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펠리온은 라파일의 손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그의 손목을 움켜잡아 막았다.
“하지만 죄책감을 느꼈잖아. 샤마흐의 신관들을 죽이면서도 괴로웠잖아.”
“당신이 뭘 안다고……!”
라파일이 다른 쪽 손까지 뻗어 펠리온의 목을 양손으로 움켜쥐려 했다.
펠리온은 라파일의 다른 손까지 움켜잡았다.
“알아. 나도 그랬으니까. 나 역시 2000년 전 결혼을 약속했던 이라네를 잃고, 그녀를 살리려다가 저주를 받았어. 그 뒤로 계속 그녀의 곁을 맴돌고 있고.”
라파일의 팔 힘이 조금 약해졌다. 펠리온은 아래로 처지는 라파일의 손을 더욱 움켜쥐었다.
“네가 하려는 짓은 이라네의 영혼을 찢어서 억지로 수명이 다한 몸에 가둬 두는 짓이야.”
“…….”
“네 몸을 봐, 라파일.”
라파일이 텅 빈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봤다. 신성력을 이기지 못한 몸 여기저기가 검게 문드러져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 짓을 이라네에게 하겠다고? 그러면 이라네 역시 결코 무사하지 못할 거야. 영원히 소멸하게 될지도 몰라.”
“신성력에 닿지 않으면 돼요.”
“여긴 신이 만든 세계야. 빛은 신의 눈이고 바람은 신의 숨결이야. 피할 곳은 없어.”
“그래서 제가 만들 겁니다. 신도, 당신도, 심지어 폐하 본인조차도! 나에게서 폐하를 빼앗지 못하게!”
늘어져 있던 손에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 라파일은 신성력까지 이용해 기어이 펠리온의 목을 틀어쥐었다.
“아무도, 아무도 뺏지 못해. 나는 그녀를 되찾을 거야. 다시 살려 내 온전히 가질 겁니다. 폐하는 이제 내 거예요.”
새까맣고 진득한 기운이 펠리온의 목에 닿아 그의 살을 녹였다. 타들어 가는 통증에 그가 이를 악물고 검에 마력을 둘러 라파일의 팔을 잘라 냈다.
그러나 피는 쏟아지지 않았다.
펠리온의 목에 붙어 있던 손은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사라졌고, 신성력에 녹은 몸은 라파일의 팔을 타고 흘러 손의 형태로 변했다.
라파일의 몸은 이미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저 썩은 영혼이 뭉쳐 놓은 것에 불과했다.
펠리온은 이를 악물고 손을 뻗었다. 땅이 치솟아 라파일을 옭아맬 듯 달려들었다.
“이라네는 이미 살아 있어. 새 삶을 얻었어! 그러니까 차라리 너도-”
“아니요. 폐하는 죽었습니다. 영면에 든 채 지하에 계십니다.”
기운을 내뿜어 땅을 모래로 만들어 날려 버린 라파일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 어리석은 펠리온. 당신이 기다린 게 진짜 폐하가 맞습니까?”
화염이 치솟아 라파일의 몸을 휘어 감았다. 그러나 라파일은 머리카락 한 올조차 타지 않고 멀쩡하게 불 속에서 걸어 나왔다.
“당신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데다가 다른 모습, 다른 이름, 다른 과거를 가지게 된 그녀가 진짜 당신이 기다리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당신도 그녀가 낯설었잖아요. 외롭고, 원망스러웠을 거야. 그렇지 않나요?”
펠리온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그 순간 공기가 무겁게 뭉쳐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펠리온은 순간 이동으로 그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마력을 읽은 라파일은 펠리온이 나타날 자리에 창처럼 만든 제 손을 찔러 넣었다.
직감적으로 나타나자마자 몸을 피했으나 라파일의 검은 손은 펠리온의 옆구리를 옅게 스쳤다.
그는 피가 흘러나오는 상처 부위를 막으며 곧장 라파일을 밀어 냈다.
갑작스러운 힘을 막지 못한 라파일이 뒤로 나뒹굴었다. 펠리온은 라파일을 공중에 띄워 그를 제 마력 안에 가뒀다.
난폭한 기운이 라파일을 둥글게 감싼 막 안쪽을 거세게 치받으며 막을 깨트리려 했다.
“그래. 그랬지. 하지만 그녀가 이라네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어. 설령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그녀가 새롭게 얻은 삶을 파괴할 권리는 없어.”
라파일이 더 날뛰자 막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펠리온은 잠시 눈을 감았다.
라파일의 힘은 이미 신의 반열에 들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인간이기에 인간의 몸을 필요로 했다.
평범한 인간의 몸은 라파일의 힘을 견딜 수 없다. 때문에 그가 인간의 몸을 벗지 않는 이상 그는 자신의 힘을 온전히 사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제약도 얼마나 지속될지 모른다.
라파일은 자신의 교단을 만들고 신도를 모았다. 사람들의 믿음을 제힘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알게 된다면, 그는 더 이상 사람의 몸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펠리온도 라파일을 막을 수 없다.
‘죽이려면 지금 죽여야 해.’
펠리온이 딛고 선 땅이 흔들렸다. 주변의 물체가 허공으로 떠오르고 거대한 은빛 기류가 그의 몸을 휘어 감으며 피어올랐다. 이내 라파일을 가둬 놓은 구체 주변에 휘몰아치며 점점 조여들었다.
그것을 본 라파일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 하하, 하하하! 온몸에 있는 힘을 다 쓸 생각입니까? 그렇게 하면 펠리온, 당신도 무사하진 못할 텐데요.”
