 키네시아가 우리에게 해를 끼칠 애는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만…….”

포넨트가 내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펠리온이 내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우리도 방으로 돌아가자.”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따라갔다. 침대에 걸터앉아 멍하니 있는 순간에도 부모님이 돌아가신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문을 열고 들어와 우리 막내 어서 오라며 팔을 벌릴 것 같았다.

그때는, 돌아온 뒤에는 그 포옹을 피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간신히 울음을 참아 내는데 하녀가 정리하는 짐 사이로 이상한 모양의 담요가 보였다.

아버지 룩소르가 1년 가까이 틈이 날 때마다 어설픈 솜씨로나마 뜨개질을 해 내게 선물한 것이었다.

그걸 발견하자마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흐읍, 흑…….”

“괜찮아. 소리 내서 울어도 돼, 이라네.”

펠리온의 다정한 음성과 몸을 감싸는 온기에 속절없이 울음이 터졌다.

나는 하염없이 울고, 또 울다가 눈이 퉁퉁 붓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즈음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일어나고 난 뒤에는 부모님의 죽음을 조금이나마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는 포넨트를 설득하며 장례식 준비를 도왔다.

그러던 중에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레바나의 대신관이 멀쩡하게 궁전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키네시아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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