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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135화 (135/151)

<135화>

좀 찝찝하긴 해도 사용해 본 결과 몸에 이상은 없었다.

펠리온도 저주가 풀려 신성력에 나쁜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했으니 사용해도 괜찮을 것이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붕대를 상처 길이만큼 잘라 냈다.

그리고 안쪽에 연고를 덕지덕지 바른 뒤 펠리온의 상처에 턱 하고 붙였다.

“아야. 아야야.”

“아픈 걸 아는 놈이…….”

이를 악물고 중얼거리니 펠리온이 입을 딱 다물고 엄살을 멈췄다.

너무 얄미워 등이라도 찰싹 때려 주려는데 그의 등은 시꺼먼 멍이 들어 있었다.

또다시 뜨겁고 습한 무언가가 목구멍을 콱 치고 올라왔다.

“후우…….”

한숨을 내쉬자 펠리온이 움찔거렸다. 나는 감정을 조금 추스른 후 펠리온의 옆구리를 보았다.

신성력이 든 연고 덕인지 지혈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상처가 깊으니 완전히 나을 때까지 며칠은 있어야 할 것이다.

상처에 붙여놓은 붕대를 고정해 주기 위해 펠리온에게 바짝 붙었다.

나는 옆구리의 상처를 원수처럼 노려보며 새 붕대를 길게 풀자 펠리온이 알아서 팔을 양옆으로 벌렸다.

무슨 개싸움을 한 건지 가슴팍과 배, 팔뚝에도 자잘한 찰과상이 있었다.

일부러 머리카락이 닿지 않게 조금 간격을 둔 채 펠리온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오른손에 쥐고 있던 붕대 끝을 왼손으로 가져와 두르려는데 펠리온이 별안간 팔을 내려 나를 꼭 끌어안았다.

“걱정시켜서 미안해. 내가 경솔했어.”

고개를 들어 펠리온의 얼굴을 노려봤다.

펠리온이 피가 범벅인 손을 뻗으려다가 차마 나를 만지지 못하겠는지 그대로 말아 쥐었다.

‘만지고 싶으면 만지면 되지, 그깟 피 좀 묻은 게 뭐가 대수라고 어물쩍거려?’

라파일을 찾아간 건 분명 나를 지키려고 한 행동일 것이다. 그러다 다쳐 놓고는, 피 묻은 손으로는 감히 만져선 안 되는 사람처럼 나를 대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나는 돌봐야 할 화초도 아니고, 건들면 깨지는 유리도 아니다. 그렇게 곱게 자라지도 않았다.

네가 흘린 피가 정당하다면 같이 뒤집어쓰는 게 맞다.

붕대를 놓고 그의 손을 펼쳐 내 얼굴에 붙여 놨다. 하지만 화가 풀린 건 아니라 불만스러운 표정은 지우지 않았다.

분명 살벌한 표정일 텐데, 펠리온은 표정을 허물어트리며 웃었다.

“웃어? 미안하다는 놈이?”

“너무 귀여워서 그만.”

귀엽다니. 눈에 콩깍지가 씌어도 단단히 씌었나 보다.

그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다시 붕대를 감았다. 등 뒤로 붕대를 돌리기 위해 가까워질 때마다 펠리온이 나를 꼭 끌어안으며 변명했다.

“라파일한테는 잠깐 이야기 좀 나누려고 간 거야.”

“걔 제정신 아니야. 말이 통할 리가 없잖아.”

“응. 그렇더라. 사실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래도 같은 미친놈이니까 좀 통할 줄 알았지.”

“말이나 못 하면…….”

중얼거리면서 붕대를 매듭지었다.

나는 나를 휘어 감고 있는 펠리온의 팔을 떼어 내며 다른 상처들을 살폈다.

“연고 어때? 이상한 느낌 들면 바로 닦아 내고.”

“괜찮아. 진짜 신성력만 담긴 연고야. 좀 열받긴 해도 라파일이 자기한테 해 끼칠 일을 할 리가 없으니까.”

“지금은 또 어떤지 모르지.”

펠리온의 등 뒤로 돌아가 시꺼멓게 변한 등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다친 것도 아닌데 보기만 해도 등이 욱신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걔는 어디 있는데?”

“무너진 샤마흐의 사원 지하에서 일을 꾸미고 있었던 모양인데, 지금은 모르겠어. 도망쳤거든.”

“다 잡은 걸……!”

놓쳤다는 것에 열불이 확 뻗쳐 목소리를 높이려고 할 때 만신창이가 된 펠리온의 몸이 시야에 들어왔다.

무리해서 잡으려고 했다가는 돌아오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런 일이 생기느니 다 잡은 라파일을 50번 놔 주는 게 더 나았다.

“잘했어. 라파일이야 다시 찾으면 되지.”

나는 연고를 바를 때마다 옅어지는 멍을 보다가 다른 상처에도 연고를 발라 주었다. 자잘한 상처는 단숨에 아물었다.

그러고 나자 좀 봐줄 만한 몰골이 되었다.

나는 펠리온에게 셔츠를 입혀 주고 다시 그의 앞으로 돌아왔다.

“펠리온.”

“으응?”

진지한 목소리로 부르자 그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나는 펠리온이 도망가지 못하게 그의 양손을 맞잡았다.

“방어 마법이 해제되었을 때,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 줄 알아?”

“…….”

“너를 잃는 줄 알았어.”