“상관없어. 이라네를 지킬 수 있다면.”
이미 저주는 풀렸고 이라네의 마음도 확인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못 들어 본 게 아쉽긴 하지만 그 미련이 이라네가 소멸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내하는 것만큼이나 커다랗진 않았다.
펠리온은 제 심장에 있는 기운까지 모두 끌어 올렸다.
내장이 망가지며 피가 역류했지만 펠리온은 미소 지었다.
“저승길 심심하지 않게 내가 같이 가 줄게.”
그에게서 진심을 읽고 창백하게 질려 버린 라파일은 더 심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구체에 금이 가고, 검보라색 기운이 삐져나왔다.
그 기운이 넓게 퍼져 라파일을 짓누를 듯 압박해오는 펠리온의 마력을 겨우 막았다.
“당신, 미쳤습니까?”
“2000년이나 혼자 공주님을 기다렸는데 제정신일 리가 없잖아?”
은빛 기류가 공기를 짓눌렀다. 기둥은 무너져 내리고 사원의 땅은 아래로 쿵, 주저앉았다.
빛에 휘말린 곳의 나무와 풀이 가루조차 남기지 않고 증발해 버리는 것을 보며 라파일은 이를 악물었다.
펠리온은 더 강하게 힘을 내리눌렀다. 검은 기류가 조금 더 뒤로 밀려났다.
땅 밑이 완전히 내려앉으며 지하가 드러났다. 그 안에는 손등에 보라색 태양을 새긴 여러 구의 시신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나란히 누워 있는 관이 보였다.
펠리온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그쪽으로 향했다.
관에 있는 것은 온전한 모습의 이라네와 라파일의 원래 몸이었다.
“이라네……?”
한순간 그의 집중이 흐트러졌다.
-쨍!
동시에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라파일을 가둬 뒀던 구체가 완전히 깨져 버리고 말았다.
곧장 검보라색 기운이 펠리온을 덮쳤다.
펠리온은 제 기운을 움직여 다시 라파일을 묶어 두려 했으나 실패했다. 라파일이 제 가짜 몸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기운을 폭발시킨 탓이었다.
뒤로 튕겨 나간 펠리온은 재빨리 기운을 회수하며 몸을 보호했다. 거대한 힘이 몸으로 빨려 들어오며 안 그래도 진탕이 된 속을 더 엉망으로 만들었다.
펠리온의 무릎이 툭 하고 꺾였다. 그는 입 안에 고인 피를 뱉어 내며 뚫린 바닥을 바라보았다.
이라네와 라파일의 몸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손등에 보라색 문양이 새겨진 채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사람 더미 사이에서도 움직이는 기척이나 생명의 기운은 없었다.
“놓쳤네…….”
허탈하게 웃으며 펠리온이 중얼거렸다. 이라네에게로 돌아가야 하는데 눈앞이 가물거렸다.
몸에 힘이 빠져나가며 의식이 흐려졌다.
‘공주님이 걱정할 텐데…….’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펠리온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
키네시아는 응접실 탁자 위에 국왕의 직인이 찍힌 편지를 내려놓았다.
그녀가 편지를 요르고스 쪽으로 밀어 내자 다리를 꼬고 앉아 차를 마시던 그가 턱짓으로 편지를 가리켰다.
“뭐야?”
“황태자 전하께 가져다주세요.”
요르고스가 편지로 손을 뻗으며 입이 찢어지게 웃었다.
스페르모는 이미 레튜니아로 돌아간 후였기에 그는 키네시아가 내민 편지가 당연히 청혼을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일 거라 여겼다.
“드디어 나와 결혼할 마음이 생긴 거야? 하긴 스페르모, 그 음침하고 속도 모를 놈보다는 내가 낫지.”
“아니요. 청혼을 거절하겠다는 내용이에요.”
요르고스의 볼에 잘게 경련이 일었다. 그의 손아귀에 있던 편지는 처참하게 구겨졌다.
“키네시아. 내 경고를 못 알아들었어? 나와 결혼해야 네 나라가 산다는 뜻이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동맹을 맺어야 하는 거죠.”
키네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서 페라포네 황태자에게 전하세요. 에피파네스와 동맹을 맺고 싶다면 조금 더 매력적인 조건을 제시하시라고요.”
“난 황자야. 나보다 매력적인 조건이 있을 것 같아?”
“……빠른 시일 내에 돌아가시길 바랄게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요르고스의 말을 무시하며 키네시아는 응접실을 나왔다.
꼴 보기 싫은 것을 치워 버리니 속이 다 시원했다. 어쩐지 오늘따라 손등의 통증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에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가 들리고, 소피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품에는 샛노란 눈을 가진 고양이 한 마리가 안겨 있었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옅은 베이지색의 무늬가 사랑스러운 고양이였다.
“공주님. 예전에 말씀하셨던 고양이를 구해 왔습니다.”
키네시아가 고양이를 안아 들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이젠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중얼거리며 이마를 긁어 주자 고양이가 갸르릉 거리며 키네시아의 손가락에 이마를 비볐다.
키네시아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떼어내자 소피아가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키워야지 어쩌겠어. 전담 하녀를 붙이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도록 해 줘.”
키네시아가 고양이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녀는 제 다리 사이를 요리조리 돌아다니며 이마를 비벼 대는 고양이를 내버려 둔 채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소피아가 편지를 내밀었다.
“그리고 이건 파라돈에서 온 편지입니다. 국왕 내외께서도 같은 편지를 받으셨는데,”
소피아가 잠시 말을 끊고 숨을 골랐다.
“파라돈 황제의 죽음을 알리는 내용이었습니다.”