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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136화 (136/151)

<136화>

펠리온이 반짝이는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 들어 올렸다.

힘을 주지 않은 것 같은데도 몸이 딸려 올라갔다. 시야가 확장되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죽음을 경험했을 때처럼 몸이 지나치게 가볍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보지 않았는데도 뒤가 보였는데, 내 몸은 여전히 누워 있었다.

‘이게 뭐야?’

놀라 물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펠리온은 마치 내 생각이 들리는 것처럼 대답했다.

“영혼에 새기려면 몸과 영혼을 분리해야 하거든. 유체 이탈 상태로 만든 거야. 상체만.”

나는 펠리온의 얼굴을 보다가 시선을 내려 두 개의 빗장뼈 사이, 그 바로 아래를 보았다.

그의 가슴 중앙에 내 이름이 황금색으로 쓰여 있었다.

나는 반투명해진 손으로 그 글자를 덧그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같은 자리에 새겨 줘.’

펠리온은 은빛으로 감싸인 손가락을 든 채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망설임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을게.”

‘묻지 마.’

나는 그의 얼굴을 끌어 짧게 입을 맞추고 눈을 감았다.

‘난 준비 됐어.’

펠리온의 손가락이 빗장뼈 밑에 닿았다. 아이들이 손바닥에 글씨를 쓰며 장난칠 때와 같은 감촉이 느껴지고 나자 펠리온이 말했다.

“끝났어.”

‘이게 다야?’

“응. 별거 없지? 대신 몸에 들어가고 나면 좀 아플지도 몰라.”

‘괜찮아.’

눈을 뜨자 펠리온이 나를 다시 눕혀 주었다. 두껍고 꽉 끼는 옷에 억지로 몸을 밀어넣는 것 같은 감각이 느껴졌다.

완전히 들어온 것 같은데 가위에 눌린 듯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눈꺼풀과 손가락만 까딱거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가슴 쪽에서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흐윽!”

몸이 발작적으로 튀어 오르며 두 눈에서 생리적인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달궈진 쇠로 가슴을 마구 짓밟는 것 같은 통증이었다.

목을 뒤로 꺾어 숨통을 열었지만 그렇게 해도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의식이 툭 끊어져 버렸다.

***

눈을 떴다.

분명 천장이 보여야 하는데 시야에는 녹음이 가득했다. 몸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이미 이 느낌을 알고 있었다. 전생의 기억을 꿈으로 꿀 때면 항상 이런 느낌이 들었으니까.

‘그럼 이것도 꿈이겠네.’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제멋대로 움직이는 몸에 의식을 맡겼다.

한참 낯선 숲을 헤매던 나는 찬란히 반짝이는 호수 앞에 도착했다. 바로 옆에는 커다란 동굴이 있었는데, 안에서 짐승이 위협하는 듯한 소리가 났다.

나는 동굴을 들여다봤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은색 비늘. 창공처럼 맑고 푸른 눈동자.

펠리온이었다.

‘전생의 기억이구나.’

나는 기억 속에 갇혀 펠리온에 관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전생의 기억을 되살려 냈다.

애정, 설렘, 걱정. 그리고 그를 두고 죽어야 하는 절망과 죄책감까지도.

그 뒤로 10여 번의 삶을 꿈으로 겪었다.

마치 누군가가 내 인생을 요약해 1인칭으로 보여 주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 선명하게 기억나는 황제의 삶이 지나고 나자, 나는 지금의 몸으로 다시 태어났다.

기억의 시작은 룩소르와 오틸리에였다.

‘내가 진짜 이라네리아인 게 맞구나.’

기억이 없을 땐 막연하기만 했던 사실이 새삼 와 닿았다. 추억들은 화살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답답할 정도로 올곧지만 의젓한 첫째 언니, 친구 같고 듬직한 둘째 오빠. 상냥하고 다정한 셋째 언니. 그리고 이해와 사랑이 넘치는 부모님.

그들은 내가 겪은 가장 완벽한 가족이었다.

그들은 단순히 피를 이은 존재, 정이 든 사람들 그 이상이었다.

꿈은 라파일이 나를 유인해 별채에 있는 침대에 눕히는 것으로 끝이 났다.

숨을 헉 들이마시며 눈을 뜨자 노을빛으로 물든 방 안이 보였다.

‘얼마나 잔 거야?’

가늠하려 해도 갑자기 범람하는 기억들 때문에 생각을 이어 나갈 수가 없었다.

깨질 것처럼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한참을 끙끙거렸다.

부유물처럼 머릿속을 떠다니던 기억들이 서서히 가라앉고 나자 뭔가 허전했다.

‘펠리온이 왜 이렇게 조용하지?’

고개를 돌리자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는 펠리온이 보였다.

긴 세월 동안, 펠리온은 보상받지도 못하는 마음을 내게 맡긴 채 내 곁을 지켰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라 그런지 유난히 그가 애틋하게 느껴졌다.

나는 펠리온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이러고 있으니 아플 때 나를 쓰다듬어 주던 부모님의 손길이 떠올랐다.

궁전을 나올 때도 제대로 인사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갔을 때도 얼굴을 보지 않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렸다.

‘돌아가면 어머니, 아버지라고 불러 줘야지.’

상상만 해도 좋아할 게 눈에 선했다.