시종일관 올라가 있던 펠리온의 입꼬리가 서서히 처졌다. 그가 드물게 당황한 얼굴로 내 손을 맞잡았다.

“나는 그냥 이라네 너를 지켜야겠다고만…….”

말을 하다만 그가 찬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굳었다. 그러다 이내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미소 지었다.

그의 떨리는 손이 부드럽게 내 볼을 감쌌다. 엄지로 조심스럽게 눈밑을 쓰다듬으며 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가 이런 심정이었겠구나. 나를 지키려고. 오직 나를 지키려고.”

아무래도 과거의 어느 때를 떠올리는 듯했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혼자 간직해야만 했던 우리의 추억을.

“그럼 공주님은 그때의 나와 같은 심정이었겠네.”

펠리온이 맞잡은 손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몸에 힘을 빼고 그의 품에 안겼다. 귓가로 심장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그의 몸은 신성력이 든 연고로 인해 깨끗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나는 어떤 상처가 어떻게 나 있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길게 찢어졌었던 피부 위를 손끝으로 훑으며, 나는 북받치는 슬픔을 꾹꾹 내리눌렀다.

펠리온이 내 손을 가져가 그 끝에 입을 맞췄다.

“다신 말도 없이 사라지지 않을게.”

나는 가만히 그에게 안겨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걸로는 부족해. 나도 네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게 해 줘.”

“응?”

펠리온이 가증스럽게 모른 척을 했다. 대충 웃어넘기려는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콱 잡아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궁전에 있을 때면 내가 어디에 있든 네가 찾아왔잖아. 이라네리아, 아니지. 내 2살 생일 때도 참석했다는 걸 보면 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다는 뜻 아니야?”

펠리온은 빠져나갈 구멍이 있나 눈을 굴리다가 한숨을 쉬며 미소 지었다.

“맞아. 용케 알았네. 그럼 내가 위치가 뜨는 지도를 만들어 줄게.”

“아니. 마법 물건을 잃어버리면 찾지 못하는 그런 방식 말고.”

“그럼 도난 방지 마법이라도…….”

나는 언젠가 받았던 펠리온의 편지를 떠올리며 그의 말을 잘라 냈다.

“펠리온, 네 이름을 내 영혼에 새겨 줘.”

청보라색 눈동자가 새파랗게 물들었다. 두 눈에는 환희를 가득 담고서도 그는 입술을 달싹이기만 할 뿐 내 제안을 승낙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눈을 질끈 감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그건 안 돼.”

“왜? 인간이 하면 죽어?”

“그건 아니지만…….”

그럼 뭐가 문제야. 불만스러운 눈으로 올려다보자 그가 내 머리를 감싸 다시 제 품에 넣었다.

“그렇게 예쁘게 쳐다봐도 안 돼.”

“너, 진짜 콩깍지……. 아니, 왜 안 되는지 이유부터 설명해 봐.”

“한 번 새기면 돌이킬 수 없어.”

난 또 뭐라고.

“상관없어.”

“상관있어, 이라네. 그렇게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야. 내 이름을 네 영혼에 새기면 너는 나와 생사를 함께 해야 돼.”

“내가 죽으면 너도 죽어? 네가 죽으면 나도 죽고? 그러면 지금은? 너만 내 이름을 새긴 상태잖아.”

“내가 죽는다고 공주님한테 영향이 가진 않을 거야.”

“내가 죽으면 너도 죽고?”

“원래는 저주 때문에 죽지 못하는 몸이어서 살아 있었는데, 지금은 모르겠네.”

그 말을 듣고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펠리온이 제 목숨을 지나치게 가볍게 여긴다는 것이었다.

그래. 못해도 2000년은 살았을 텐데 죽음 따위는 우습겠지.

하지만 나는 아니다. 내게 영원한 이별은 두려운 것이었고, 어느 날 갑자기 그의 부고를 듣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내 목숨이 자기 생사에 달려 있으면 오늘처럼 무모한 짓을 하진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 스스로 놀랐다. 펠리온이 위험한 짓을 하는 걸 막겠다고 내 목숨을 저울대에 올리다니.

미친놈하고 어울리다 보니까 나도 정신이 나간 모양이다.

동시에 펠리온을 향한 내 마음이 그만큼 깊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다른 건 없어?”

“만약 내가 싫증 나거나 미워지더라도 내 곁을 떠나지 못할 거야. 서로의 영혼 한 자락을 나눠 가진 것과 같아서 항상 붙어 있어야 하거든.”

“할래. 내가 어떻게 하면 돼?”

“이건 충동적으로 결정할 문제가…….”

“충동적이지 않아.”

펠리온 위에 올라타 그의 얼굴을 붙잡아 두고 눈을 맞췄다.

“널 그만큼 사랑해, 펠리온.”

“…….”

“너에게 날 줄게. 너는 이미 2000년 동안 내 것이었으니까, 지금부터라도 나를 가져야 조금 공평하지 않겠어?”

나는 미소가 사라진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내 허리를 감싼 펠리온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남은 손으로 내 뒷머리를 감싸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지고, 입술이 맞닿았다.

나는 그의 어깨에 팔을 걸쳐 놓은 채 입을 벌렸다.

평소보다 느리고 집요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맞닿은 입술이 떨어진 순간 그가 낮은 목소리로 달콤하게 경고했다.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어.”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 마.”

고개를 끄덕이자 펠리온이 서글픈 웃음을 터트리며 다시 입을 맞췄다.

나를 눕히는 그의 몸 위로 은색의 기류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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