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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133화 (133/151)

<133화>

키네시아는 당장 편지를 뜯었다.

소피아의 말대로 황제가 사망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벌써 일 년째 페라포네 황태자가 황제의 업무를 대신하고 있었고, 황제가 죽었다는 소문이 돈 지는 4개월이 지났다.

그런데 파라돈 황실은 이제야 황제의 죽음 알렸다. 그 이유가 단순히 조문 사절단을 보내달라는 뜻일 리 없다.

이건 레튜니아에 보내는 선전포고다.

안 그래도 남동 대륙에 두 개의 제국이 있는 것을 못마땅해하던 페라포네였다. 황제가 되면 황권을 강화하겠다는 이유로 전쟁을 벌일 것이다.

걱정스러운 표정의 키네시아에게 소피아가 한 가지 사실을 더 알려 주었다.

“그리고 이건 공식적인 내용은 아닌데요. 레튜니아에서 초상화 화가로 활동하는 정보원에게서 들었는데 황태자로 스페르모 황자가 내정되었다고 합니다.”

“하아…….”

승리가 확실한 곳으로 붙어야 하는데 두 나라의 동맹국 수나 생산량, 1년 예산 수준은 엇비슷했다.

동맹국들이 전부 군사를 지원해 줄 정도로 끈끈한 사이인지, 비축해 둔 식량이나 재정이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겉으로 드러나는 지표로만 보면 두 제국은 정말 비등비등했다.

에피파네스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키네시아는 파라돈이라면 치가 떨렸다. 그러나 국가의 중대사를 개인적인 원한으로 처리할 순 없는 법이었다.

고민하는 키네시아의 귀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안으로 오틸리에와 룩소르가 들어왔다.

키네시아가 눈짓하자 소피아는 국왕 내외에게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다. 룩소르는 키네시아를 한 번 안아 주고 소파에 앉았다.

그의 시선이 키네시아가 들고 있는 편지에 닿았다.

“너도 본 모양이구나.”

“네.”

키네시아가 미소 지으며 습관처럼 장갑을 고쳐 꼈다. 그녀는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제 손등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소매 아래로 언뜻 드러난 살도 보랏빛을 띠지 않았다.

그녀는 한참을 말없이 고개만 숙인 채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어머니. 이번 조문 사절단으로 두 분이 가시는 게 어떨까요?”

어차피 룩소르와 오틸리에를 궁전 밖으로 유인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침 적당한 핑계가 생겼다.

키네시아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하지만 룩소르는 키네시아의 제안을 단번에 수긍하지 않고 고민스러운 소리를 내었다.

“우리 둘 다 자리를 비워도 괜찮겠느냐? 키네시아 네가 혼자 모든 일을 하기엔 힘들 텐데…….”

룩소스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키네시아는 믿음직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궁전에 포넨트도 와 있잖아요. 영지를 돌보며 이것저것 배웠을 테니 도와달라고 하면 돼요. 아직 플로레타도 있고요.”

“그래도…….”

키네시아의 얼굴을 살피던 오틸리에가 룩소르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렇게 해요. 우리가 없어도 키네시아는 잘할 거예요.”

“흐음.”

고민하던 룩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약혼을 거절할 것이니 장례식에는 국왕이 가야겠구나. 그럼 네 말대로 나와 오틸리에가 다녀올 테니 무슨 일이 있거든 꼭 알리고, 무리하지 말거라, 키네샤.”

“그럼요, 아버지.”

국왕 부부는 키네시아의 양옆으로 다가와 그녀를 꼭 안아 주었다.

그 사이에서 안정과 행복감을 느껴야 할 키네시아는 눈을 깊게 내리감고 슬픔과 죄책감을 감췄다.

제 손등을 바라보며, 그 고통을 곱씹으며.

그녀는 손수 동선을 짰다. 험준하기로 유명한 렘록 산맥의 끝자락을 넘어가는 경로였다.

잘못 들어가면 위험한 곳이나 산맥을 넘어가는 것이 가장 빠르고 끝자락은 상단의 행렬도 종종 다니는 길이기에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이 순조롭게 풀리나 했더니 원치 않는 일행이 끼고 말았다.

“레바나 신전도 조문을 위해 파라돈에 가야 하니 동행했으면 합니다.”

궁전 출입이 자유로워진 레바나의 대신관이 들어와 요청했다.

키네시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가볍게 제 손등을 쓸어 본 뒤 룩소르와 오틸리에를 보며 미소 지었다.

“동행하는 게 어떨까요, 전하?”

“가는 길이 같으니 거절할 이유도 없지. 그렇게 합시다, 대신관.”

“감사합니다, 전하.”

레바나의 대신관은 동행을 허락받자마자 미련 없이 물러갔다.

그 뒤로 하루가 흘렀다.

키네시아는 룩소르와 오틸리에가 떠나기 전날, 그들을 찾아가 당부했다.

“어머니, 아버지. 렘록 산맥에 올라가시기 전에 꼭 시장의 저택에서 하룻밤 쉬셔야 해요. 그리고 그 이후에는 절대, 절대로 마차 밖으로 나오지 마세요.”

“마차 밖으로 나오지 말라……. 무슨 일이 있니?”