작게 웃으며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펠리온이 깨어나길 기다리는데, 한참이 지나도 펠리온은 눈을 뜨지 않았다.

“원래 이렇게 오래 자는 애가 아닌데…….”

의문을 품자마자 방대한 기억 아래 깔려 있던 사실이 고개를 들었다.

혹시 상처가 터지거나 덧나서 기절한 건가 싶어 다급하게 옷을 들어 올렸다.

절대 몇 시간 만에 나을 상처가 아닌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오래 잠들어 있었나 싶어 펠리온의 옆구리를 더듬는데 위에서 잠긴 목소리가 들렸다.

“자기야. 깨어나자마자 너무 적극적인 거 아니야? 나야 고맙긴 한데…….”

펠리온이 제 옆구리를 더듬고 있는 내 손을 끌어 입을 맞췄다. 나는 깨끗한 옆구리를 한 번 더 확인하고 고개를 들었다.

“너 상처는?”

“글쎄. 다 나았나?”

“내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길래?”

“나도 회복하느라 같이 자서 모르겠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나와 펠리온은 동시에 문을 바라봤다.

물을 가지고 들어오던 아르만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두 분. 깨어나셨습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뻗자 아르만이 물을 건네주었다.

“일주일간 잠들어 계셨습니다.”

“일주일이나? 펠리온도?”

“예.”

오래 잠들어 있었네. 나는 쇄골 밑을 손바닥으로 쓸며 물잔을 펠리온에게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바로 밀린 편지가 있는지 살폈다.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확인한 건 어머니와 아버지가 황제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떠나면서 내게 남긴 편지였다.

일주일이나 지났으니 무사히 도착했다든가, 그런 내용이 있을 것이다.

주머니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는데 펠리온이 나를 뒤에서 안으며 손을 뻗었다.

저절로 날아와 그의 손에쥐여진 주머니를 내게 건네며 그가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갈 거야? 레튜니아 황실?”

“글쎄.”

“궁전으로 돌아가자. 라파일은 힘도 많이 잃었고, 걔가 써먹으려고 손등에 도장 찍어 놓은 건 내가 다 없애고 왔거든.”

부모님 얼굴을 보고 싶긴 한데…….

펠리온이 라파일의 힘을 빼 놨다면 당장 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잠깐 보고 가도 되겠지.

게다가 혼자 해결하는 것보다 가족들과 함께 방법을 모색하는 게 훨씬 나을 것 같기도 하고.

고민하며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었다.

손을 휘젓자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는 작은 종이를 꺼내 펼쳤다.

그리고 그 위에 쓰인 글자를 눈에 담으며 멍하니 말했다.

“궁전으로, 아네스 궁전으로 돌아가자, 펠리온.”

펠리온이 떨리는 내 손을 잡아 주었다. 그러나 종이에 적힌 문장은 변함이 없었다.

[두 분 전하께서 파라돈으로 가는 도중 마차 전복 사고로 인해 사망하셨습니다.]

어둠 속에 몸을 웅크린 채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부모님의 부고 소식이었다.

***

“성녀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환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플로레타는 스페르모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스페르모가 가볍게 고개를 까딱여 보이고는 플로레타의 허리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옆에 있던 보좌관이 신기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성녀님께서도 마법 물품을 쓰시는군요.”

“네. 리아가, 아, 그러니까 저희 막내가 마법 주머니 하나 가지고 다니면 편할 거라고 해서요. 커다란 것도 잘 들어가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요.”

횡설수설하던 플로레타는 옆에서 미론이 작게 헛기침을 하자 정신을 차렸다.

“그것보다 이렇게 방문을 요청한 이유는 레튜니아 북쪽에서 발견된 유적 때문이에요. 벽화를 저희가 조사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으려고요.”

“안 그래도 편지를 받자마자 미리 준비해 두었습니다.”

보좌관이 플로레타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플로레타가 내용을 한번 읽고 고개를 들었다.

“바로 발굴을 진행해도 될까요?”

“가능합니까?”

“네. 급한 사안이라 신관분들께 먼저 가 있어 달라고 부탁드렸거든요.”

“그러십시오.”

스페르모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플로레타는 환하게 웃으며 감사를 전한 뒤 허가서를 마법 물품으로 전달했다.

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스페르모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방문해 주셨는데 대접을 하지 않으면 예의가 아니니 며칠 머물다 가시죠.”

“안 그래도 먼 길을 오느라 힘들었는데……. 감사해요.”

플로레타가 인사하자마자 스페르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녁 만찬 때 뵙겠습니다.”

“네. 그럼 그때 뵐게요.”

플로레타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나왔다.

안내받은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중앙 계단을 지나는데 이상한 기운이 그녀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잠시 멈춰 서 있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기운을 따라 움직였다.

“성녀님? 어디 가십니까?”

당황한 미론이 재빨리 그녀를 따라갔다.

플로레타는 빠른 걸음으로 처음 와 보는 황성의 지하를 찾아 내려갔다. 커다란 문 앞에서 플로레타가 낑낑거리자 미론이 대신 문을 열어 주었다.

플로레타는 고맙다는 인사조차 잊은 채 안을 들여다보았다.

비밀스러운 제단 위에는 어제 죽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깨끗한 모습의 이라네 황제와 팔다리만 유난히 노화된 라파일의 텅 빈 육체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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