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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134화 (134/151)

<134화>

***

오랜만에 푹 자고 일어났다. 다 펠리온 덕분이었다. 고맙다는 말이라도 하려고 눈을 감은 채로 몸을 돌려 옆을 더듬었다.

펠리온의 허리를 끌어안으려는데, 온기는 없고 이불의 차가운 감촉만이 느껴졌다.

남아 있던 졸음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나는 이불을 걷어 내며 몸을 일으켰다. 옆을 보니 역시나 휑하니 비어 있었다.

“펠리온?”

부르면 당장 나타나던 녀석이 보이질 않는다. 다시 불러 봐도 마찬가지였다.

침대를 벗어나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지만 펠리온을 찾을 수 없었다.

“말도 안 하고 어딜 간 거야.”

쪽지도 없는 걸 보면 멀리 간 건 아닐 텐데. 식사하러 갔나? 아무것도 안 먹었으니 배가 고팠을 수도 있다.

펠리온이 갔을 만한 곳을 생각하며 방을 나가려 할 때였다.

문고리를 잡으려고 뻗은 손끝에 단단한 것이 툭 부딪혔다.

처음에는 손을 잘못 뻗었나 싶었다. 그러나 내가 손을 뻗은 자리에는 문고리가 있었다. 다만 투명한 막에 막혀 잡을 수가 없을 뿐이었다.

나는 두꺼운 유리처럼 단단하고 투병한 막에 손을 올렸다.

은빛이 퍼지는 게 누가 해 놓은 것인지 알 것 같았다.

“펠리온…….”

불길한 예감이 팔뚝을 쓸었다. 그 자리에 소름이 돋아났다.

나는 투명한 벽에 귀를 대 방음 능력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아르만이 있는 옆방 벽을 두드렸다. 곧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무슨 일 있으십니까?”

“문 열리는지 봐 봐.”

문고리가 몇 번 달칵거렸다.

“잠겨 있습니다.”

“하하!”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니까, 지금 나를 여기 가둬 두고 자기는 사라져 버린 거야? 편하게 자고 있으라고 했으면서? 심지어 어디 갔는지 알리지도 않고?

“펠리온 어디 갔는지 알아?”

“어디 갔는지는 듣지 못했는데 제 방 문 안쪽에 쪽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뭐라는데?”

“아가씨께서 주무시니까 방해하지 말라고요.”

나는 이마를 짚은 채 방 안을 서성였다.

아르만에게는 쪽지를 남겼다. 그런 거면 내가 깨어나기 전에 무언가를 처리하고 돌아오려고 했던 걸까?

그러다가 문제가 생겼고?

펠리온이 위험에 처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짜증이나 분노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나갈 수 있어야 찾아보든 할 텐데.’

대마법사가 쳐 놓은 방어막을 깨트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걸 펠리온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냥 떠났다는 건 오래 나가 있을 생각은 없었다는 뜻이겠지.

나는 걱정과 불안을 애써 가라앉혔다.

그래. 금방 돌아올 거야. 오면 혹으로 3층 탑을 쌓고, 멱살을 잡아 탈탈 털어 줘야지.

그렇게 다짐하고 자꾸만 빠르게 뛰려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긴 숨을 내쉬었다.

“아르만. 너는 혹시 펠리온이 나간 걸 본 사람이 있나 알아봐 줘.”

“네, 아가씨.”

아르만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나는 의자에 앉아 펠리온을 기다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숨을 크게 내쉬는 빈도가 늘어나고 입 안이 바싹 말랐다.

벌써 한 시간이 지났다. 내가 잔 시간까지 합치면 3시간도 넘는 시간이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가 앉기를 반복하면서 방어막을 쳐다봤다.

마법은 마정석을 사용하거나 물건에 마법진을 새긴 게 아니라면 오래 유지하기가 힘들다.

마법사가 마법을 쓴 지점과 너무 멀리 떨어지거나, 기절하거나, 마력이 고갈되면 마법은 사라진다. 물론 사망했을 때도 마법은 해제 된다.

그러니 아직 괜찮다. 보호 마법이 발동되고 있는 동안에는 펠리온도 무사하다는 뜻이니까.

기다리면 돌아오겠지.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갑자기 보호 막이 은빛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펠리온?”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보호 마법이 사라졌으니 당연히 펠리온이 돌아온 거겠지. 신수이자 드래곤이자 대마법사인 그의 신변이 위험해졌다는 건 말이 안 되니까.

나는 천천히 방 안을 돌아다녔다.

“펠리온. 그만 나와. 이런 장난 재미없어.”

숨바꼭질을 하는 사람처럼 옷장과 욕실, 심지어 주머니 안까지 전부 뒤졌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나오면 용서해 줄게. 나 장난칠 기분 아니야.”

말을 할수록 불안해졌다. 혹시 방어막이 아직 있는 건 아닐까? 너무 투명해서 잠깐 착각했다거나…….