“산적들이 종종 습격한다는 소리를 들어서요. 밖으로 나오면 위험하실 거예요.”

룩소르와 오틸리에는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곧 키네시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키네시아는 불안한 기색으로 거듭 당부했다.

“정말 마차 밖으로 나오면 안 돼요. 아셨죠?”

“그래. 꼭 그러마.”

“너무 걱정하지 말렴, 키네샤.”

다음 날, 국왕 부부는 키네시아와 포넨트, 플로레타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한 뒤 인사를 나눴다.

궁전에 없는 이라네리아에게는 편지로 인사를 대신했다.

키네시아는 룩소르와 오틸리에가 마차에 오르기 전, 셰피오 백작에게 다가갔다.

“백작. 잘 부탁해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하.”

셰피오 백작이 키네시아와 눈빛을 주고받은 뒤 말에 올랐다.

그리고 며칠 뒤, 국왕 부부가 탄 마차가 렘록 산맥의 절벽에서 전복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

아무도 없는 레튜니아 황성 지하에 갑자기 빛이 터졌다.

작게 차려 둔 제단 아래에서 기도하던 스페르모가 고개를 들었다.

제단의 단상 위에는 축 늘어진 여자를 안아 든 남자가 빛에 휘어 감겨 있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금발과 청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자, 라파일이었다.

스페르모는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보고 몸을 납작 엎드렸다.

“교주님.”

라파일은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제단 위에 이라네의 몸을 내려놓았다.

그는 정성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옷을 정리해 주었다.

제국의 황자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행동이었으나 스페르모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렸을 적, 그는 사냥 대회에서 형제가 고의로 쏜 화살에 맞아 심하게 다친 채 숲에 버려졌었다. 피 냄새를 풍기는 그에게로 굶주린 들짐승들이 몰려들었다.

어린 스페르모는 고통과 두려움에 떨며 울었다.

“살려, 살려 주세요. 제발, 샤마흐시여. 레바나시여. 제발 저를 살려 주세요.”

그러나 그의 목소리를 들어 주는 이는 없었다. 스페르모는 연신 살려 달라고 빌면서도 자신의 죽음을 확신했다.

그러나 그 순간, 하늘에 빛이 내려왔다. 들짐승들은 두려움에 떨며 달아났고 스페르모의 상처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눈을 감은 채 허공에 떠 있는 화사한 금발의 사내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신 그 자체였다.

그 뒤로 스페르모는 레그레시오를 섬기게 되었다.

‘나 같은 미물을 신경 쓰지 않는 건 당연하지.’

스페르모는 뒤로 조용히 물러났다.

라파일은 오직 자신과 이라네만 있는 것처럼 손으로 이라네의 차가운 볼을 쓰다듬었다.

“폐하. 볼에 생채기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금방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라파일의 손끝에서 검보라색의 진득한 힘이 흘러나와 영혼이 없는 몸의 볼을 쓸었다.

그는 이라네의 가슴에 엎드려 심장 소리를 들었다. 체온은 낮고, 심박수가 살아 있는 사람의 것보다 현저히 느려져 있었다.

라파일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핏방울처럼 떨어졌다.

“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요즘 할 일이 많아 제대로 돌봐 드리지 못했죠. 하지만 너무 노여워 마세요. 이제 곧 온전해지실 겁니다. 얼마 남지 않았어요.”

볼에 붙어 있던 검보라색의 힘이 스스로 움직여 이라네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다시 심장이 정상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곧 퍼석해졌던 피부에도 윤기가 흘렀다.

반대로 라파일의 손은 순식간에 노화되어 순식간에 검버섯이 피고 탄력을 잃어, 잘못 관리한 젖은 가죽처럼 주름이 지고 말았다.

그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신성력이 거의 고갈된 데다가 오랫동안 쓰지 않은 몸이라 그런지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었다. 감각도 전과 달리 아주 둔해져 있었다.

영혼이나 마력조차도 감지하기 힘들 정도였다.

‘폐하가 돌아오실 때까지 완벽한 몸을 유지해야 해.’

그러려면 사람이 더 필요했다. 이 몸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사람이.

그리고 최대한 빨리 일을 진행시켜야 했다.

“스페르모. 키네시아 공주가 제 부모를 죽였나요?”

“아직 실행하지 못한 듯합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요. 키네시아에게 맡겨 두는 게 아니었는데…….”

라파일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서서히 일어나는 그에게 스페르모가 상황을 설명했다.

“대신 파라돈의 황제가 죽었습니다. 보아하니 국왕 부부가 조문을 갈 것 같습니다. 레바나의 대신관도 동행한다고 합니다.”

시기가 좋다. 키네시아가 행동하길 기다리지 않고 바로 가서 국왕 부부를 죽이고 레바나의 대신관을 양분으로 삼아 신성력을 채우면 될 것이다.

“다른 일은 없었나요?”

“성녀로부터 레튜니아의 황성을 방문하겠다는 편지가 왔습니다.”

“성녀라…….”

라파일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구미가 당기지만 국왕부터 죽여 왕위를 비워 둬야겠어요.”

그는 허리를 깊게 숙여 따뜻해진 이라네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폐하.”

그리고 이라네의 몸에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도록 기운을 둘러 둔 뒤 순식간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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