합리화하고 있을 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단숨에 달려가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나 문밖에 서 있는 것은 아르만이었다.

“아가씨. 다들 이 방에서 나오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답니다. 로그리예 공자는 아직 안 돌아왔습니까?”

돌아오지 않았다. 문을 열 수 있는 것을 보니 보호 마법도 사라진 게 맞다.

하지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입 밖으로 펠리온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을 꺼내는 순간, 그가 심각하게 다치거나 죽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게 되니까.

나는 아르만에게 쉬고 있으라고 말한 뒤 무작정 아래층으로 향했다.

뛰다시피 걸어 여관 문을 거칠게 열고 나왔으나 대로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본 순간, 걸음이 멈추고 말았다.

‘펠리온을 찾아야 해.’

하지만 어떻게? 저 사람들 사이에 그가 섞여 있다고 해도 펠리온이 마법으로 모습을 바꿨다면 나는 알아보지 못할 텐데.

어두운 밤, 하나뿐인 촛불을 누군가가 후 불어 꺼트린 것처럼 암담해졌다.

머릿속에서는 경종이 울리는데 갈 곳을 모르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자리에 굳은 듯 서 있다가 아르만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가씨. 들어가서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로그리예 공자가 돌아오면 길이 엇갈릴 겁니다.”

아르만의 말이 옳다. 나는 무거운 발을 돌려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여관방으로 돌아와 문을 열었을 때,

“까꿍.”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펠리온을 발견했다.

“둘이 어디 다녀와? 나 질투 나게.”

“……너!”

나는 단숨에 달려가 그의 멱살을 움켜쥐려 했다.

로그리예의 몰골이 정상적이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옷은 어디서 노역을 하고 온 것처럼 헤졌고, 결 좋은 머리카락은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옆구리를 틀어막은 손 틈 사이로는 피가 흘렀다.

나는 당장 달려가 그의 상처로 손을 뻗었다.

“다쳤어?”

“그냥. 친구랑 조금 다퉜지.”

“친구도 없는 애가 다투긴 누구랑 다퉜다고……, 설마. 라파일 만나고 왔어? 혼자? 너 미쳤니?!”

우려했던 일이 진짜 일어나니 저절로 목소리가 커졌다. 버럭 소리를 지르는데 문가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르만이 문을 닫으려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아르만의 몸이 뒤로 쭉 밀려나더니 문이 저절로 쿵 닫혔다. 동시에 부드러운 힘에 이끌려 고개가 돌아갔다.

로그리예가 마력으로 나를 끌어당긴 것이었다.

“내가 아픈데 누구한테 신경 쓰는 거야.”

누가 다치랬냐고 타박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시트를 흥건하게 적신 피와 점점 창백해져 가는 펠리온의 얼굴이 신경 쓰였던 탓이다. 나는 그에게로 다가가 옆에 앉았다.

“옷 벗어.”

내 말에 펠리온이 당장 팔을 교차해 셔츠 밑단을 잡았다. 나는 기겁을 하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렇게 하면 상처가 벌어지잖아!”

“괜찮아, 괜찮아. 이미 벌어져 있어.”

“그게 괜찮은 게 맞아? 어? 맞냐고.”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은 걸 참으며 펠리온의 손을 치웠다.

“내가 벗겨 줄게.”

그의 옷을 잡자 갑작스러운 침묵이 찾아들며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툭하면 요란 법석을 떨던 펠리온이 입을 다문 채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먼발치에 두었다.

그 모습을 보자 심장이 크게 뛰었다.

쟤는 왜 부끄러워해서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들고 난리야.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얼굴이 홧홧해지는 게 느껴져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한쪽 팔을 먼저 빼 주고 옷을 천천히 벗겨 내는데 다친 옆구리가 눈에 들어왔다.

꽤 깊게 베인 상처는 속이 훤히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심각했다. 과다 출혈도 죽어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은 상처였다.

상황 파악도 못 하고 두근거리던 심장이 재빨리 이성을 찾고 침착해졌다.

나는 싸늘한 표정으로 펠리온을 쳐다보았다가 코끝이 찡해져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람의 상처가 이렇게 아플 일인가?’

누군가 뜨겁게 달군 갈고리로 가슴을 헤집는 것만 같았다.

주인의 체면은 생각하지도 않고 눈물이 자꾸 새어 나와 시야를 흐리게 만들었다. 나는 펠리온에게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눈을 비비는 척 시야를 깨끗하게 만들고 주머니를 열어 연고와 붕대를 꺼냈다.

연고를 발견한 펠리온의 표정이 애매모호하게 변했다. 입가에는 미소를 머금은 채 미간은 살짝 찌푸린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기. 이거 나한테 바르려고?”

펠리온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연고는 라파일과 재회했던 날, 그가 내 방에 몰래 두고 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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